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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스트> - 케이는 어떻게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가 되는가?
<더 포스트> - 케이는 어떻게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가 되는가?
  • 김성원
  • 승인 2019.01.30 09: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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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훈극?

2018년 2월과 3월, 한 달 간격으로 스필버그의 신작 두 편을 만날 수 있었다. <더 포스트>와 <레디 플레이어 원>. 국내 개봉은 <더 포스트>가 빨랐지만 사실 <더 포스트>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후반작업을 중단하고 만든 영화였다. 이유는 하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스필버그는 그걸 견딜 수 없었던 거 같다. 그리고 트럼프 당선의 이유 중 하나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언론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더 포스트>는 언론의 올바른 역할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 보는 시선이 대다수였다. 두 달 앞서 개봉했던 우리영화 <1987>과 비교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보다 세부적인 관심도 있었다. 영화 속 1971년을 이겨낸 케이(메릴 스트립)에 주목하여 페미니즘으로 읽어낸 관점. 증권거래소를 입장할 때와 법정을 나설 때, 다수의 여자들 가운데를 지나가는 케이의 모습이 그러한 시각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런 류의 영화 장르 본연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었다. 언론과 닉슨 정부의 대립을 바탕으로 한 긴박감 넘치는 사회드라마로 읽으려 하는. 어느 면에서 봐도 <더 포스트>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관점은 뭔가 이 영화를 말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스필버그의 초점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2. 무엇을 봐야 하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케이다. 편집장 벤을 연기한 톰 행크스가 메릴 스트립과 함께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조연에 불과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케이가 결단하는 순간을 보는 영화다. 그때 케이는 워싱턴 포스트 사주가 된다. 스필버그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오직 영화적 방법을 통해 보여준다. 물론 그녀는 이미 사주의 자리에 있다. 그러나 케이는 자신의 위치 주변에서 뭔가 머뭇거리며 겉돌고 있는 중이다. 남편의 자살로 맡게 된 역할, 아버지가 남편에게 물려준 경영인의 자리에서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몇 가지 관점에 초점을 맞춰보자. <더 포스트>가 올바른 언론의 역할을 보여주는 영화였다면, 주인공은 벤과 편집부의 기자들이 되었어야 한다. 알란 J. 파큘라의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나 토마스 맥카시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조망한다면, <더 포스트>는 몇몇 장면들로만 설명할 수밖에 없는 협소한 영화가 되고 만다. 케이라는 인물을 여성으로 일반화하는 순간 많은 비약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언론과 정부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회드라마였다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둘 중에 누가 승리하는 지를 보여주는 법정 장면이 되는 게 옳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더 포스트>에서의 법정 장면은 몇몇 사람들의 증언, 변호사의 반론, 판사가 입장하는 장면뿐이다. 그것도 각각 쪼개진 채로.

영화의 초점은 명백하다. 워싱턴 포스트의 진정한 사주로 변모해가는 케이. 그걸 보여주는 두 번에 걸친 그녀의 결단.

3. 사주의 자리에 드리워진 그림자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남짓한 1966년의 시간들이 지나간 후, 케이는 1971년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악몽에서 깨는 듯한 케이의 모습. 침대 위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문서와 서류철. 케이의 악몽이 영화 속 1966년이었는지, 다가올 투자운용사와 이사진들과의 회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건 잠자던 케이를 뒤덮고 있는 온갖 문서들과 서류철이다. 케이를 짓누르고 있는 사주로서의 무게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회의장으로 향하는 복도에 워싱턴 포스트의 전 사주였던 케이의 아버지와 남편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들의 사진을 보고 안정을 찾은 듯 보이는 케이는 회의장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사주가 이끌어가야 할 회의에서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이사인 아서가 가치 절하된 주식의 가격을 문제 삼을 때도 그녀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결국 케이를 대신하는 건 고문 변호사이자 참모인 남자 프리츠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회의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여자 케이. 이곳에서 케이가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우리는 이미 복도에서 보았다.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케이를 맞이하는 건 남편 필의 사진이다. 얼핏 보면 지친 아내를 맞이하는 다정한 남편의 표정.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회사 안에서 그 얼굴이 뜻하는 바를. 죽어서도 작동하는 그의 아우라 혹은 그림자.

뒤이어 문이 열린 방 앞에서 케이에게 대놓고 들으라는 듯, 아서는 필이 죽는 바람에 케이가 사주가 된 거라며 그녀의 경영능력을 무시한다. 아서에게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는 여전히 필인 셈이다.

 

4. 첫 번째 결단

영화의 76분경, 펜타곤 기밀문서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케이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 여섯 명의 통화로 이루어지는 이 장면은 <더 포스트>의 백미다. 전화를 받으러 들어온 케이는 자신의 공간에서 프리츠와 통화를 하고 있는 아서를 내보낸다. 항상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던 아서를 차단하고 닫힌 공간에 홀로 남은 케이. 언제나 옆에 있었던 프리츠는 수화기 저 너머에 있다. 이제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전화를 통한 언쟁이 시작되자 의아한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떠오르며 케이를 내려다보기 시작하는 카메라. 빙글빙글 돌며 그녀를 짓누르는 듯한 이 높이와 무게감은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인가?

편집진과 경영진으로 갈린 전투에서 언제나 그랬듯 케이는 마지막으로 프리츠의 의견을 구한다. 나라면 보도하지 않겠다는 프리츠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케이는 "Let's go. Let's do it. Let's publish." 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단호하다기보다는 뭔가를 저질러버린 듯한 케이의 결정. 이 순간 카메라는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케이에게서 멀어져가는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누구의 것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를 짓누르며 그녀의 자리에 머물러있던 전 사주인 아버지와 남편이다. 케이가 사주로서 결단을 내린 순간, 그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케이의 모습이 아직은 불안해 보인다.

5. 두 번째 결단

기사는 준비됐다. 인쇄 지시만이 남았다. 케이는 다시 결정의 자리에 불려간다. 두려움 가운데 내렸던 케이의 결심은 여전히 유효할까? 편집장인 벤을 제외한 경영진들 모두는 케이의 결정을 되돌리려 한다. 워싱턴 포스트라는 언론사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서 그래야만 한다고. 카프카의 아주 짧은 소설 <법 앞에서>의 문지기와 같은 그들. 그 앞에서 케이는 신문의 사명을 언급한다. 역시나 아서는 신문의 전통과 업적을 지켜야 한다며 그녀에게 반대한다. 그런 아서 앞에서 케이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아버지의 회사도, 남편의 회사도 아닌 나의 회사라고. 거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내 이사진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명성과 재산 그리고 가업, 이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할 수 있는 상황 앞에서 케이는 '내가 이것을 해야만 해! 이게 옳은 일이야!' 라는 결단을 이미 내린 상태다. 케이는 드디어 자신을 막고 있던 문지기와 문을 통과했다.

말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가는 케이와 남아 있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는 다시 부유하며 잡아낸다. 그리고 그 시선이 어떤 마음으로 케이를 보고 있는지를 프리츠의 너털웃음으로 대신한다. 드디어 케이는 워싱턴 포스트 사주의 자리에 안착했다.

 

6. 영화를 보는 즐거움.

앞에서 제시했던 몇몇 관점 이외에도 이 영화를 보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 그건 스필버그가 겨냥했던 바였을 거다. <더 포스트>의 관심은 케이라는 인물의 변화 과정에 있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언론의 자유와 그에 수반되는 언론의 사명에 있다.

많은 감독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즉 주제 혹은 메시지에 모든 것을 맞춰서 영화를 만들곤 한다. 선명하긴 하지만 영화를 지루한 무채색으로 만드는 선택이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더 포스트>를 의도적으로 분리시켜 만들었다. 말하고자 하는 것과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 이 사이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생겨나고 두께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 다채로움이 피와 살이 되어 영화를 작동시킨다.

<더 포스트>를 다시 보게 된다면, 영화의 메시지만을 보려하는 일반 관객의 시선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를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김성원

2013년 장편 <완전 소중한 사랑> 연출부로 영화에 입문했다. 첫 영화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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