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레이디 버드> ― 떠남으로써 돌아가기, 오해함으로써 이해하기
<레이디 버드> ― 떠남으로써 돌아가기, 오해함으로써 이해하기
  • 장혜민
  • 승인 2019.01.31 14: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름 바꾸기와 주체성

새크라멘토, 철도길 옆 구린 동네에 주거하고 성모 여고에 다니는 17살 여학생,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호명된 이름은 ‘크리스틴 맥 피어슨’. 2002년의 멋진 점은 앞뒤 숫자가 같다는 것뿐이라는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의 모든 것을 지겨워한다. 삶의 무료와 일상의 지긋지긋함을 못 견디겠는 그녀는 스스로 ‘Lady Bird 레이디 버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일탈을 꿈꾼다. 레이디 버드는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스스로 예명을 선물한 걸까?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자아보다는 주체와 관련 있다. 주체와 자아의 차이점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사진 속 내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진 속 좌우 반전 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묘한 불쾌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평소 거울로 보고, 상상하는 얼굴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는 증거다. 사실 좌우가 반전된 얼굴이야말로 타인에게 보이는 얼굴인데 이것을 주체와 연관 지어 표현하자면, 주체는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즉 외부세계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름이 자아가 아니라 주체성과 관련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주체에게 주어진 이름은 스스로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리기 위한, 호명되기 위한 것이다.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나의 고유한 주체성인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이 타자로부터 불러 질 때, 외부세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 말은 이름이 주체성의 위치를 확보하기 이전에 먼저 주어지지만, 그것이 타인에 의해 불리고 난 후에 ‘사후적’으로 주체의 지위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디 버드>는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되는 사적이고 내적인 ‘자아 찾기’ 영화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귀결되는, 외부세계 속 나의 위치를 찾아가는 세미퍼블릭한(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 외적인 ‘주체성 찾기’ 영화다.

자기부정과 자기기만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드’를 새로운 주체성으로 만들기 위해 외부세계와 투쟁하는 과정을 영화 속 대사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추했다. 하지만 부도덕하진 않았다. 그녀의 ‘레이디 버드 되기’ 과정은 크게 ‘뉴욕으로 대학가기’와 ‘사랑의 기만’으로 나눌 수 있다. ‘뉴욕으로 대학 가기'는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문학과 예술의 도시에 사는 ‘뉴요커’라는 이상적 주체를 성립하기 위해선 필수다. ‘사랑의 기만’은 ‘레이디 버드 되기’ 밖에서 그녀의 자기 기만적 행위를 폭로하며 마침내 레이디 버드가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 새크라멘토와 가족, 그리고 친구를 인정하게 만드는 ‘레이디 버드 되기’의 필연적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레이디 버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나이다. 레이디 버드는 숭고한 사랑과 첫 경험의 순간을 기다리는데 마침내 자신 운명의 짝 ‘대니’를 만난다. 전형적인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의 장남 대니는 ‘교회 오빠’와 같은 이미지로 레이디 버드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거기다 ‘대니’의 친할머니 집은 레이디 버드가 지나가며 구경만 해야 했던 꿈의 집, 커다란 성조기가 아메리칸 드림처럼 펄럭이던 파란 저택의 주인이다. ‘대니’는 이제 ‘교회 오빠’에서 레이디 버드의 ‘숭고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 상대는 대니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니여도 괜찮았다. 레이디 버드와 대니는 서로에게 급격히 호감을 느끼고 진정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같았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레이디 버드에게 ‘대니’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부속물, ‘파란 저택’과 같았다. 레이디 버드는 대니의 단정함이, 그의 유복함이, 그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화목함이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와 다르기 때문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레이디 버드에게 가족과 집, 가난은 늘 부정하고 싶은 세계다. 하지만 주체는 자신의 외부세계를 부정하면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는 주체가 되기 이전에 이미 언어, 법, 관습, 규율, 국가 등의 외부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에 대한 부정은 결국 그 세계에 속해 있는 자신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체가 주체로써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곳은 오직 자신이 속한 외부세계 안에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주체의 지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세계에 대한 응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주체가 자신의 외부세계를 부정하면 결국 그 세계에 속해 있는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데, 레이디 버드는 자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다. 영화에선 이런 자기기만이 달콤한 사랑의 순간으로 포장돼 아주 재치 있게 폭로되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별에 이름 짓기’ 장면에서다.

레이디 버드는 대니와 함께 밤하늘 별을 보며 자신들만의 별을 하나 찾는다. 사랑으로 충만해진 레이디 버드는 대니에게 자신의 가슴을 만져도 된다고 허락해 주지만 대니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며 “널 아껴주고 싶어.”라는 말로 레이디 버드를 더욱더 벅차게 만든다. 둘은 마침내 “사랑해”란 말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대니의 사랑 고백이 은밀하게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사실 그가 가슴을 만지지 않은 이유는 레이디 버드를 아껴서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하는 성 정체성 때문이다.

그레타 거윅은 이 자기 기만적이고 거짓된 사랑의 순간을 대니가 ‘우리들의 별’에 ‘클로드 Claude’(프랑스어로 바보, 바보 같음을 의미)란 이름 짓는 것으로 짓궂게 보여준다. 대니는 이 상황을 바보 같다고 표현함으로써 스스로 자기기만을 폭로하고 있지만 레이디 버드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의 충만함에 빠져있다. 후에 레이디 버드는 대니가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당시 자신이 믿었던 숭고함의 순간이 자의적이며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찬 순간이었음을 사후적으로 재정립한다. (그래도 클로드란 별은 마침내 빛을 발하며 사후적으로 자신의 주체성, ‘바보 같음’을 구성하게 됐다) 레이디 버드는 외부세계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하는 기만을 저지르며 눈 감은 자였다가 기만이 폭로되면서 마침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주체는 호명되어야 한다.

‘레이디 버드 되기’의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뉴욕이다. 가난한 새크라멘토의 집을 벗어나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쥔 뉴요커 되기는 진정 레이디 버드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엄마 매리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하여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레이디 버드와 그녀를 부정하는 매리언과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이는 결국 레이디 버드가 하는 방황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매리언을 향해 있단 걸 알 수 있다. 둘의 인정 투쟁은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사기 위해 들린 ‘옷가게 장면’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이 고른 옷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매리언에게 “엄마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라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길 요구한다. “Of course, I love you! 당연히 널 사랑하지!” 매리언은 사랑한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한다. 레이디 버드는 집요하게 묻는다. “But do you like me? 그런데 날 좋아해?” 매리언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레이디 버드의 마지막 질문으로 사랑과 좋아함, 무거움과 가벼움의 가치는 순식간에 전복된다.

시인 이성복은 그의 책 <아포리즘>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딸을 사립 고등학교를 보내려고 정신병원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건 결코 생리적이지 않다. 거기선 희생과 숭고함 마저 느껴진다. 반면에 좋아하는 감정은 사랑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사랑보다 직관적이고 원초적이고 생리적이다. 거기엔 사랑의 뒤편에 있는 고통도, 희생도 없다. 누군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할 때, 초콜릿이 가지고 있는 열량과 당분에 자신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이디 버드는 매리언에게 love가 아니라 like를 요구한다. 이것은 이해가 아니라 인정의 차원이다. 긴 침묵 뒤에 매리언은 대답한다.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 레이디 버드는 차갑게 매리언을 힐난한다.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라면?” 매리언은 다시 침묵한다.

레이디 버드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매리언과 인정 투쟁을 벌이려는 걸까? 이 질문을 하기 전 예명 짓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사실 스스로 예명을 짓는 건 굉장히 독특한 행위다. 흔히 사춘기 시절 머리를 염색하거나 스타일을 바꾸는 경우는 많아도 이름을 짓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굳이 ‘이름 짓기’를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야만 했을까?

레이디 버드의 본명 ‘크리스틴 Christine’ 은 ‘Christian 기독교의 추종자’에서 유래됐다. 바로 이것이 매리언이 레이디 버드에게 원했던 주체성이다. 차분하고 깔끔한 근면한 아이. 그녀의 이름 자체가 이미 내포하고 있는 주체성 때문에 이름을 ‘레이디 버드’로 바꾼 행위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가족과 집, 성모 여고, 새크라멘토 그리고 신이라는 자신의 외부세계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외부세계와 주체 사이의 투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외부세계의 핵심에는 자신에게 ‘크리스틴’이길 강요하는 매리언이 있다. 레이디 버드가 스스로 예명을 부여한 행동은 그 자체로 매리언을 향한 반기였으며 인정의 요구였다.

 

 

‘주체 되기’와 두 번의 응시

레이디 버드의 치열한 주체성 싸움은 레이디 버드가 뉴욕에 있는 학교에 지원했단 사실을 알게 된 매리언이 어떤 대화도 거부하면서 끝내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은 레이디 버드가 아빠 래리가 몰래 넣어 보낸 매리언의 편지를 읽게 되면서 바뀐다. 쓰레기통에 구겨진 채 버려져 있던 편지에 담긴 매리언의 진심,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라는 네 예명 참 예뻐.” 마침내 매리언은 레이디 버드를 호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얻었음에도 그녀는 정작 뉴욕 낯선 곳에서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주체 되기’가 호명을 필요로 한다면 레이디 버드는 왜 그토록 원하던 레이디 버드라는 주체를 거부하고 ‘크리스틴’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걸까?

‘주체 되기’는 총 두 번의 응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응시는 내가 타자를 응시하는 것(내가 보는 곳)이라면 두 번째는 타자의 입장에서 나를 응시하는 것(내가 서 있는 곳)이다. 첫 번째 시선, 타자를 응시하는 건 타자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이것은 레이디 버드가 응시하는 크리스틴, 새크라멘토라는 외부세계를 의미한다. 당연히 그 세계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키스 리처즈처럼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다던 아빤 직장에서 잘렸고 몇 년 동안 우울증약을 복용 중이었다. ‘대니’는 게이였고 ‘카일’과의 첫 경험은 서로의 순결을 받친 것이 아니라 카일에게 속아 혼자서만 순결을 받친 꼴이 됐다.

두 번째 시선, 타자의 시선에서 나를 응시하는 건, 내가 어디쯤에서 타자를 보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레이디 버드가 뉴욕에서 매리언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녀는 매리언과의 통화에서 갑자기 새크라멘토의 거리에 관해 이야길 한다.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으로 새크라멘토 도로를 달린 레이디 버드는 평생 다니던 길들과 가게들이 정겹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운전하며 차창 너머로 보는 새크라멘토의 풍경은 레이디 버드에겐 일상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 보는, 타인의 시선에 더 가깝다. 레이디 버드는 낯선 시선으로 새크라멘토를 다시 보게 됐고 거기서 새크라멘토가 가지고 있는 여유와 정겨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매리언에게 사랑과 감사함을 표현한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세계를 마주했고 그 안에 있는 타자들을 인정하게 됐으며,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평생 봐오던 풍경이 낯설어지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이 바로 ‘타자 되기’ 그리고 ‘주체 되기’의 완성이 아닐까?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드가 되기 위해선 크리스틴을 인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다. 크리스틴이란 이름은 레이디 버드 보다 먼저 존재했지만 레이디 버드라는 방황 뒤에야 그 주체성을 갖게 됐다.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인정함으로써 레이디 버드가 됐고, 새크라멘토를 떠남으로써 사랑하게 됐고, 매리언을 오해함으로써 이해하게 됐다. 결국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가 되기 위해서 크리스틴을 응시해야 했고 크리스틴의 눈으로 다시 레이디 버드를 응시해야만 했다. 영화의 가장 첫 장면, 대학교 탐방을 끝내고, 호텔에 있는 이불을 깔끔하게 정리한 매리언이 레이디 버드에게 묻는다. “집에 갈 준비 됐니?” 레이디 버드는 마침내 날아갈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장혜민

영화 보기를 좋아해요.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장혜민
장혜민 info@ilemonde.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