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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여인들은 연대한다 -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서 발견한 어떤 정치성에 대하여
고통받는 여인들은 연대한다 -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서 발견한 어떤 정치성에 대하여
  • 배태웅
  • 승인 2019.01.31 14:2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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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과 ‘인간’의 영화

알폰소 쿠아론은 그간 작품 속에서 인간 그 자체를 제재로 희망의 가치를 피력하기도 하고(<칠드런 오브 맨>), 우주에서 조난당한 인간을 통해 사지에서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동력이 무엇인지 그려내기도 했다(<그래비티>). 그러므로 그가 최근 ‘인간’을 테마로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그가 넷플릭스를 통해 발표한 또 다른 인간-영화, <로마>에서도 유지된다. 그런데 <로마>의 인물들은 여타의 쿠아론 영화 속 인물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없다. 목표가 없으니 성취도 없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키’가 ‘휴먼 프로젝트’로 향하는 모습이, <그래비티>에서는 스톤 박사가 지구에 도달하는 모습이 각각 나타나지만 <로마>의 클레오와 소피아는 그 어떤 것에도 성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고통받으며 살아있다. 말하자면 <로마>에서 알폰소 쿠아론적 의미의 ‘인간’은 ‘고통받는 여인들’인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고통받게 하는가

영화는 바닥을 닦는 클레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클레오에 대한, 또는 클레오의 일에 대한 영화라는 일종의 선언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가장 단순하게 분석하는 법은 ‘<로마>는 클레오의 삶에 대한 영화이다.’라고 말하는 일일 것이다. 조금 더 길게 말하자면 ‘영화 <로마>는 세상에게 고통받는 클레오의 모습을 담았다.’ 정도가 되겠다. 누군가는 이 말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영화에서 클레오가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문제일 뿐인데, 어떻게 세상이 그녀를 공격한 것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어렵지 않다. 옥상에서 빨래하던 클레오는 자신이 일하는 가정의 자제 중 하나인 페페와 함께 ‘죽은 척’을 한다. 나도 죽어서 말 못해, 하며 시작된 일종의 놀이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 다음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클레오의 고된 노동의 흔적들, 빨랫줄에 걸린 채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수많은 옷들이다. 그것들은 클레오의 입에서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공격이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하게 된다. 바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계급제의 압박이다.

클레오는 가내 상주 가정부로서 가족들과 항상 함께하며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으나, 냉정하게 말하면 그저 자본주의의 논리 하에 고용된 하녀일 뿐이다. 이를 증명하는 장면은 꽤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함께 즐겁게 TV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남편의 차를 준비하라는 고용주 ‘소피아’의 말에 곧바로 집안일을 시작하는 클레오의 모습부터, 결정적으로는 클레오의 분만을 시작하기 위해 환자의 개인정보를 묻는 원무과 직원에 말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는 소피아의 어머니 ‘테레사’의 모습까지. 넓게 보면 소피아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클레오에게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도 포함될 수 있겠다(클레오는 소피아가 아이들에게 남편의 외도를 털어놓을 때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같이 지내는 사람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이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두 번째 공격은 바로 ‘페르민’의 존재다. 그녀는 친구이자 동료인 ‘아델라’를 통해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그는 클레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 떠나버리고, 수소문해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간 클레오에게 험한 말을 내뱉는다. 여기에서 이 둘의 이야기가 멈췄다면 페르민의 존재가 세상의 폭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우리는, 그리고 클레오는 우익의 손이 되어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학생들을 죽이는 페르민의 모습을 보게 된다. 클레오의 앞에 페르민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클레오의 시선과 그 광경을 관조하는 카메라의 시선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 같은 기묘한 인상을 받는다. 더 나아가 이 장면에 한해서는 클레오라는 인물이 단순한 인물의 역할을 넘어 한 개의 시선으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는 클레오라는 ‘시선’을 통해 ‘성체 축일 대학살’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는 ‘클레오의 앞에 살인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페르민’이라는 요소와 ‘성체 축일 대학살’의 잔혹함을 뒤섞어 전체 장면의 비극성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클레오가 받을 상처의 무게를 관객들이 똑같이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사적인 사건이 정치적 사건의 안으로 파고들어 그 둘을 분리해낼 수 없게 될 때, 그곳에 가해자이자 살인자로 존재했던 페르민이라는 인물은 세상이 클레오에게 휘두르는 무기가 된다.

클레오가 그러하듯 소피아 또한 고통받는 인물이다. (다만 소피아의 고통은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고, 이 점은 곧 <로마>가 소피아의 영화가 아니라 클레오의 영화인 이유이기도 하다.) 소피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다른 여자와 살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 남편 안토니오 때문에 당장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 때문에 예민해진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클레오에게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소피아가 클레오에게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영화 전체에 걸쳐 몇 차례 목격하는데, 두 여인이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다가도 그 장면들을 떠올리면 둘 사이에 높게 쌓인 계급의 벽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자들은 모두 혼자야.”라고 넋이 나간 듯 말을 뱉어내던 소피아의 모습 또한 보았다. 클레오와 마찬가지로 소피아도 한심한 남자에게 상처받은 인물이고 그녀 스스로도 무너져가는 내면을 견딜 수 없어 남을 상처 입히기를 택한 것이었을 터다. 그녀가 쉽게 화낼 수 있는 인물이 항상 옆에 있는 클레오였을 뿐이고.

 

상처의 극복 혹은 실패

이러한 소피아의 사정과는 별개로 클레오가 세상에게 당한 폭력 중 첫 번째, 소피아와의 신분 차이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소피아는 여전히 클레오의 주인이고, 클레오는 여전히 소피아를 위해 일해야 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격 없이 지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기대하게 되기도 하는데(클레오가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주었으므로), 동시에 이야기가 그렇게 맺어졌다면 어떤 의구심을 품고 극장을 나서야 했으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수많은 희생을 딛고서도 확실한 해피엔딩에 도달하지 못한 <칠드런 오브 맨>의 경우를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감독은 이야기를 ‘동화적 안전함’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인물들의 삶의 무게를 존중하지 않는 일이라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감독은 클레오가 남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장면을 마련해준다. 이는 같은 상처를 가진 소피아가 회복을 시작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익사할 뻔한 사건이 발생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클레오는 무작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아이들을 구해내고, 해변에 지쳐 반쯤 쓰러져 있는 세 인물의 곁에 다른 가족들이 달려와 앉는다. 서로에게 투신하듯 모여들어 마치 모래성 같은 형태를 이루며 끈끈하게 붙어있는 이들의 모습은 ‘가족애’라는 무형의 관념을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이 바다 시퀀스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작품 전체에서 가장 많은 노력이 들어간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여인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해가 내리쬐는 모래사장에서 소피아와 클레오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각자의 가장 깊은 마음을 꺼내어 상대방과 공유한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라고 속으로만 앓던 말을 뱉어낸 클레오와 ‘우리는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라고 처음 소리 내어 말하는 소피아. 클레오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표출함으로 아이와 아이의 죽음(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들)에 작별을 고할 수 있었고,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소피아에게 곁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소피아는 그것에 보답하듯 클레오에게 진심 어린 말을 전한다. 그들은 마침내 연대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생겼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 가능하다.

 

그들의 연대가 빛나는 이유

<로마>에서 그들의 연대만큼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이다. ‘고통받는’ ‘여인들’, 다시 말해 힘겨운 상황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초상은 표현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물들의 불행을 대상화하여 전시하거나, 혹은 그것을 착취하여 서사를 진행시키는 등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이미 여럿 보았다. 그 때 영화는 영화로서의 가치를 일정 부분 상실한다. 관객이 그것을 ‘영화’로 소비하는 것에 불편함에서 죄책감까지 느끼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경우, 영화는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나 역시 클레오의 고통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의 중반부까지를 보면서는 ‘이 영화 또한 그녀의 고통을 착취하여 운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쿠아론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피해자들을 연대하게 함으로써 일면 위태로웠던 서사에 방점을 찍었다. 감독의 그러한 선택으로 그들은 마침내 서로의 손을 잡았고, 피해자성에 매몰되지 않고 주체성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연대는 영화 밖 인물들이 개입해 발생시킨 것인가?’와 같은 의문이 가능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애초에 연대하게 되어있었다. 궁지에 몰린 약자들은 상대방이 싫든 좋든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한 사람들은 결말을 두고 세상이 그들의 연대를 강요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주장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연대는 분명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그들도 서로를 끌어안은 소피아와 클레오의 이미지가 가진 따뜻한 에너지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연대는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둘 사이에 세워져 있는 신분의 벽은 여전히 높고 견고하니까. 하지만 쿠아론이 두 여성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약자들의 연대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

바닷가에서의 사건 때문에 그들의 연대가 너무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이 주장에는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싶다. 그들의 연대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닷가의 그 장면이 허락되기까지 클레오는 계속되는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고, 소피아는 본인까지 총 다섯 명 분의 흔들리는 삶을 붙잡고 버텨내야 했다. <로마>는 이 분투의 과정을 깊이 있게, 타자화하거나 대상화하여 소비하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영화다. 이 말은 곧 <로마>가 실수하지 않고(앞서 언급한 함정에 빠지지 않고) 만들어진 여성 서사 영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와 페미니즘

성 불평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현 시대에서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다룬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 결과물에 여성주의적 정치성을 부여한다. 더불어 여권이 낮았던 70년대의 멕시코를 배경으로 (1970년대 초반은 멕시코에서 페미니즘이 태동하기 전으로, 멕시코에서 여성의 정치·사회적 입지가 명확해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이순주, 2005))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두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그 정치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렇지만 <로마>가 단지 정치적이라서 훌륭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영화가 정치성을 띠기는 의외로 어렵지 않다. 흔히 ‘사회 고발적’, 또는 ‘사회 비판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영화들을 보라. 그것들은 모두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이 아닌가. 이런 영화들이 정치성을 전달하는 방식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오히려 쉽게 수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반면, 애초에 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인 <로마>가 우연치 않게 획득한 그것은 은근하게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바로 이것이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이다. <로마>의 정치성은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다.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와 관객들을 교화하려 들지도 않고, 제발 자신의 이야기에 설득당해 달라고 애걸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관객들을 어떻게 바꿔놓아야겠다는 야망으로 가득 찬 장면들이 없다. 그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가 반쯤 의도한 정치성을 스스로 발견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감독이 유모에게 바치는 작은 헌사가 걸작이 되어가는 순간을 목격하기만 하면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 배태웅

1999년생. 영화과 입학을 준비중이다. 보고 느낀 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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