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왜 인간이고, 왜 여성이며, 왜 영웅인가? 영화 '알리타:배틀엔젤'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왜 인간이고, 왜 여성이며, 왜 영웅인가? 영화 '알리타:배틀엔젤'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02.18 1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이 영화 <알리타>를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영웅이 ‘될’ 존재와 악당으로 규정 ‘된’ 적들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어찌어찌 밀고나가다가 흔한 사랑의 문법으로 망쳐버린 사람이 누군지 말이다. 

 

내가 아는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그는 영웅과 적의 싸움을 저렇게 순진하게 마무리 짓지도 않을 뿐더러 사랑이야기를 그렇게 의미 있게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누구던가. 이 감독의 화려한 이력을 여기서 들춰볼 생각은 없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만 말해본다면, 그는 12살 때 존 카펜터 감독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될 결심을 했고 <엘마리아치>,<데스페라도>,<황혼에서 새벽까지>,<패컬티>,<씬시티>,<스파이키즈>,<플레닛 테러> 등으로 어이없는 상상력과 유혈이 낭자한 고어 세계관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으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죽이 맞아 서로의 영화 세계를 꾸준히 교류, 구축해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영화 <알리타>를 빤한 영웅, 사랑 서사 속에 끼워 넣기 하듯 만들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용의자는 따로 있다.

 

제작자 제임스 카메론. 이 영화를 보다보면 제임스 카메론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쳐도, 이건 좀 과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게 개입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역대급 화려한 CGI와 퍼포먼스 캡쳐 기술로 무장했다고 해도 무성영화 시절의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채플린 영화 속 액션의 긴장감을 넘어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CGI기술의 무한한 상상력을 영화 <아바타> 식, 아니면 <타이타닉> 식으로 적당히 타협해버린 부분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금할길이 없다. 이 영화 <알리타>는 예측 불가능한 서사로,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들던 로드리게즈 표 영화가 분명 아니었다. 

 

일단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여러 갈래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영화이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뒤통수 맞듯 모종의 의미를 알아채거나 영화의 주된 이야기에 공감하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그럼에도 로드리게즈 감독을 옹호하는 것을 시작으로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공감하는데 실패하게 된 이유를 말하려는 것은, 이로써 이 영화에 걸었던 기대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어서이다.

일단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주요 인물을 다루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갑작스레 알리타(로사 살라자르)와 인연을 맺게 된 이도 박사(크리스토프 왈츠)와 남자친구인 휴고(키안존슨)는 어쩌면 영화 <알리타>를 롤 플레잉 게임에 설정된 캐릭터로서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모양새가 너무도 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을 통해 영화<알리타>를 세분화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해 보인다. 대신 내가 ‘알리타’에 대해서 질문하려는 것은 첫 째, 왜 알리타는 어떻게 인간으로 규정되고 있고 둘 째, 어떻게 여성으로 정의되었으며 셋 째, 어떻게 영웅으로 되어가고 있는 가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알리타를 너무 성급하게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고 여성으로 규정하기 전에 너무 많은 편견을 작동시키고 있으며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과정을 소진시키고 만다.

오렌지의 달콤함에 이어 초콜렛의 단맛을 맛본 알리타는 이미 인공지능이 탑재된 사이버네틱스 기술의 로봇으로서 감각만을 회복하면 된다는 식의 에피쿠로스 학파적 인간을 보여준다. 실제로 알리타의 감각적 경험은 초콜렛의 단맛과 휴고와의 입맞춤뿐이다. 게다가 알리타에게 고통은 무딘 촉감의 다름 아니다. 이도 박사에게 발견될 당시 알리타의 몸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알리타의 머리만이 신체 전부였던 것이다. 이 쯤 되면 알리타는 고통 없는 최선의 신체로서 아포니아(aponia)의 전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기억을 잃은 알리타가 갑작스레 방어태세를 취하는 순간에는 감각과 기억이라는 층위에서 활동하는 철학적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또 하나의 의구심을 만든다. 신체가 사라지고 ‘머리’만 남은 알리타에게 여성 성은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 이도 박사가 이식해준 몸이 여성의 몸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제로 박사가 알리타에게 준 몸도 여성이라고 할 만한 이유는 한 가지를 빼고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모양새뿐이다. 이식 그 자체는 동물의 행태의 몸을 연결해줄 수도 있고, 남자의 몸이라 할 만한 형상을 주어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볼 수 있다시피 알리타는 이미 여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인간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조차 힘든 일인데 여성의 성은 왜 이리도 빨리 규정되어버린 것일까? 심지어 기억조차 잃은 상태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은 어디에 남아있었던 것이며 우리 역시 알리타를 왜 여성, 혹은 소녀로 규정해버리고 마는 것일까.

 

사실 알리타를 인간으로도 여성으로 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만약에 기억조차 잃은 상태에서도 여성으로의 성 정체성이 유효한 것이라면 그건 성이란 인간의 의식, 기억을 넘어 본성 속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우리 사회는 이미 트렌스 젠더를 통해 이러한 규정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인지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알리타는 휴고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여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부족이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이성과의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리타는 옳지 않은 일을 판단할 만큼 정상적인 ‘인간’ 같을 때도 있고 이도 박사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그의 딸과 닮아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인간으로, 여성(소녀)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간 것일까? 인간인지 여성인지 모르지만 ‘영웅’은 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로 선회한 것이라면 일견 이해하기는 쉬워진다.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알리타>는 ‘영웅의 이야기’여야 하는지 모른다. 인간으로,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을 우리의 관습적 판단에 맡기던가 그냥 넘어가서는 영웅이 펼칠법한 액션으로 모든 상황을 마무리하는 영화라고 설명한다면 영웅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과한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또한 왜 인간인지, 왜 여성인지를 누락한 채 영웅으로만 부각시키는 것은 ‘영웅’으로서의 알리타를 철저히 외부자로 남겨 둘 수 있어 편하다. 영웅은 늘 외부자로서 해결자이면서 항상 박해를 받는 대상일 때 강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타>는 여기에서 조차 혼선을 빚는다. 영웅으로의 등장에 집중 할 즈음, 영화 <타이타닉>에서의 사랑이야기가 틈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영화 중에 하필 <타이타닉>인지는 앞에서 언급한 그 이유가 있어서다. 제임스 카메론의 그림자.

이 영화 <알리타>의 아쉬움은 연이은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누락됐기 때문이라기보다 누락을 통해 한껏 부각시킬 수 있었던 영웅의 이야기에 오히려 갑작스레 사랑이라는 느슨한 이야기가 ‘그’의 입김을 통해 남게 돼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구심. 애초에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식으로 계획되었을지 모른다는 것. 만약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이 직접 감독을 했어야 했다. 아니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에게 전적으로 일임을 하던지 했어야 했다.

‘알리타’는 충분히 사이버네틱스 테크놀로지에 의한 과학적 산물이라서 신체는 소모품에 불과하고 두뇌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면 된다는 식의 나름 논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대상이긴 하다. 하지만 그 생각에 머무는 것은 이 알리타라는 캐릭터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라고 할 수 있다. 알리타는 그런 무던한 관용으로 넘기기에는 과학의 진보와 윤리의식에 대한 섬세한 논점을 가득 담은 문제적 존재다. 사실 알리타는 포스트 휴먼 시대에 인간의 전형적인 은유로서 인간과 기계, 그리고 인종과 성차 사이에 놓인 과학적 진보가 근대 과학의 정상 범주에서 작동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감도 높게 만들어진 괴물이기도 하다. 인간과 여성, 영웅의 경계를 더욱 섬세하게 줄타기 했더라면 흥미로운 알리타의 괴물성을 더 공감하기 쉽게 만들어냈을지 모른다. 적어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인간, 여성이라는 단호한 규정적 경계들로부터 벗어나려는 피 비린내 나는 묘사를 통해 영웅의 이야기를 충분히 독창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인물이다. 나의 비판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그에게 모든 걸 일임했어야 했다는 것. 의혹뿐이긴 하지만, 하여튼 영화는 이래저래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이 영화 <알리타>가 또 한 번 보여준다. 2편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팬심의 마음으로, <알리타>를 위하는 마음으로 꼭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