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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신을 버림으로 힐링을 얻다 : 쥴리앙 슈나벨 감독 <잠수종과 나비>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신을 버림으로 힐링을 얻다 : 쥴리앙 슈나벨 감독 <잠수종과 나비>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9.02.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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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도미니끄 보비, 43세, 패션잡지 엘르의 편집장, 두 아이의 아버지, 그는 아내와 별거중이다. 어느 날 아들과 극장 구경을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려가다 원인 모를 마비 증세가 오면서 긴급 호송되었다. 병명은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이라는 전신 마비. 그는 눈꺼풀 움직임만을 제외한 그 어떤 움직임도 할 수 없는 전신 마비 증세를 앓게 된다. 그는 파리에서 이송되어 시골의 한적한 병원에 있게 된다.

그에게 지인들이 찿아오면서 그는 한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병세가 호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 그는 한편으로 무력감과 슬픔으로 세상이 살기 싫어진다. 대체 이런 불행이 왜 내게 온 것일까에서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병이 완치되어 살 희망이 있기나 한 것일까에 이르기까지 그를 괴롭히는 가장 큰 고통은 절망감이었다. 그는 죽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반드시 인간은 죽고 말 것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한다. 인간은 극한 상황속에서 전혀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화려한 패션모델들과의 사진 작업을 해왔던 보비에게 전신마비는 정반대의 지옥이었다. 조용한 직업도 아니고 거의 사교계나 화류계에 맘먹는 요란한 세계였던 모델잡지계, 그것도 프랑스의 엘르 잡지 하면 그쪽 방면에선 거의 정상을 달리던 잡지다. 그 잡지의 편집장이었으니 보비의 인생가도가 40대에 이르러 절정에 와 있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청천벼락과도 같은 전신마비라는 질병은 하나의 형별과도 같이 느껴지는 일상을 초월한 운명이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보비는 화려한 도시 파리를 떠나 그에 어울리게 전문병원이 있는 시골로 이송되어 마치 유폐된 생활을 하게 된다. 우울한 심정의 보비는 자신이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잠수부인 것처럼 환상을 보게 된다. 머리를 온통 쇠덩어리로 덮고 산소호흡기로 유지하며 우주복 입은 것 같은 둔한 움직임으로 바다속을 배회하는 모습이다. 어리둥절한 멘붕상태에 놓여있는 보비에게 취해진 의료기술은 언어치료사와 물리치료사 두 명의 예쁜 간호원들이다. 예쁜 모델들만을 봐왔던 보비의 앞에 전신마비된 상태로 단지 보기만 할 뿐인 두 명의 미녀치료사들은 또 다른 고통이 아니고 무엇이랴.

눈꺼풀을 움직여 의사소통을 하는 기술을 터득한 보비가 처음 한 말은 ‘나’라는 단어였다. 그리고 힘들게 내뱉은 두 번째 말은 ‘죽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치료사는 문득 눈물을 뚝뚝 흘리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녀는 뭔가 진정되지 못하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화가 나 방을 나간다. 잠시 후 들어온 그녀는 아까와는 다소 진정된 표정과 심정으로 사과한다.

의외의 상황을 경험한 보비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대체 그녀는 왜 내게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일까. 죽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갑자기 울음이 터지고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화를 내며 방을 뛰쳐 나갈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그녀는 보비의 삶이 너무 불쌍해서 그냥 슬프고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주변에 그렇게 희망을 잃고 죽은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 둘 다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녀의 반응은 보비를 당황하게 했고 나아가 보비를 더욱 슬프게 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 병이 심각하며 절망적인 것이 아닌가.

더욱 살아갈 기력을 잃은 보비는 대신 상상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영화는 시종 보비의 내적 독백을 관객에게 들려주는데 그는 평소 건강할 때 보다도 더 많이 말을 하는 셈이다. 상대에겐 들리지 않지만 혼자 말로 그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또한 수다스러워진 그에게 든 생각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정신의 힘은 더욱 왕성해졌다는 사실이다. 절망의 끝에서 역설적으로 그는 상상의 자유가 이렇게 강렬하게 피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절망은 어느 새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육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보비는 상상의 즐거움 속에서 들뜬 나날을 보내게 된다. 상상의 자유에 온 몸을 내 맡긴 보비에게 시간은 마음대로 조합이 가능한 것이었다. 아들과의 드라이브에서 그의 몸이 얼어붙은 순간 그의 시간도 정지되었다. 하지만 상상을 하는 순간 다시 그의 시간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상상속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마음껏 즐기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무한정 먹기도 한다. 심해속에 가라앉은 잠수부의 모습으로 보일 때면, 문득 나비가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날개짓을 하는 나비는 동서양 어디든지 날아다니고, 계곡과 산악, 바다 어디든 날아다닌다. 신체부자유의 보비는 잠수부에서 나비로의 변신을 꿈꾼다. 그건 오로지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치료사앞에서 처음 하고 싶은 문장으로 죽고 싶다, 를 내뱉었던 보비는 이제 정반대로 살고싶다, 그것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물론 여전히 그의 몸은 갇혀있는 형국이지만 마음만은 자유롭게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신체를 구속받는 운명의 순간에 사람은 더욱 더 삶에 대한 의욕을 갖는다. 죽고 싶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인간의 그 말 이면에는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꿈틀댄다.

죽고 싶다는 말을 했던 보비가 마지막 쯤에 가서 하게 된 말은 ‘감사하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그 나름 의미가 있다. 죽고 싶다에서 감사하다까지, 삶의 여행은 진행된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고, 힘들고, 죽고 싶고, 후회하고, 참회하고, 결국 감사하며 살고 싶고 그리고 죽어간다. 이런 인간의 여행은 누구든 예외가 없을 것이다. 단지 감사한 단계까지 가서 죽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그 전 단계에서 죽으면 불행한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가 중시하는 것은 이처럼 전신마비라는 시련을 겪지 않았으면 과연 감사한 마음을 갖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정상인이라면 결코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 영화의 주안점이다. 그처럼 인간은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남에게 감사하는 삶은 후회하는 삶이고 참회하는 삶이다. 남을 인정하는 삶이다. 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상생의 도리다. 정상인이 그 진리를 깨우치기란 정말 어렵다. 인간은 살면서 그걸 깨우칠 기회를 수시로 맞지만, 번번히 놓치고 만다.

깨우칠 기회를 놓치는 게 인간의 한계다.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보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를 방문한 사람 가운데 피에르 후상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거에 비행기에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해서 해 줬는데, 그 비행기가 테러범에 의해 납치됨으로써 인질로 4년을 복역하다 나온 사람이었다. 보비는 그를 보자 마자 후회를 하게 된다. 그가 세상에 나온 이후 그에게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비는 평소에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보비가 그를 잘못되게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그는 인질로 잡혀가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보비는 피에르가 복역을 한 이후 오히려 성자처럼 관대해 졌음을 알고 놀란다.

4년을 지옥같은 곳에서 보내다 온 피에르는 오히려 불구의 몸으로 있는 보비를 동정하며 위로한다. 4년 동안 있으면서 피에르는 처음엔 나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모든 운명에 대해 저주하고 분노했지만 차츰 시간이 가면서 그 모든 증오가 가라 앉으면서 성찰하게 되고 참회하게 되고 남에게 전가하던 마음을 자기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며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오히려 지난 4년간의 억류생활이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켰으므로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피에르는 역설적으로 자신과 자리를 바꿔준 보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전혀 예상 할 수 없었던 말을 들은 보비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누구든 지금 이 자리를, 현재의 불행을 원망하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자신을 인내하고 성찰하게 도와준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갖아야 할 것이다. 보비는 자신의 현재의 불행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정말 불행한 것일 뿐인가?

인간은 약한 존재다. 그래서 문학작품에는 인간이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만 진실을 깨닫게 된다는 비유가 전해져 온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자. 신탁에 의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끔찍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했던 오이디푸스는 마침내 그렇게 된다. 뒤늦게 모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짓임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진실을 보지 못하는 두 눈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러니 차라리 두 눈을 멀게 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가자는 표현인 것이다.

인간이 앞 일을 안다는 것도 무리이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서 두 눈 즉 자신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그 생각부터 버리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도 비슷한 비유가 등장한다.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 당한 리어왕은 바람이 몰아치는 광야에서 발가벗겨진 채 자신을 자책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딸들에게 버림 받은 것이지만, 딸들 입장에선 아버지의 오만과 권력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아버지는 국왕으로서 응당 딸들이 자신의 권력을 용인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지나친 오만이며 욕심이다. 인자한 아버지라면 자식들이 분가하면 그들이 잘 살기를 바라기만 해야지, 그들을 여전히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이처럼 비극이 연출된다. 현재나 과거나 사람은 같다. [리어왕]이 창작되던 몇 백년 전의 서양에서도 부모자식간에 그런 분쟁이 있었던가 보다.

아비의 욕심이 자식의 냉대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리어왕은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며 마침내 미쳐버린다. 자식에 대한 일방적인 생각, 이기적인 생각, 그 모든 게 인간의 이기심이다. 그 잘못을 뒤늦게 깨달은 리어왕에게 그 댓가는 광증이라는 심한 형벌이다. 두 편의 고전문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인간의 뒤늦은 진실 자각과 그에 따르는 과도한 형벌이다. 한 사람은 눈을 빼고 한 사람은 미쳐버린다. 이 문학적 비유를 반대로 해석하면, 인간은 장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진실을 보며, 미쳤을 때 올바로 행동한다는 역설이 담겨있다. 인간은 자신의 무능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자기가 위대하다거나 올바르다거나 잘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겸허함을 받아들일 때 사람은 비로소 참 사람이 된다.

이 영화는 전신마비로 움직이지 못하는 보비가 비로소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참자유를 느끼고, 그동안 자신의 이기심을 참회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현재에 놓인 불행을 불행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자각하게 하는 기회라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영화. 이 영화의 힐링은 그곳에 있다.

 

 

글·정재형
동국대 연극영화과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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