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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혁명
먼 곳에서의 혁명
  • 안영춘/편집장
  • 승인 2010.11.0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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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르 디플로’ 읽기]

서울 거리는 깨끗하게 치워졌고, 파리 거리는 어질러졌다. 서울 거리는 곧 훨씬 한적해질 것이고, 파리 거리는 이미 시위대로 가득 메워졌다.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드높일 거라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고, 경호특별법이 발동돼 부분적으로 이동의 자유까지 제한된다. 프랑스에서는 연금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며, 노동자 정년을 연장하고 연급 수급 시점을 늦추는 법안이 개혁의 이름으로 상·하원에서 강행 처리됐다. 겉보기에 두 나라 수도의 풍경은 대조적이다. 취향 때문이든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어떤 이들에게 서울은 정상이고 파리는 비정상이다.

그러나 두 도시의 풍경은 데칼코마니 그림처럼 요소와 구성, 구도가 정확히 일치한다. G20 정상회의는 지구촌 신자유주의 훈련 교관인 국제통화기금(IMF)에 7500억 달러의 돈과 함께 개별 국가의 경제정책을 감독·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IMF의 관심사는 오로지 각 나라 공공부문의 긴축이다. IMF는 7500억 달러의 종잣돈으로 당근을 내밀고 구조조정의 채찍을 휘두를 것이다(28면). 이를테면 연금 삭감 같은 것 말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로는 같다. 현재 위치만 다를 뿐이다. 한국 사회는 깎고 말고 할 보편적 사회복지가 없다. 대신 실질임금이 내려가고 있다. 두 나라 청년들은 모두 그 경사를 타고 가파르게 미끄러지고 있다.

유럽 엘리트 좌파 다수는 현재의 위기를 ‘정치적 실패’에 따른 위기라고 본다.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그것을 “주술일 뿐”이라고 일갈한다(1, 11면). “혁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먼 곳에서의 혁명이어야 한다.” 위기의 본질은 ‘체제의 실패’라는 얘기다. 한국의 여성학자 제갈현숙도 위기의 원인을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재생산의 문제를 구조화하기보다는 복지국가의 비용, 경제성장과 실업 문제만을 앞세워 사회적 급여와 사회 서비스를 노동과 시민 개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온” 데서 찾는다(29면). 그래서 “복지가 수용되는 전제로서 모두의 노동력이 차별 없이 교환되는 조건을 구조화해야 한다”.

오늘날 특권층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최근 원조 교제 추문은 차라리 그의 ‘불가능의 불가능성’을 입증한다. 그들의 전지전능은 약자에겐 모든 불가능성을 뜻한다. 그러나 지젝은 “불가능이 도래한다”는 라캉의 명제를 들어, 좌파에게 ‘즉각 행동’을 촉구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즉시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무기력이 곧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인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르주 알리미도 “희망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시위와 파업 말고 다른 길이 있는가?”라고 되묻는다(2면).

2005년 사내 하청 비정규직 해고 문제로 시작된 기륭전자 사태가 최근 타결됐다. 전면 파업 1895일 만이었다. 사태는 그 어떤 돌파구도 없어 보이던 순간 갑자기 마무리됐다. ‘도래’한 것이다. 40년 전 전태일의 분신이 나라를 들끓게 했고, 역사의 궤도를 움직였듯이(30~31면). 1895일과 분신! 쉽게 말해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미 ‘전태일’을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바꿔놓았다. 대학생 친구 한 명이 간절했던 40년 전의 전태일은 지금 대부분 대학생이 됐다. 전태일은 도처에 보편적 존재로 ‘진화’했지만, 자본가와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진화론의 핵심 이론은 자연선택(도태)이다.

글•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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