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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 쓸어낼 수 없는 삶의 얼룩
[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 쓸어낼 수 없는 삶의 얼룩
  • 조한기(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05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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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다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름답던 순간이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때론 너무나 순결하기에 애써 등져야 할 사연도 있다. 그러한 순간과 결별하려는 일은 각고의 인내와 피할 수 없는 상처를 요구한다. 역설적으로 결별의 각오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온전히 과거에 묶어두려는 욕구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그렇게 밀려나고 억압된 것들에 대한 사유를 담는다. 일종의 방어기제로도 보이는 그 비관적인 부정의 과정은 잠재적이기에 지속적이다. 격리된 ‘무언가’가 귀환하려 할 때 생겨나는 애증의 반작용은 걷잡을 수 없는 치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젊은 세 남녀의 유희에서부터 시작한다. 세 사람의 관계에는 묘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교차하는 질투와 사랑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애정이 뒤섞여 있다. 이들의 관계는 곧 세파에 부딪혀 난파된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는 마리아를 사이에 두고 다툰 끝에 50여 년간 원수처럼 지내게 된다. 두 사람의 싸움은 단순히 개인의 애정 문제에만 결부되지 않는다. 언어와 문화, 종교와 도덕, 문명과 야생 등 그 심층적인 배경에는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들 간의 팽팽한 길항관계가 내재되어 있다.

세 남녀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이사우로는 토착어인 시크릴어를 사용하며, 마리아는 식민지 언어인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에바리스토는 시크릴어와 스페인어를 모두 구사하며 틈새에 선 모습을 보인다. 지독한 갈등 끝에 에바리스토와 마리아는 결혼하고, 이사우로는 마을에서 쫓겨나 은둔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사우로의 운명은 피식민지 원주민의 운명을 예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크릴과 이사우로의 영락은 거대한 시대 변화 속에 잊혀가는 야생의 세계를 은유한다. 실전 위기에 놓인 시크릴어를 연구하는 마르틴의 등장은 그렇게 기층으로 침전되던 세계에 다가서는 계기가 된다. 마르틴은 시크릴어를 기록하기 위해 시크릴어의 마지막 전승자인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를 화해시키고자 한다.

 

시크릴어는 그들의 신화와 같이 만물과 조응하는 마술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시크릴의 신화적 세계에선 ‘인간도 새도 경계 구분 없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반면 식민지 스페인의 계몽주의 정신은 자연과 인간의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기초한다. 마리아의 눈에 이사우로가 순진무구한 동물처럼 보인 까닭은 그러한 논리에서 근거한다. 이처럼 서사무대 속 비극의 시작은 이질적인 두 세계의 마찰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와중에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 섰던 에바리스토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이한 콤플렉스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공적·사적 영역의 경계인으로서 에바리스토가 겪는 고뇌는, 지라르가 말한 욕망의 삼각형에 포박된 자의 탈주 불가능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양한 가치관의 충돌이 빚어낸 깊은 고뇌는 에바리스토가 떠나온 세계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원인이 된다.

 

마르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바리스토는 끈질기게 화해를 거부한다. 잠시 간의 화해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에바리스토는 이내 50년 전 그날처럼 이사우로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만다. 그렇다면, 폭력의 주체처럼 보이는 에바리스토의 삶은 어떠한가? 에바리스토는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숲에서도 자신의 의자를 짊어진 채 다닌다. 에바리스토의 괴팍한 행동은 그가 어느 한 세계에 온전히 기대지 못한 채 경계를 떠돌고 있음을 은유한다. 그런 면에서 에바리스토의 의자는 스스로를 강제한 억압의 표지이기도 하다. 에바리스토는 억압을 짊어지고, 억압에 의지해 자신을 지탱한다. 그가 스스로를 겁박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불결하다는 자각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과거 선교사의 가르침 속에서, 즉 자연(시크릴)과 문명(스페인)이라는 두 세계의 부딪힘 속에서 내면화되었다. 타인을 향한 에바리스토의 거부는 격렬한 갈구를 감추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 동시에 그가 시크릴을 포기한 대신 얻은 새로운 세계를 지키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에바리스토는 완고한 만큼 정직하다. 그러나 그가 애써 결별한 욕망은 부정과 폭력의 근원이 되었다.

 

한편으로 피해자인 이사우로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는 사랑에 실패한 후 작은 오두막집에서 문명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이사우로의 병들고 지친 육신은 팍팍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평생 온갖 수모를 겪은 이사우로의 삶은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크릴 전수자에게 죽음은 세속과의 단절일 뿐, 영적인 세계에서의 삶은 계속된다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무대에 재구되는 역동적인 문화적 조류(시크릴-스페인-미국)와 무관하게 이들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불멸하다. 죽음은 허무가 아니며, 새로운 삶을 위한 예비적 단계이다. 시크릴의 전승자들은 숲의 깊은 곳에서 먼저 이승을 떠나간 친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이사우로의 고립된 삶이 구원받는 것은 그러한 시크릴의 운명론이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의 순간을 통해 비약적으로 드러날 때이다.

사실 영화의 숨겨진 비밀은 더욱 첨예한 도덕적·윤리적 딜레마를 발생시킨다. 개인의 고뇌는 세계의 경계와 질서 사이에 압착되어 나타난다. 그리운 세계는 결별하여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어떠한 선택도 원죄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바리스토가 의자를 버리는 것은 그러한 딜레마를 넘어 본연의 욕망에 진실해졌을 때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에바리스토는 시크릴의 비밀스러운 동굴에서 50여 년간 억눌러 온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 순간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혀왔던 자기 규제의 욕망은 더 이상 음침한 것도, 비윤리적인 행위도 아니게 된다. 도리어 자신과 타인을 상처 입혀온 내면의 경계를 허물고 화해를 이끈다. 그렇게 모든 외부로부터의 구속을 벗어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피안은 찾아온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조한기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수료. 2018 영평상 신인평론상과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8 만화비평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문화와 스토리텔링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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