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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가 사는 세상>의 입법체계와 순진함이란 이름의 크나큰 죄목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가 사는 세상>의 입법체계와 순진함이란 이름의 크나큰 죄목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11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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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음을 사전에 밝힙니다.

 

 

<내가 사는 세상>

 

“어찌하여 그는 외톨이가 되었을까”

잠자코 좇는다. 누군가의 옆모습을 계속해서 좇는다. 한참을 그렇게나 좇아간다. 어째서?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의 제약을 고려해본다면, 이처럼 묘한 움직임에 뒤따르는 어떤 의도나 목적성 따윌 상상해보지 않는 편이 되레 더 어색하다고 할 터이다. 환언하자면, 카메라는 부러 자원을 소비하진 않는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구태여 물리적 한계 속으로 자신을 내몰고 옭아매는 어리석은 짓을 할 이유란 없단 뜻이다. 대개의 경우, 일견 불필요한 낭비처럼 호소해오는 듯한 지각 경험의 그림자 영역엔 충분히 납득할만한 모종의 까닭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간혹 멈추어 서서 감각의 날을 예민하게 벼리고, 아울러 의식의 고삐를 느슨히 풀어 상상력을 한계까지 개방하는 일이 종종 요청되곤 한다. 텍스트의 언어를 직조하면서 우리에게 은근히 말을 걸어오고 있는 시각화된 음성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좇고, 좇으며, 계속해서 좇다>

 게다가 이 남자는 캐리어를 끌고 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려는지, 혹 더러는 정주할 보금자리 그 자체를 옮기려는 것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매일과 같은 일상성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해 나온 것 하나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왜일까, 과연 무슨 이유에설까. 끈덕지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까닭을 탐문하는 일에다 더해, 그이가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덧붙여지는 편이 한결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만이 무게감을 흠뻑 머금은 채 부풀어가는 동안, 어느덧 남자의 발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의 걸음은 아무것도 없는, 그리고 어느 누구 하나도 그이를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 어두운 강변 앞에서 멈춘다. 무어라는 걸까. 부단히 내달려 가까스로 가닿게 된 자리가 알고 보니 막다른 골목이다, 달리 다른 길은 없더라, 뭐 그런 뜻인 걸까.

약간은 실망스런 경험일 수 있다. 조금 범박하게 말해보자면, 소위 외톨이의 처지가 됐단 말을 굳이 이렇게 드러내야만 하나. 자꾸만 신경을 내리 긁는 그레이 톤의 색감과 더불어서, 아무래도 다소 뻔하고 촌스러운 연출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할 테다. 허나, 잠자코 돌이켜 보면, 투박한 날것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거창하고 화려하게 채색된 그릇을 예비하는 것 역시 꽤나 이상한 일일 것임은 분명하다. 정말이지 포장되지 않은 청년들의 현실 면면을 스케치하기 위해서라면, 더군다나, 개중에서도 어느 한 존재의 삶과 그 무대로서의 생활세계를 완연히 뒤덮은 음울한 자장에 집중함으로써 전체를 가리키는 방식을 택하겠노라면, 모쪼록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무람없이 감각적인 장치들을 무턱대고 동원했다간 자칫 대표성을 상실한 채 왜곡돼버릴 수도, 때론 진정성마저 망실해버릴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민규는 어쩌다 혼자된 처지로 낙오하게 된 걸까.

 

<잠시잠깐 피어오르다>
<곧이어 사그라지다>

 성급하게 편의적인 답을 내리기보단 차라리 조금 길을 에두르는 편이 좋을 성싶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면한 현실 속에서 엄습해오는 불쾌와 고통이란 게 오롯이 민규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마치 중력을 배가시키는 장치라도 일제히 장착한 듯 어깨를 강하게 짓눌러오는 힘은 청년세대 일반에게 다분히 공통된 경험이며, 그건 텍스트의 세계 속에서라고 한들 전혀 예외가 아니란 뜻이다. 더불어 이 힘은 넘치듯이 이글거리는 젊음의 기운을 망그러트리고 한줌 먼지마냥 허공으로 흩어버리기에 충분한 기세를 갖는다. 이로써 열기가 쇠해버린 청년의 뒷모습이란 건 정말이지 볼품없다. 한때 잠시나마 뜨거움이 머물렀단 사실은 그들의 수그러진 실루엣을 한층 더 볼썽사납게 만든다. 요란한 소리를 발하되 찰나의 시간 후엔 덩그러니 남겨질 불꽃놀이의 폐허처럼 말이다. 공중으로 쏘아올린 점점의 불씨들은 분명 혈기로 그린 풍경처럼 아름답지만 이내 곧장 어둠속에 삼켜지게 되고야 만다. 연이어 어느새 무대를 장악한 침묵에 의해 고요의 살점에 서린 냉기의 감각만 점점이 배가될 따름이다. 만취한 젊음들의 불장난이 그토록 서글프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내딛었다가, 다시 주저하며 한 걸음 뒤로”

만만치 않은 현실에 힘주어 맞선다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만연한 부조리함과 불공정함에 시시로 부대끼는 중 자칫하면 간신히 한 가닥 남겨 붙들고 있던 희망, 곧 내밀히 감추어둔 속불꽃마저 드러나 짓밟혀버리게 될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위압 앞에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 퇴로 없는 모험에 자신을 온전히 걸 자신이 없고, 어렵사리 지탱하고 있던 소박한 꿈마저 영원히 바라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해버리게 될까 두려우니 말이다.

이를테면 시은이 갈래갈래 찢긴 자존심을 동여매고 수치심으로 짙게 물든 가슴을 부여잡은 채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까닭이란 건 지극히 분명해 보인다. 혹여나 이러다 아티스트의 길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될까, 자못 엄습해오는 불안을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용삼이 제게 임금착취와 부당해고의 칼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 배송업계의 수렁 속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들여놓는 것 역시도 일자리를 잃다 못해 꿈마저 잃게 될까 몸서리치는 두렴을 떨쳐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통장이 비고 목구멍도 비어버리면 꿈이 망상으로 그 궤를 옮겨 가는 것 따윈 아무렴 쉬운 일이니까. 그러니 일순간 들끓는 애를 못 견뎌 분연히 일어섰다가도, 주춤거리며 다시 뒤로 물러서게 될 따름인 것이다. 세계는 이런 그들의 속아지를 훤히 꿰뚫어보며, 못이기는 척 혹은 선심이라도 쓰듯 손을 내밀어 보이곤 한다. 일련의 정황들을 고려한다면 누구도 마지못해 악수에 응하는 이들을 비난할 순 없을 터이다.

 

<애끓는 마음에 분한을 토하다>
<물러서서 다시 고개 숙이다>

 

 

“천진과 무지는 불경의 다른 번역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이렇게 답해보는 게 가능할 테다. 민규가 홀로된 건 과도한 순진함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의 ―달리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좀 어렵다― 문제적인 순진함은 가혹한 현실세계의 면면을 온전히 감식할 수 없도록 눈을 가린다. 나아가 이로 인한 무지 또는 부지 상태는 닥쳐오는 위험을 알리는 경고사인을 감지하지도, 적당한 수준과 때를 보아 물러남과 타협의 자세를 취하지도 못하도록 만든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촉발된다.

반복하자면 기성의 세계는 젊음에 똬리를 튼 혈기로부터 말미암는 저항 그 자체를 크게 문제 삼진 않는다. 머잖아 다시금 제 부속된 처지를 자처하고 순응해 올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격렬히 팔딱인다 해도 이미 잡은 물고기에 불과하기에, 그저 잠자코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릴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보아 넘길 수 있는 정도를 지나쳐버린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져버린다. 좀체 상황을 알아먹지 못하는 대상에게까지 계속해서 자비를 베풀 만큼이나 그 인내며 포용력이 넉넉지는 않은 까닭이다. 이로써 순진함의 대가치고는 꽤나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 머잖아 발생하게 될 것임은 물론이라고 할 테다.

상징체계(구조화된 현실세계의 논리질서)에 포섭되길 극구 거부하는 젊은 저항자들의 태도와 자세는 결과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외상태의 낙인을 수여받도록 만든다. 물론 예외를 둔다 해서 혹 제멋대로 굴도록 허용해준다는 말 따위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상징질서로부터의 이탈이란 정확히 일상성의 세계를 지배하는 문법 그 자체로부터의 탈주에 곧장 대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집스런 이의 눈앞에 비로소 단절과 고립으로 향하는 어둠의 문이 열리게 돼버린단 뜻이다. 꿈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전영역이 크게 뒤흔들리게 될 것은 자명하다.

 

<민규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하는 공간>
<일상으로부터의 단절과 고립>

 조금 다른 언어로 번역해보자면, 일상성 내지는 평범함의 공간이란 현실 사회의 역학 시스템을 고스란히 내면화하는 자들을 위해 구비된 영역이다. 저마다 자신에게 허용된 만큼 긴장과 피로를 풀고 또 허락된 만큼의 쉼을 누림으로써, 다시금 쳇바퀴를 돌리는 생산회로의 무대 속으로 재투입될 수 있도록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순환과 반복은 자동화를 낳는다. 마치 숙련된 운동선수의 신체 곳곳에 깃들고 각인된 신경표상들처럼, 모든 게 익숙해지다 못해 거반 자연스러운 것으로까지 변모하고 나면, 현실논리는 존재의 본질 깊은 곳까지 들러붙고 습합되어 더 이상 그 자신과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돼버리고야 만다. 그러니, 정확히 지영이 그래왔듯, 어쩌면 시은 역시도 그녀의 행보를 고스란히 좇아 따르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아마도 그렇게 될 여지가 많을 테다. 을이 병을 만들었던 것처럼, 병으로서 정을 만들게 된다고나 할까. 그렇게 청년에서 기성으로 이행해갈 터이다. 이것이 곧 주류적 세계의 운동 메커니즘이다. 적당하게 참고 견뎌낼 수만 있다면 그리 최악인 것만은 아닐는지도-.

반면 본류대로부터 이탈해 지류로 내던져진 자의 형편은 한결 더 어둡다. 민규는 일상공간으로부터 소외됨은 물론 그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연인의 품마저 잃어버린다. 눈에 보이지만, 손을 뻗는다 해도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순 없다. 존재 영역이 갈라져버렸다거나, 서로 다른 세계 속에 실존케 되었다는 표현이 옳을 터이다. 시은은 어떻게든 생을 지탱해내기 위해 본류에서 어렵사리 헤엄을 계속하고 있다. 가라앉지 않으려 전신의 근육을 극도로 긴장시킨 채 말이다. 행여나 완전히 꺼트리게 될까 작은 불땀(꿈)을 가까스로 보호하면서 노파심에 살아가는 이가, 커다란 위기를 무릅쓰면서까지 물길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민규의 손을 잡으려고 아득한 걸음을 돌이킬 리 만무하다. 그건 애틋한 감정이 식어 증발해버렸다/그렇지 않다 따위를 논하는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감정의 잔존 문제는 아니다>
<닿아도 닿지 않는 곳에 자리하다>

상황과 무관한 지순한 사랑 따윌 믿었다면, 도를 넘어선 순진함에 빠져 있었던 셈일 게다. ‘사랑마저’라는 말 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처음부터 현실이란 거대한 체스판 위 어느 한 귀퉁이에 선 자들의 관계였다. 두 사람이 뜨거운 연애감정에 붙들려 매몰된 동안에도 그들이 선 무대는 촘촘히 짜인 그물지형과 같았으며, 어느 한순간도 살점을 얽매는 거미줄로부터 자유로운 적은 없었다. 요동치는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 잠시잠간 현실로부터 눈이 가려질 수야 있었겠지만, 사랑은 결코 그 어떤 진공상태로부터 벌어지는 일 같은 게 아니다.

 

 

“침묵으로 답하기, 다수에게 말을 걸다”

즈음해서 텍스트의 첫 부분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마지막 남은 소망(사랑)마저 망실해버리게 된 이가 끝내 가닿게 된 자리가 바로 이곳 강변, 다시 말해 막다른 골목이라고 말이다. 수미상관법의 영상장치는 어두운 강변이 머금은 스산한 공기를 한층 도드라지게 만든다. 허나, 그렇담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은 과업이란 과연 무엇일까.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불이 나게 마찰시키면서 무지했던 스스로를 다시금 받아 달라 바짓가랑이라도 붙드는 편이 존재할 테고, 소외를 긍정하며 메인스트림에 저항하는 고독한 전사로 아주 거듭나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지일 터이다. 적어도 쉽게 상상해봄직한 일은 아니라지만, 더러는 전연 다른 종류의 길을 모색해보는 것 역시 어쩌면 가능한 작업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어떻게든 다시 받아들여지는 길로 들어선 뒤에 주류세계 안팎을 은밀히 넘나들면서 몰래몰래 게릴라전을 펼치는 비밀공작원이 되겠다든지 하는 경우들을 말함일 테다. 과연 그의 선택은?

정답은 밝히 제시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가능한 선택지들 그 이상의 것에 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한들 침묵하겠단 뜻이랄까. 단 한 번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없되, 그저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 존재의 정상성에 대한 심판으로(“빨갱이”) 이어질 수 있다면, 더 나아가선 심지어 일상으로부터의 고립까지도 초래할 수 있을 법한 상황이라면, 해도 해도 현실이 너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상을 참작해 달리 무어라고 따져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카메라가 고의적인 기록의 단절을 선언해버린 이상 민규의 선택은 오로지 우리의 상상과 예언 속에서만 여러 모양으로 형상화될 따름이다. 이는 동시 접속된 스크린을 통해 느끼고 사유하는 허다한 존재들을 아울러 공명하는 자리로 견인해 들인다. 너/나 역시도 동일하게 문제적인 현실 속에 발 딛고 있다는 사실을 촉지적으로 일깨워 준다고 말한다면야 꽤나 적절한 해설일 터이다. 더 쉽게 말해 영화의 초청 작업에 의해 우리는 민규와 더불어 스산한 강변의 무대로 옮아간다. 이를테면 거긴 적어도 같은 ―또 사전에 주어진 정답 따윌 종용하지 않는― 문제를 두고서 함께 고뇌할 수 있는 열린 연대의 자리다. 어느 쪽이 됐든, 무엇을 선택하든,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렸다. 그건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지금-여기, 영화의 말 걸기에, 과연 나는 무어라고 답할 터인가?

 

 

 

글: 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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