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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실패한 데우스엑스마키나 '캡틴마블'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실패한 데우스엑스마키나 '캡틴마블'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25 10: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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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마블>은 매번 충돌한다. 함몰되듯 하나의 중심으로 사건의 연쇄가 휩쓸려도 그녀가 던지는 질문은 오롯이 밖을 향하기 때문이고 그 힘이 물리적으로는 우주선을 관통할 때 발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늘 그렇듯 짧게 정리된다. 정의로운 여성 파일럿이 갑작스러운 사고에 휘말려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욘-로그(주드 로)가 수혈로 살려줬다곤 하나, 결국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한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영웅서사의 중심에 설 것을 안다. 이미 그녀의 활약을 예측하고 있지 않는가. 결연한 죽음이나 어처구니없는 희생을 맞이하는 인물의 구구절절한 인생이야기 따위가 소용없는 이유다. 그러니 논지를 위해서는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그녀가 획득하게 된 엄청난 파워가 연쇄적으로 야기하는 돌발적인 정의(justice), 게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한 이후에 발휘되는 뜬금없는 인류애적 태도(엄밀히 말하면 외계인에 대한 인류애(?))를 살펴보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그 시도는 이상하게도 애도(mouring)와 맞물린다. 일단 애도는 가장 중요한 뭔가를 상실했을 때 오는 반응이다. 세부적인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언급되는 ‘Thank you Stan’이라는 문구를 통해 마블이 매우 중요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애도의 차원에서 스탠의 존재가치를 캡틴 마블의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치환한 것으로 봐준다면 일견 우리는 캡틴마블의 그 정의와 인류애에 공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스탠에게 표하는 경의 때문이라는 식으로 보면 이해가는 측면이 있긴 하니까. 그러니 영화<캡틴마블>은 스탠을 향한 애도마저 하나의 능력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에둘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를 어떤 시각에서 재현하고 있는가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 속 주된 이야기로 다뤄진 사건, 즉 ‘비어스’로 불렸던 기억을 잃었을 당시의 캐롤 댄버스(브리 라슨)가 욘-로그에게 훈육되다가 그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캡틴마블을 은하계 반대편의 수호자로 보고 있는 닉 퓨리의 생각을 보더라도 그동안 억눌렸던 여성에게 자유를 안겨준, 즉 ‘해방된 여성’이라는 의미를 그녀가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캡틴 마블은 누적된 억압에 저항하는 ‘범접할 수 없는 반사회적 성향’을 모조리 흡수한 존재다. 전에 없던 엄청난 힘, 하나의 우주선을 맨몸으로 관통하여 파괴하는 힘은 오늘날 불통을 유발하는 경계와 편향된 사고들을 소위 ‘내파’하는데 사용된다.

그런 와중에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부분은 그녀의 엄청난 힘에 대한 변론 때문에 덧붙게 된 노림수로 보인다. 이 추측을 더 밀고 나가본다면 그녀의 실질적인 파워는 남성편향적인 가치관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힘에 대한 옹호, 바로 그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그런 그녀는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희생적인 캐릭터를 한 명 정도 요구하게 되는데 그 담당을 바로 욘-로그가 맡았던 것이다. 욘-로그는 ‘비어스’(기억을 잃은 후의 캐럴의 이름)에게 과거에 연연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혹여 자각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를 다스리라며 기억의 억제를 독려한다.

이는 하나의 시리즈를 일단락 지을 때면 늘 오기마련인 자기극복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마블이 구축한 하나의 세계관이 마무리 될 때 쯤, 그러니까 <인피니티 워>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때 즈음 그녀가 등장하게 된 이유에는 이런 류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니 이제 이 물음을 물을 때가 됐다. 왜 캡틴 마블은 여성인가? 그러니까 왜 여성의 캐릭터가 우주 비행능력을 맨몸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수 십 기의 미사일을 요격하듯 비행할 수 있는 막강한 캐릭터가 됐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캡틴 마블의 그 행동은 ‘로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캡틴 마블은 결국 ‘로난’의 표적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영화 말미에 읊조리는 로난의 한마디는 마치 당연히 캡틴마블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케빈 파이기의 복화술이다. 그의 욕망 논리는 이렇다. ‘스탠이 가고, 새로운 세계의 주체는 나다. 마블의 세계관을 스탠 말고, 나의 것으로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스탠의 죽음으로 새롭게 얻게 된 기회를 잡기위해서는 캡틴마블에서부터 전략적으로 그 변화의 시작을 암시하겠다.’ 캡틴 마블을 다시 가지려한다는 점에서 로난과 비슷한 케빈 파이기는 그래서 그녀에게 전혀 다른 매력을 불어 넣으려 한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이럴 수 있다. 캡틴마블이 풍기는 그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란한 CGI 기술인가? 아니다. 그녀는 히로인/히어로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 그래, 이 마블 세계의 모든 캐릭터는 균질적이게도 결핍의 존재였던 것에 반해 그녀는 여느 히로인/히어로들과는 달리 일말의 약점도 갖지 않은 완성형 인간이지 않은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해결되기 힘들 때 하늘에서 내려와 모든 난제를 해결 해주는 신을 나타내는 이 말처럼 막강한 힘을 무기로 가진 캡틴 마블을 안 반길 이 누구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화해하기 힘든 남녀 간 욕망구조의 불일치라는 메시지를 테서렉트를 토해낸 고양이마냥 어쩔 수 없이 다시 뱉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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