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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시네마 크리티크] 도시의 룰, 개는 되고 고양이는 되지 않는 것 - <아무도 모른다>
[정지혜의 시네마 크리티크] 도시의 룰, 개는 되고 고양이는 되지 않는 것 - <아무도 모른다>
  • 정지혜(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2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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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영화감독으로 사회 언저리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관심은 그의 영화 커리어 전반에서 반복적인 주제가 된다. 그가 관심을이 있는 이 ‘사회’의 표상으로 ‘도시 공간’은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다.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반년 가까이 스스로 살아간 네 남매의 실화를 소재로 한 극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버지가 각기 다르고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네 명의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무책임하고, 철없는 엄마의 가출로 세상과 외떨어져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책임감 있는 장남은 엄마가 보낸 약간의 돈으로 동생들을 먹이거나 돌보지만 이도 곧 떨어진다. 아이들은 수도가 중지되면 공원에서 물을 길어오고 편의점 음식을 얻거나 하면서 버틴다. 이 사이 막내가 죽고 장남은 막내의 시신을 여행 가방에 넣어 강변에 묻어준다. 영화는 세계에서 배제당한 아이들이 어른들이 배제된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신파와 죄책감 등 손쉬운 감정의 드라마를 버리는 대신 다큐멘터리 적인 시각으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이들’의 본질들,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잡아낸다. 영화는 1년 동안 계절별로 아역 배우들의 촬영과 편집을 마친 뒤 그 결과물에 기초해 이야기를 쓰고 찍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이 ‘천연’의 모습은 이야기의 구조에서 생명력 그 자체로 발현하고 이는 역으로 클라이맥스에 가서 우리를 더 슬프게 하기도 한다.

영화는 한 편으로는 다큐멘터리의 작업방식을 따르고 또 한 편으로는 모더니즘 영화의 방식으로 구성되어있어 관객을 사유에 이르게 한다. 관객이 소재의 극적 요소에 파묻히거나 끌려다니도록 하는 대신 실화와 재현 사이에서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다시 인지하게 만든다. 불행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감독은 첨언은 특히 영화의 공간에서 빛난다.

 

 

일본 도심의 이미지, 도심 내의 주택가의 풍경, 연립주택 등의 영화적 공간이 갖는 정신적 기질에 대해 관객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도쿄는 근대, 모더니즘 시대의 규격 그 자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도시에 틈을 내고 이 틈에서 아이러니를, 아이러니가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 도시의 규격에서 통제되지 않는 생명력의 세계를 연립 식 주택에 유기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대비시키고 있다. 개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주인집의 부부나 부부가 기르는 강아지는 통제되는 세계에 속해있다. 이들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존재다. 장남은 영화의 초기에서 역시 통제되는 세계에 속해있다. 엄마와 함께 복도를 걸어 들어오기도 하고 동생들을 통제해 함께 집 안팎을 데리고 나가고 들어오는 장면에서 장남은 연립주택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것 같은 단호함으로 이들을 통제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이 네 명의 아이들이 지닌 활달함은 원천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여동생이 밤중에 이사 온 집으로 몰래 들어올 때 골목의 도둑고양이가 지나간다든지 아이들이 통제의 영역에서 통제 밖으로 나갈 때 연립건물의 창을 뛰어넘는 도둑고양이는 함께 산책할 수 있는 대상도 존재가 명확히 확인되는 대상도 아니지만, 누구에게 통제되지 않는 안온한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요소는 극의 후반에 한여름의 잡초와 같은 이미지로 연결된다.

특히 베란다에서 아래로 추락하며 스티로폼 화분이 부서지는 장면의 의미작용은 통제되지 않는 세계의 완전함을 꿈꾸게 한다. 누군가 버린 것 같은 화초가 작은 스티로폼 화분에서 보다 더 근원적인 토양을 향해 부수고 나가는 것이다. 이 메타포는 막내의 죽음과도 연결된다. 공항 근처의 강가에 죽은 막내를 묻고 여명이 눈 뜨는 시간, 하늘에는 도착지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계가 본토를 떠나 하늘을 가르고 떠나간다. 막내의 장례를 하나의 희생제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탈출이나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막내의 종착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세 번째 살인>의 오프닝 공간과 맞닿아있다. 이 강변의 공간은 <어느 가족>에서도 등장한다. 회복과 재생의 공간, 통제와 규격에서 벗어난 열린 공간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이 공간은 때로는 북해도로, 때로는 바닷가 마을로 옮겨가지만 언제나 대안적인 세계로 도시와 대비된다. 감독의 영화에서 도시는 전체주의를 상기시키고 ‘일본’이 구조화되는 공간이다. 감독의 냉정한 자기 분석을 지켜보면 어느새 우리의 도시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있는 도시의 정신적 기질은 혹시 맹목적인 성장 같은 것만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무도 모른다> 2005.4.1 개봉 2017.2.8 재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 영화 - 아무도 모른다

 

글: 정지혜

영화평론가. SIDFF 프로그래머. 아티스트그룹 ‘맨션나인’이사로 아티스트와 함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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