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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 디 아일> - “타인이란 이름의 불가해한 장벽 앞에서의 절망감, 눅진한 쓰라림의 자리에서 모색해낸 미더운 우회로의 경험”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 디 아일> - “타인이란 이름의 불가해한 장벽 앞에서의 절망감, 눅진한 쓰라림의 자리에서 모색해낸 미더운 우회로의 경험”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1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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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와 이야기, 그리고 영화의 문제”

국내에도 익히 잘 알려진 프랑스의 어느 사상가(1925~1995)는 나름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서사와 이야기를 대별한 바 있다. 좀 거친 요약을 용납할진대, 전자는 언어로 짜인 촘촘하고 복잡한 구조물(세계)을 지시한다고 할 것이며, 후자는 주체와 대상 사이를 잇는 리듬의 총체(관계론)라고 정리해보는 게 가능할 성싶다. 아울러 만일 이런 구분을 곧이곧대로 수용한다면, 전자는 소설에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영화에 각각 들어맞는 존재형식이라는 진단을 내려 보는 것 역시도 그리 무리한 일만은 아닐 터이다.

딱히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아니다. 영화로 논의의 범위를 국한시켜놓고 살펴본다면 한층 그 결이 선명하게 드러날 듯하다. 한 번 생각해보라. 아무리 영상처리에 관한 제반기술이 탈피와 변태를 거듭하며 날로 세련화의 노정을 걷는다 한들, 더러는 영화 환경과 연접한 상황적 맥락이 어떤 식으로 변한다고 한들, 그 어느 영화든 ‘최소한’ 찍는 카메라와 찍히는 피사체 사이의 관계설정에 그 존재의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이것이 곧 영화가 필연적으로 ―광학적인― ‘이야기의 예술’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하겠다.

이야기의 본질은 관계다. 그렇담 정말 중요한 건 이 관계의 성격을 소명하는 ‘일’일 테다. 아울러 이 작업을 ‘무엇’과 ‘어떻게’를 맺는 문제로 번역해보는 게 가능할 것임을 말해두고자 한다. 서로 무관하지 않은 위의 두 축이 긴밀히 교차하는 지점(좌표)에서 비로소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관계의 성격이 여실하게 현출돼 나온단 뜻이다. 다소간의 축약을 감내하기만 한다면, 일면 아주 쉽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관계를 어떤 식으로 ―촬영을 통해― 형상화해내느냐의 문제라고나 할까? 한 발 더 나아가서, 보다 실증적인 관계론의 탐문은 영화의 구체적 장면들을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시작됨을 강조해두어야만 할 테다. 결국 관계라는 좌표축 위의 유의미한 교차점들은 낱낱의 장면들로부터 ―쇼트의 의미로서― 빚어질 것이고, 그것들을 적절히 이어낸 점선이 곧장 영화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어우러지게 할 터이니 말이다.

 

“그악한 한계, 두 곡면을 잇는 연결고리”

<인 디 아일>을 ‘영화적 이야기’의 썩 좋은 사례라 말하는 데, 특별히 주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적어도 ‘무엇과 어떻게 사이의 감각적 연결성’이라는 지점에 윗점을 찍고 살펴본다면 말이다. 우선은 순서를 반대로 뒤집어 ‘어떻게’의 국면, 그러니까 보다 형태(form)에 가까운 측면을 먼저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에 다른 무엇들보다 ‘밝히’ 감지되는 건, 꽤나 산만하다고 할 만큼의 텍스트 전개방식일 게다. 이를테면 ‘어떤 동심원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본 텍스트의 동심원으로서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노라고 말해봄이 혹 어떨까. 약간 과장을 보태어본다면, 삽화에 가깝다고 할 만한 몇 개의 ‘이질적 흐름들’이 적층돼 있는 게 곧 이 영화 텍스트의 구성이라고 말해보는 것 또한 가능할 터이다. 기중에서도 대표적으로 꼽을만한 것들이 ‘크리스티안-브루노’ 또 ‘크리스티안-마리온’ 사이를 각각 흐르는 두 지류라고 하겠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하다 말할 순 없다. 각각이 소화(小話)에 해당하는 이야기의 지층들은 놀랍게도 하나 같이 메우기 어려운 결여, 내지는 공백의 감각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형태적인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서까지 함께 공명하며 어우러지는 이 묘한 분위기를 보건대, 분명 개개의 상실이 이야기의 남은 한 요소인 ‘무엇’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임은 아무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담 즈음해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텍스트를 무람없이 가로지르는 문제적인 요소란 과연 무엇일까. 내지는, 과연 무엇이 영화의 문제로서 텍스트 속에 긴요히 현상되고 있는가?

먼저 간단히 일러둘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이른바 인간본연의 ‘존재-인식론적 한계설정’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단 점이다. 과히 추상적일까? 물론, 자세히 풀어써볼 수도 있다. 아마도 그건, 설령 그이(탐구자)가 혹 어디의 누구라고 한들, ―심지어는 그 접근대상이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어떤 한 인간존재를 온전하게 이해할만한 확실한 도리나 방편 따윌 능히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말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게다. 환언자하면, 이는 낱낱의 인간 개별자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가닿을 수 있는 길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단 뜻도 된다. 크리스티안과 그의 직상상사 브루노 사이를 흐르는 지류부터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서로 교차하는 두 갈래의 지류들”

텍스트 속에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변화가 물리적 거리조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 최초의 시점에서, 두 사람 사이엔 좀처럼 메우기 어려운 간극이 매설돼 있음이 현상된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각자 정면을 향해 시선을 드리운 어색한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아울러 이들의 눈앞을 가로막은 창살이 안겨다주는 단절과 고립의 감각이 그것과 더불어 역사하며 거리감의 현격함을 한층 배가시킨다. 허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두터운 격벽은 점차로 허물어지고, 간극은 점점이 좁혀지는 ‘것만’ 같다. 거리의 감쇄를 지시하는 시각적 배열의 언표들이 이를 적절하게 형상화해낸다. 마치 이방인과 같이 서로 ‘평행하던’ 둘은 어느새 ‘곁에 서서’ 이끄는 선생과 훈련생의 모습을 경유하게 되고, 마침내 가까스로 풋내를 벗어난 이가 모는 지게차에 ‘바짝 달라붙어’ 함께 움직이는 스스럼없는 모습으로까지 옮아가게 된다. 눈 녹듯 모든 경계심이 사라지고, 단절된 국면이 온전히 수복된 것처럼 말이다.

<고요와 침묵, 어색함과 거리감>
<마치 한 몸과 같이 움직이는 두 사람>

   크리스티안을 제 집으로 초대해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그리고 내밀한 속사정을 공유하는 시점에서 거리감의 극복은 ‘얼핏’ 극점에 달한 듯하다. 알딸딸한 취기와 함께 모든 차이들이 아득히 지양돼버린 것만 같은 감각에 도취되어버릴는지도 ―하지만 이 순간에도 브루노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머지않아 스스로 목을 맨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좀처럼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겨운 크리스티안은 이젠 아무도 거하지 않는 그이의 집을 찾아가 남은 흔적들을 냄새맡아보지만, 어지러웠을 브루노의 속내만큼이나 뒤죽박죽인 폐허 속에서 끝내 무엇 하나 건져내지 못한다.

<모든 간극이 녹아지는 ‘것만’ 같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의 현실화>

또한 그가 마리온으로부터 경험하게 된 쓰라림 역시, 드러난 모양새는 꽤나 다를지언정, 다분히 이와 유사한 상실의 감각을 크리스티안의 흉중에 깊이 각인시킨다. 상품 진열장의 좁은 틈을 통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그녀에게서 맞닥뜨린 경외감이란, 마치 관음증의 체험과 같은 아득함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분명 가까이 있으되 손닿을 순 없는 대상을 직면하는 역설적인 거리감으로부터 오는 신비라고 일컫는 편이 조금은 더 옳을 성싶다. 물론, 시일이 흐를수록 신비로움에 흠뻑 물든 거리감각은 시나브로 좁혀져만 간다. 아니, 적어도 액면 상으론 그렇게 보였었노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진열장의 틈새로 들여다보다>
<경외감, 가까운 것으로부터의 멂의 체험>

같은 공간에 서 있되 서로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기조차 힘겨워 주변적인 오브제들에 눈길을 둘 수밖에 없었던 어색함의 시간은, 간접적인 말들로 은근히 감정을 표현하고 같이 생일 케이크를 나누던 꽤나 완화된 순간의 분기점을 지나, 끝내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가까이서 체온을 나누기에 이르기까지 옮아간다. 정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심연이 시나브로 메워져가는 것만 같았으니, 그렇기에 크리스티안은 돌연한 상황변화를 좀체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갑작스레 냉담해진 그녀와의 사이공간에서 스멀스멀 다시 자라난 단절감은 그를 극도로 불안정하고 헝클어진 모습으로 내몰고, 감각의 착란을 일으킬 만큼 만취한 그는 거울을 보자마자 즉시로 토해버린다. 연약해진 심신이 사뭇 낯설어져버린 자기감각을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오브제로 주변화돼 흩어져버리는 시선>
<서로의 체온에 체온으로 응답하다>

또 오랜 기간 일터로 돌아오지 않은 그녀의 집을 꽃을 들고서 찾아가보기도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인기척을 알아차린 그녀 앞에서 속절없이 도망쳐 나오기에 급급하다. 혹여나 인형을 붙드는 데 성공한다 해서 그녀의 감정마저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되지 않은 인형 뽑기 기계에 한량없이 많은 동전을 쏟아 붓는다. 끝없이 팽창해가는 거리감을 견뎌내지 못한 이의 강박적 발악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결국, 그는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그녀에게 ‘에스키모 인사’(키스)를 끝맺음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와 자신 사이에 교량을 놓는 작업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집을 예고 없이 찾아 나서다>
<끝끝내 ‘에스키모 인사’를 중단하다>

 

“비참의 평범함, 그 이유에 대한 탐문”

조금 외람된 말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아마도 많은 수의 관객들에게 있어 작중인물의 비참이란 건 그다지 특별한 모습들로 다가오지 않을(않았을) 터이다. 물론 그네들의 정서구조가 문제라는 말을 하고자함이 아님을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만 할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일러두는 편이 옳을 터이다. 작중인물들이 끝끝내 맞닥뜨리게 된 타자에 대한 결과론적 불가해성이나 지워낼 수 없는 단절의 흔적과 같은 건, 마치 이미 예견되기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관객들의 오감을 간질이며 스미듯이 호소해왔을 뿐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조금 더 적확한 표현을 빌린다면, 실은 카메라가 일찍부터 그 징조를 끈덕지게 속삭여준 까닭이라고 갈무리해볼 수 있으리라.

크리스티안과 부르노의 관계에서든, 그이와 마리온 사이에서든, 표피적으로 보아선 관계성의 틀이 한층 말랑해지는 것만 같은 국면들에서조차도 카메라는 일부러 과도한 몰입을 배제하고 시각적 동일시를 저해하는 이질화의 방식을 동원함으로써, 보란 듯이 개재하는 거리감의 존재를 선연히 확인시켜준다. 가령 인물들의 내면에선 연애감정이 부글대며 일어나고 있음직한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별안간 멀찍이 물러서서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다거나, 괜스레 인물들을 위에서 바짝 굽어보는/건방지게 내려다보는 식의 의식적인 차이-빚기를 감행함으로써 말이다. 특히 진열장의 틈새 공간을 통해 눈짓을 교환하는 이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격벽이 얼마나 어마무지한 것인지를 밝히 드러내는 쇼트는 개중에서도 압권이라고 하겠다. 존재와 존재의 연합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해주는, 그럼에도 따로 번역을 요청하지 않아도 될 만큼이나 직언에 가까운 시각적 표상인 셈이다.

<둘 사이에 개재한 거리감의 실체>
<이글거리는 격동의 때, 굳이 한 걸음 물러서다>

 

“좀처럼 그러모을 수 없는 분열된 자기존재”

뿐만 아니다. 존재자들 사이에 개재하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간극에 대한 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실은 크리스티안이 스스로와 맺는 자기관계로부터 부단히 확인되어온 바임을 지나치고 넘어갈 수 없단 뜻이다. 텍스트는 이 점을 끊임없이 되뇐다. 가령, 시공간의 틈새를 횡단하는 여행이 불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자의식의 발화를 내레이션을 통해 개입시킴으로써 좀처럼 가지런히 그러모아지지 않는 정신의 파편화 경향을 드러낸다거나, 더러는 인물의 –특히 얼굴의- 클로즈업을 고의적으로 지양해버린다든지, 혹은 충분한 존재감을 드러냄이 마땅한 장면을 일부러 원경으로 포착하거나 굳이 포커스 아웃으로 처리하는 방법 따윌 취함으로써, 한 인간 존재의 내재적인 궁핍성을 선연하게 가시화해내고 있다.

<꼭 같은 위치에, 꼭 같은 형태의 의자>
<쉽게 메워지지 않을 공백의 자기인식>

만일 개별 존재 스스로가 결여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판단이야말로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신념이 될 게다. 나의 사정이 복잡하듯, 그/녀의 내밀 공간 역시도 충분히 복잡할 것이기에, 나아가 불협화음과 불협화음의 부딪음이란 건 결국엔 좀처럼 수복하기 어려운 이지러짐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치닫고야 말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마리온의 집에서 자신의 것과 꼭 같은 책상을 발견한 것, 그리고 그 위에서 쉬이 맞추어지지 않을 허다한 퍼즐조각들을 마주한 것은 ‘진실의 자각에 대한 시각적 역어’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마침내 에스키모의 인사를 마무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크리스티안의 결정은 ―쓰라린 비참의 감각을 논외로 한다면― 한편으론 미더운 것이 된다.

 

“고독의 늪지로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상상해내다”

아직도 유념해야 할 점이 한 가지 남아 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단 사실이, 타자와의 거리를 원하는 것만큼 좁힐 순 없다는 결론이, 존재를 그저 무한한 고독의 늪지 속에 ‘곧장’ 침전하도록 ‘만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물론 타자의 불가해성은 공리(公理)에 가까운 원리적 선언에 해당하고, 따라서 사실상 허물기 어려운 견고한 논리의 진에 의하여 보호 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방향의 실패가 다른 모든 방향의 실패를 규정한단 결론은 꽤나 섣부른 것이다. 직류연결을 통한 전원공급이 어려워질 경우 병렬접속 따위의 다른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절망이 또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할 계기가 돼줄 순 없는 걸까? 영화는 분명 그 지점에 가닿기까지 절절히 몸부림치고 있는 것 아닐까?

<쉽게는 드러나지 않을 우울의 무게감><br>
<쉽게는 드러나지 않을 우울의 무게감>
<그저 그런 관계로, 밀실에 가닿을 순 없다>

  텍스트 면면을 흐르는 지배적 분위기는, 필시 명백한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건 힘겨우리란 사실을 끈덕지게 환기한다. 같은 계층에 속한 심지어는 오래도록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호흡을 맞춰온 이들 사이에서도, 끝내 누군가를 죽음으로 휘몰아갈 우울의 그림자를 읽어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저 매일 한 줄로 일매지게 열을 맞추어 계단을 내려가며 ‘오늘도 수고하였노라’ 서로 악수 따윌 건네는 수준의 익숙함, 잠시잠간 함께 웃고 떠들다 파하면 그만일 명절파티의 화려함이 제공하는 친근함 따윈, 은밀한 결락(缺落)의 비밀상자를 풀어헤칠 열쇠가 되어줄 수 없다. 외려 그 음울한 기색이란 빛이 죄다 어둠에 삼켜져버린 가운데 제 홀로 덩그러니 불이 켜진 아파트가 뱉어내는 고독함의 모습이라든지, 더러는 처량한 조명의 머리카락 끝이 가까스로 닿을락말락한 변방에서야 비로소 찢어진 자국들로 스리슬쩍 자신을 현상해낸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슬픔의 세례 현장을 경유하면서까지, 아니 그 무게감을 고스란히 체현해낼 때에야 손아귀에 거머쥐는 것이 가능해질법한 또 다른 길이 정녕히 존재하기는 한단 말인가?

<타자를 기억하기, 공간내기의 실천>
<분할된 공간의 전이와 공유>

텍스트는 명료한 어조로 읊조린다. 그 방법이란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상황과는 무관히 내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마련해두는 것이라고, 그이가 계속해서 머물 수 있도록 기거할 공간을 예비해두는 것이라고 말이다. 달리 번역하자면, 이는 타자의 흔적을 ‘간직하고-기억하고-떠올림으로써’ 홀로됨의 처지를 뛰어넘어 타인을 향해 열린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내기’의 작업은 크리스티안에겐 ‘끈 꼬기’로, 마리온에게선 ‘지게차의 파도소리 듣기’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현출된다. 이 작업이 가진 미덕이란 그저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넉넉한 돌파의 힘을 발휘한단 것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되레 그 진정한 역능이란 건, 다름 아니라 그 힘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줄’(impartation) 수 있다는 데에 놓인다고 할 테다. 왜 ‘여태까지 파도 소리를 헤아리지 못했는지’를 목 놓아 뇌까리는 크리스티안의 탄식을, 혹 무지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는 없을 테다. 어쩌면 그건 홀로 지탱해낼 수밖에 없는 개별존재로서의 고독한 삶 가운데 더는 그저 혼자만으로 살지 않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설명하기 어려운 공통감과 은은한 연합됨의 계기를 발견한 데에서부터 오는 눅진한 떨림의 감각은 아닌 걸까. 그리고 그 진동의 주파수를 곧이 우리에게 보내는 이송된 메시지로 받아들여선 또 안 되는 걸까. 정말이지 그런 해석이란 건 무책임하고 과도하기만 한 것일까?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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