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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 나는 왕이로소이다
<국가부도의 날>- 나는 왕이로소이다
  • 장혜민
  • 승인 2019.04.10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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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은 진행형의 과거다

결말이 정해진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의의가 있을까? 거기다 그것이 뼈아픈 국치를 다룬 영화라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대한민국 외환위기라는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며 그 결말은 모두 알고 있다. 국가 부도에 놓인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로 달려가 구제 금융을 받고, 그 대가로 경제 주권을 뺏겨 IMF가 요구하는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인다. 금리는 30%까지 인상돼 가뜩이나 빚이 많은 기업은 줄도산했고, 자본시장 개방은 외국인 투자를 7%에서 50%까지 상향시켜 한국 자본은 잠식당했고, 노동시장 유연화는 대량해고와 비정규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현실과 영화의 결말이다. 문제는 이 결말이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으며 오히려 더 심해졌단 것이다. 높은 실업률, 비정규직과 같은 고용불안, 극심한 빈부격차, 죽음의 양극화,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까지, 나라와 기업은 점점 부자가 되지만 국민은 더욱 가난해졌다. 1997년은 단순 과거가 아니라 진행형의 과거다. 이것이 우리가 IMF와의 싸움을 복기하여 패착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영화는 전투의 패인을 주인공 ‘한시현’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데, IMF와의 전투 20년 후 가장 최전선에서 싸웠던 한시현은 IMF를 회고하며 “위기는 반복된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고할 것.”이라는 계몽적 메시지를 던진다. 즉 그녀는 패인을 의심하지 아니함, 믿음이라 얘기한다. 한시현의 믿음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의심하라는 걸까? 1997년 외환위기라는 전투를 다시 복기해보자. 한시현의 말처럼 두 번 지긴 싫으니 말이다.

 

충신과 간신 그리고 왕의 대리인

외환위기를 국가의 전시상황으로 본다면 전투의 시작은 1997년 국가 부도에 놓인 정부가 부랴부랴 비공개 대책 부대를 만들면서부터다. 부대는 크게 충신, 간신, 왕의 대리인이라는 세 개의 상징적인 세력으로 구성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립한다고 믿으며 외환위기를 막으려는 한국은행 통화정책 팀장 한시현은 ‘충신’이다. 외환위기를 빌미로 친기업적인 노동 개혁을 시도하려 외세에 붙어먹는 재정국 차관은 ‘간신’이다. 위기관리라는 자신의 소관을 등지고 정치적 선택을 부하들에게만 떠넘기는 청와대 경제수석은 ‘왕의 대리인이’다. 모든 전쟁 서사에서 그렇듯 충신과 간신은 갈등한다. 이 둘은 서로 수호하는 대상부터 다르다. 충신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은 곧 국민을 위함이지만 간신에게 충성이란 기득권을 위함이다. 둘의 갈등이 가장 가시화되는 건 빚을 ‘어떻게’ 갚을 건지를 결정하는 회의장면에서다. 외환위기를 노동개혁의 기회로 삼으려는 간신 재정국 차관은 IMF로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만, IMF에서 돈을 빌리면 경제 주권을 뺏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보게 될 걸 아는 충신 한시현은 IMF로 가는 것만큼은 막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간신 재정국 차관이 비밀리에 입국시킨 IMF 총재 ‘캉드쉬’와의 협상 날, 총재는 본격적인 협상 전에 선결 조건을 제시하며 한국에 있는 부실 종합금융사 11개를 부도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 충신 한시현은 외세로 상징되는 IMF 총재에게 종금사의 파산은 그곳에서 돈을 빌린 기업과 서민들을 국가가 도산시키는 꼴이라며 강력히 반대한다. 반면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사익에만 눈이 먼 간신 재정국 차관은 어차피 처리해야 할 일이라며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왕의 대리인을 설득한다. 죄 없는 백성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볼 거란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왕의 대리인은 그저 소심한 말투로 협상안을 들어보고 결정할 순 없냐며 자비를 빌지만, 선결 조건에 대한 동의 없인 어떤 협상도 없다는 IMF 총재의 완강한 태도에 곧장 꼬리를 내리고 선결 조건을 받아들인다.

이후 IMF가 요구한 구제금융 조건은 돈을 갚는 것과 무관하게 나라의 경제 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이는 엄연히 주권침해이며 국가와 국민이 응당 분노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국민들은 위기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고 관료중 충신 한시현만이 유일하게 IMF와 맞서 싸운다. 결국 캉드쉬는 한시현을 협상팀에서 제외하고, 그녀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모라토리엄’, 즉 지불유예를 선언하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결국 대통령도, 대통령이 될 후보들도 모두 IMF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서명을 하고 전투는 어떤 저항도, 반전도 없이 패배로 끝난다.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IMF의 법정 관리에 들어간다. 국가는 제대로 된 협상도 하지 못하고 백성을 외세에 팔아넘긴다. 1997년 전투 당시 충신 한시현의 믿음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수 없었다. 한시현의 믿음이 배신당한 이유, 왜 국가는 무기력하게 IMF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인터레그넘(interregnum), 왕의 부재

<국가부도의 날>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다루지만 영화 가장 처음에 나오는 장소는 미국 월스트리트 소재 투자금융회사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직원은 투자자들에게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다음 장면, 한시현은 긴급회의에서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원인을 짧고 간략하게 설명한다. “11월 3일 이후 해외투자자들은 일제히 만기연장을 거부하고 12월 안에 자신들의 투자금을 갚으라고 요구 중이며,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90억 달러 이내로 계산되고 그 말은 곧 대한민국의 수출과 수입을 정부가 보증하지 못하는 상태, 국가 부도다.”

자원 불모지인 한국의 고속성장이 가능했던 건 외국자본 도입과 화폐가치 평가 절하를 통한 수출증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경제 호황만 믿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무턱대고 돈을 꿔다 썼는데 한국의 경제지표가 불안하다고 판단한 외국 투자자들이 일제히 만기연장을 거부한 것이다. 한시현의 말처럼 “돈 갚는 날 미뤄줄 줄 알고 펑펑 쓰다 이 꼴 난 거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금융 자본이 실타래처럼 전 지구적으로 연결돼 국경 없이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당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오기 전 경제위기는 이미 동아시아 전체를 강타했었다. 태국을 시작으로 한 신흥국의 경제위기는 분명 직간접적으로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서 종금사가 파산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당시 종금사들은 다른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저금리인 단기외채를 빌려다가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 고금리로 장기대출을 해주는 돈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달러가 부족해 단기외채를 갚을 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충신 한시현이 최후의 보루로 주장했던 일방적인 채무연장, 모라토리엄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외국자본과 관련 있다. 모라토리엄 신청한다는 건 돈을 갚겠다는 것과 별개로 파산위험을 암시하는 것이며 당연히 국제신용도와 채권 가치는 추락하고 환율은 급등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외국인 투자 유치를 어렵게 만든다. 가뜩이나 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마저 어려워지면 불난 집에 불을 붓는 것이 된다. 한국은 IMF를 선택했다기보단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게 맞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한국이 겪었던 외환위기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였고 그 해결 또한 국가 차원의 노력만으론 불가능했다. IMF라는 국제기구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간신의 계략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한국에 이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국가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시대를 ‘인터레그넘(interregnum)’이라고 부르며 과거엔 정치와 권력이 하나였지만 이젠 권력이 정치와 분리돼 세계화됐다고 말한다. 인터레그넘은 로마법에서 통치하던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상태, 즉 최고권력의 공백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부도의 날>에서도 왕은 부재한다. 외환위기라는 초비상사태를 다루면서 정작 국가의 원수는 딱 한 번 등장하며 그마저도 뒷모습이나 초점이 나간 얼굴로 연출되어 존재감을 지워져 있다. 왕이 부재한 시대에 신하들은 명령해줄 통치자를 잃는다. 왕의 대리인 경제수석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에겐 애초에 명령해줄 왕과 대리할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시현이 1997년 전투에서 목격한 진실은 국민을 배신하는 왕이 아니라 텅 빈 왕좌, 왕의 부재였다. 그러므로 왕이 없는 나라에 사는 한시현이 말하는 의심의 대상은 ‘무기력한 왕’이 아니라 ‘왕의 부재’ 그 자체다. 이 나라에 더는 외세로부터 국민을 지켜줄 왕이 없으니 국가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사고하여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다.

 

계몽된 냉소주의자

그러나 충신 한시현이 두 번 지기 싫다며 던지는 의심 하라는 충고는 사실 이미 실패한 계몽의 메시지 아닌가? 의심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가장 만연해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20년이란 세월 동안 우린 모두 의심하는 인간이 됐다. 국민은 대기업을 불신하고, 의회를 불신하고, 법을 불신하며 마침내 정부, 국가를 불신한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기사, 소문에 대해 유행처럼 번진 ‘팩트체크’는 의심이 개인적 현상이 아닌 사회 병리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우린 전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자주 의심하지만, 세상은 그대로다. 왜 한시현의 메시지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한시현의 패배와 대조되는 전직 종합금융사 금융맨 ‘윤종학’의 성공을 보면 알 수 있다.

왕이 부재한 국가에서 백성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백성 스스로가 왕이 되어 나라를 지키거나 나라를 포기하고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방관자란 계몽되지 못한,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아니라 너무나 계몽된, 의심하는 인간이란 점이다. ‘윤정학’은 위기는 없다는 정부의 말을 불신하고 국가 부도에 베팅한다. 그가 국가부도를 예감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를 그만두고 투자자들을 모아 환차익을 노리고 달러를 사재기한 것이다. 그의 의심이 확신이 되고 외환위기가 기정사실로 되자 그는 떼돈을 벌고 다시 그 돈으로 집값이 폭락한 부동산을 사재기하는 갭투자를 한다.

충신 한시현에게 외환위기가 막아야 할 재난이라면 윤정학에겐 돈을 벌 기회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재정국 차관과 다른 점은 간신이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으며 행동하는 반면, 방관자는 옳지 않단 걸 알면서 행동하는 계몽된 냉소주의자란 점이다. 윤정학이 간신이 아니라 방관자인 것은 비록 그가 국가 위기에 돈을 걸긴 했어도 처음부터 자신의 행위에 거리낌 없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외환위기로 파산한 종금사를 찾아간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종금사는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려 먹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지옥도가 따로 없다. 윤정학은 그들이 돈을 잃음으로써 자신이 돈을 벌었단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돈을 벌었다고 좋아하는 투자자의 뺨을 때리며 자기 앞에서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다소 감성적인 대사까지 날린다. 분명 그는 자신이 버는 돈이 위기는 없다는 정부의 말을 순진하게 믿은 국민들의 피 같은 돈이란 걸 알고 거기에 죄책감을 느낀다. 다만 죄책감을 ‘느낄'뿐이지 거기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외환위기 20년 후 한시현은 금융감시를 하는 시민단체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지만, 윤정학은 금융투자회사를 세워 돈 따먹기를 한다. 그는 끝까지 왕이 아니라 방관자가 되길 택한다. 불안과 불신의 시대에 그 누구도 왕이 되려고 자처하지 않는다.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왕은 부재하고 방관자는 방대하다. 국민소득은 3만 불 시대도 도래했지만 1997년의 비극은 진행형으로 남아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짓누른다. 한시현이 말하는 의심하기가 2019년을 바꾸지 못하는 건 늘어나는 방관자들 때문이다.

1923년 일제 치하에서 발표된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나오는 ‘왕’은 실국하여 울고 있는 ‘눈물의 왕’이며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겨난 왕이다. 그러나 화자인 가난한 농부의 아들은 ‘왕이로소이다’라고 외치며 나라의 주인, 왕이 되길 자처하고 기꺼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목숨 바쳐 왕이 된 수많은 독립투사의 노력 끝에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 광복한다. 일제 치하에서 아무도 왕이 되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스스로 왕이 된 백성들 때문이 듯, 국가가 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왕이 부재한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우리가 싸울 방법은 하나의 절대권력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삶정치를 통해서다. 결국 충신 한시현이 1997년의 전투를 회고하며 국민들에게 하는 충고 ‘의심하기’는 왕의 부재를 깨닫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왕이 돼 나라를 통치하라는 주체적 메시지인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포토

 

 

글: 장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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