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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총수'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
'제왕적 총수'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
  • 김진양 기자
  • 승인 2019.04.18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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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세대' 퇴진에 빨라지는 세대교체
3·4세 경영스타일 변화...경영능력 시험대

재계의 세대교체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그룹을 지금의 위상으로 일구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산업화 세대'들이 물러나고 3·4세 경영인들이 점차 전면에 나서고 있다. 세대 교체와 함께 경영 스타일도 변화하고 있다. 총수 한 명이 전권을 휘둘렀던 '제왕적 총수'는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사회 통념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 새롭게 등판하는 3·4세 경영인들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기업을 이끄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에게는 경영 능력을 입증해 총수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과제도 주어졌다. 

 

별세·용퇴…저무는 산업화 세대

지난 16일 재계 서열 45위의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여러분의 역량을 믿고 회장에서 물러서서 여러분의 활약상을 믿고 응원하고자 한다"며 깜짝 퇴진을 선언했다. 오랜 고심 끝에 창업 세대로 소임을 다했고 후배들이 일할 수 있도록 물러서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는 전언이다. 

같은 날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의 부실 회계 파문의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겠다고 선언한 지 약 3주만의 결단이다. 박 전 회장은 이튿날 사내게시판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결정했다"며 주력 계열사를 떠나보내는 심경을 직접 전했다. 그는 아시아나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며 임직원들에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입장을 재차 반복했다. 

지난 3월 말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이 박탈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 8일 미국땅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조 회장은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키워냈지만,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이 총수 일가의 일탈과 전횡으로 비화되며 인생 마지막에 오점을 남겼다. 

 

사진/뉴스1
지난 16일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운구차가 대한항공 본사 사옥을 지나 장지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보다 앞서 지난 3월에는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작고했고, 1월 말에는 삼성가 맏딸이자 한솔그룹을 키워낸 이인희 고문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5월에는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이 별세했다. 

이 외에도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5월 공시한 60대 대기업 집단 중 현대차(정몽구), 효성(조석래), 코오롱(이웅열), DB(김준기), 한진중공업(조남호) 등의 동일인(총수)가 퇴진했거나 사실상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성과 롯데의 경우 이미 지난해 공정위가 동일인을 각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으로 변경했다. 당시 공정위는 "종전 동일인(이건희 회장·신격호 명예회장)이 직·간접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종전 동일인 이외 인물이 해당 그룹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젊어지는 재계…탈권위·실용주의 방점
 
3·4세 젊은 경영인이 등판하는 것은 해당 그룹에도 양날의 검과 같다. 새로운 인물이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도 있지만 총수 일가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룹 수장에 오르는 것이 대중에게 거부감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재인정부 출범 후 재벌개혁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점 역시 총수 일가의 세습 경영을 쉽지 않게 하는 요인이다. 실제로 지난해 세대교체를 이뤄낸 한 그룹 고위 관계자는 "새 총수 체제가 순조롭게 자리잡을 수 있을 지 걱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다행히 대중들이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줬다"고 전했다. 

젊은 총수들도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인지하고 실용주의적 경영을 지향하고 있다. 실질적인 사업은 전문경영인의 영역으로 남겨두되, 자신은 미래 먹거리를 찾는 일에 주력하는 식이다. 총수로서의 권위를 내려놓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10대그룹 총수 중 가장 젊은 구광모 LG 회장은 지난해 6월 취임 직후 자신을 '회장'이 아닌 '대표'로 불러달라 요청했다. 취임 후 처음 단행한 연말 인사에서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을 비롯, 외부 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그룹의 순혈주의 전통도 깼다.  현장 방문은 마곡 사이언스파크와 미국 실리콘밸리 등 주로 연구개발(R&D) 근거지를 찾아 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용 부회장도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다. 그는 지난해 2월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후 중국, 유럽, 북미, 일본 등지를 돌며 해외 사업 영역의 공백을 메웠다. 지난해 7월 인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후에는 국내 경영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 들어서는 수원과 화성 사업장에도 직접 발걸음을 하며 임직원과의 소통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도 경직된 조직문화 개선에 방점을 둔 혁신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10대 그룹 중 처음으로 상하반기 공채를 없애고 수시 채용을 도입했다. 임직원 복장도 완전 자율화 했다. 임원 직급도 종전 6단계에서 4단계로 축소했고, 연말 정기 임원 인사 대신 수시 인사 체계로 전환키로 했다. 자사의 수소전기차 넥쏘를 시승하는 셀프영상을 공개하는 소탈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현대차를 전통 제조업에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업체로 전환시키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SK텔레콤과 모빌리티 및 커넥티드카 분야의 테크·서비스 스타트업을 선발·육성하는 '제로원 트루이노베이션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시행키로 했다.  

최태원 회장은 2세대 경영인으로 분류되지만 만 5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조직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대표적인 활동이 '사회적 가치' 알리기다. 최 회장은 다보스포럼을 비롯한 공식 석상에서 수 차례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최근에는 그룹 지주사인 SK㈜의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도록 한 정관을 변경해 의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한진·금호 3세 경영 행보 주목

향후 거취에 가장 높은 관심이 모아지는 사람은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과 박세창 아시아나IDT 사장이다. 두 사람은 각각 부친의 별세와 경영 퇴진으로 그룹 경영의 키를 쥐게 됐다. 하지만 이들 모두 경영 전면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힌다. 나락으로 떨어진 기업 이미지와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급선무다. 

조 사장은 당분간 대한항공 대표이사로 경영 활동을 이어갈 전망이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조 회장의 지분 승계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사모펀드 KCGI와 국민연금의 압박을 버텨야 한다. 내년 3월 예정된 한진칼 주주총회에서는 사내이사 연임이라는 큰 벽도 넘어야 한다. 

박 사장의 앞날은 더욱 험난하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으로 금호그룹은 중견기업 수준으로의 추락이 불가피해졌다. 그가 현재 몸담고 있는 아시아나IDT가 통매각 대상에 포함돼 있어 대표이사 자리도 곧 내줘야 한다. 이 경우 박 사장은 그룹 모태인 금호고속으로 적을 옮겨 그룹 재건을 책임질 것으로 보인다. 그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다 바쳐서 뛰겠다. 조부께서 창업하신 회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금호고속 등 아시아나항공 매각 후 남은 계열사들로 그룹 기반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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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양 기자 jy.kim0202@ilemonde.com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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