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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알레고리
전쟁의 알레고리
  • 안영춘/편집장
  • 승인 2010.12.03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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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르 디플로’ 읽기]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 수십 발은 한반도가 전쟁을 잠시, 그러니까 60년 가까이 쉬고 있는 상태(휴전)임을 새삼 환기한다. 또 실제 전쟁이 나면 어떤 스펙터클과 내러티브가 우리 앞에 펼쳐질지 매우 실감나게, 그러나 포탄 조각처럼 파편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바닷가에서 굴을 따다가, 혹은 거실에서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다가 전쟁을 맞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한국군 수뇌부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전쟁의 비등점을 실제보다 꽤 높게 보고 있었던 것같다.) 이처럼 포탄의 메시지는 극히 사실적인데, 정작 한국의 호전주의자들은 몽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말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등 뒤에서 혼자 몸이 달아 동전을 더 넣으라고 다그치는 전자오락실 구경꾼처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라고도 했다. 그의 개념은 전쟁을 눈앞의 전투행위로만 보는 근시안에게 맥락적 시선을 제공한다. 전쟁은 비전투 상태로 확장되고, 일상으로 연장된다. 또한 그의 정의를 의지적으로 해석하면 전쟁은 선택 행위이며, 따라서 얼마든지 평화로 대체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인간 사회가 전쟁터이고 우리 삶 자체가 전쟁이라는 언설도 은유만은 아니며, 우리 삶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도 의지의 문제라는 진보적 낙관주의도 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 평화는 자유와 평등이 구현된 상태라는 점에서 억압에 의한 고요와는 정대칭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2월호는 전쟁에 관한 알레고리의 계열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덕담을 나눈 지구촌 정·재계 최고 실력자들은 자리를 파하기 무섭게 ‘화폐전쟁’에 돌입했다(1, 10~11면). <르 디플로>는 강대국들끼리 치고받는 이 전쟁의 최후 승자는 국제 투기자본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연금 개혁을 둘러싸고 프랑스 정부와 노동자·청년들이 벌인 전쟁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내전이다. 사회연대에 뿌리를 둔 공공재 성격의 연기금은 자본화되고, 이제 늙은 노동자들은 제가끔 더 가난해질 ‘자유’를 부여받게 됐다(12면). 프랑스 정부의 이런 선택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고, 금융자본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다. ‘지주-마름-소작’의 위계가 이 전쟁 역학관계의 본질이다.

이 관계는 한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한국판은 불안정 노동의 구조를 들여다봤다(24~28면). 지금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사쪽과 사내 하도급 노동자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대법원 판결 정도는 거뜬히 뛰어넘는 한국의 거대자본은 법원 판결대로 해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성긴 법망의 틈새를 아득하게 벌려놓고 있다. 양쪽 사이에는 하도급 업체가 끼어 사태를 난마처럼 얽히게 한다. 지주-마름-소작의 관계다. 기륭전자 1895일은 이런 지배관계에서 법의 구속력이 오작동한 전형적 사례였다. 기륭전자는 이미 한국 사회 노동현실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한 줌 정규직 바깥에 한 아름의 비정규직이 있고, 그 바깥에 다시 거대한 ‘비공식 노동자’가 있다. ‘알바’와 ‘백수’, 그리고 영세 자영업자들이다.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비유를 자제해야 할지 모른다. 전쟁은 관찰자 처지에서 가치배제적인 표현이다. 이를테면 이라크 전쟁이라는 표현은 진실을 은폐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고 해야 진실을 담은 객관적 표현이다. 지금 울산 현대차 공장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이들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건 평화의 역설이다. 평화는 물리력 행사의 비대칭을 해소해야 하고, 무엇보다 양쪽 모두에 공정해야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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