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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지켜 본 ‘토착왜구’들의 기억법
프랑스에서 지켜 본 ‘토착왜구’들의 기억법
  • 목수정 l 재불작가
  • 승인 2019.04.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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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중, 프랑스의 항독 레지스탕스 활동에는 드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장 물랭을 대표로 하는 공화주의자 그룹,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들이 함께했다. 일제에 저항하던 조선인들 중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자 그룹, 의열단 등을 꾸려 무장투쟁을 전개한 아나키스트 그룹, 농민들이 중심이 된 의병, 박헌영, 조봉암 등 공산당 계열의 좌파 지식인 그룹 등이 총망라돼 싸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함께 해방을 맞은 좌우의 레지스탕스들은,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청산작업에도 당연히 함께 임했다.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은 프랑스가 완전히 나치로부터 해방된, 공식적인 종전기념일인 1945년 5월 8일보다 1년 앞서 진행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 6일)이 성공한 후, 마침내 파리가 탈환(1944년 8월 25일)되면서, 샤를 드골은 프랑스 임시정부(1944~1946년)의 주석으로 취임하며, 민족반역자들과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청산작업을 천명한다.   

공식적인 재판을 통한 청산의 과정은 1945년부터 시작됐지만, 각 지역별로 다른 날짜에 해방을 맞이한 프랑스 전역에선, 군사재판과 시민법정을 통해 노골적인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해 갔다. 해방을 맞이한 기쁨과, 그동안 나치에 협력하며 유대인들과 레지스탕스 학살에 가담하던 자들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분출되면서, 개인적인 보복이 이뤄지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해방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군사재판과 레지스탕스 세력이 중심이 된 인민재판의 절차를 거쳐,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처형과 수감이 결정됐다. 1944년부터 1945년, 약 1년에 걸쳐 9천 명이 이 같은 즉석재판을 통해 처형됐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독일군과 관계를 맺어온 여성들에게는 공개적으로 머리를 삭발하고, 그 모습 그대로 거리를 걷게 하는 모욕의 형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이 숫자는 대략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 내 나치 협력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이뤄졌다. 첫 번째는 나치에 협력한 비시(Vichy) 정부 내의 고위 공직자들이다. 외교관, 판검사, 민병대원들의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협력이다. 특히 유대인들을 체포하는데 프랑스 경찰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둘째는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에 동참하고, 레지스탕스와 유대인, 공산당원의 체포를 선동했던 지식인, 언론인들의 ‘이념적’ 협력이다. 그리고 기업과 은행들에 의해 이뤄진 경제적 차원의 협력이 세 번째로 중대한 나치 협력의 카테고리를 차지한다. 그 밖에 독일 비밀경찰에게 유대인을 고발했다던가 하는 식의, 비공식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뤄진 개인 차원의 나치 협력이 있다. 

비시정부에 복무한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재판은 파리 고등법원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지역별로 나치 협력자들의 행위를 처벌하는 지방 나치 협력자 재판소, 그리고 개인 차원에서 이뤄진 나치 협력 행위를 명예재판관들이 다루는 시민법정 등 세 가지 층위에서 재판이 이뤄졌다. 약 30만 건의 사건이 다뤄졌고 약 12만 7천 명이 판결을 받았으며, 약 9만 7천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판결의 내용은 시민권 발탁, 공무원직 파면, 강제 노역 및 징역에서 사형까지 다양했다. 

결국 총 1만 명에서 1만 1천 명에 이르는 나치 협력자들에게 사형이 집행됐고, 2만 2천 명에서 2만 8천 명에 이르는 부역 공무원이 파면을 당했다. 나치에 협력한 대표적인 기업 르노자동차와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데 협력한 대다수의 민간 철도회사들이 국영화되기도 했다. 

공식재판 절차가 이뤄지기 전에 9천여 명의 사람들이 사형에 처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1945년 이후 이뤄진 재판을 통한 절차는 전체의 약 1/10에 불과한 사람들이 숙청당한 셈이다. 국민들 간의 화합을 내세우며 1947년, 1951년, 1953년에 걸쳐 약 2/3에 달하는 이들에 대한 사면이 이뤄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단호하던 응징과 청산의 구호가, 화합이라는 명분에 자리를 내줬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는 초기의 단호한 응징의 시간을 거쳤기에 가질 수 있었던 관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드골은 전후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치 협력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이들을 재임용한다면 국민들의 화합을 방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민족반역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이념적인 분열을 시도하려고 할 것이므로, 이자들을 준엄하게 심판하는 것이 프랑스 사회를 단결시키는 힘의 원천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원칙에 입각해 집행된 초기의 결연한 청산 과정이 있었기에, 50년대 초 이뤄진 시민권 박탈자들에 대한 사면에 많은 이들이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발발 당시 차관급 육군 사령관이었던 드골은, 자신의 상사이던 페탱이 독일에 항복하고, 비시(Vichy)에 나치 협력 정부를 수립하자, 그에 불복하고 런던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 민족회의를 결성하며 대독항전을 계속해 갔다. 비시 정부는 1940년 드골 없이 진행한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은 라디오를 통해 나치 치하 프랑스인들의 저항을 독려하고, 자신도 군사작전을 통해 나치군대를 압박해 갔다. 훗날 저명한 작가가 된 로맹 가리 또한 당시 프랑스 공군에 복무하던 중 비행기를 런던으로 돌려,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민족회의에 합류해 항독 투쟁에 가담한 경우다. 

 

부역 언론인과 지식인, 최우선 처단

나치 협력자 청산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은 나치 독일을 찬양하고, 레지스탕스를 테러집단으로 매도했던 언론인과 지식인 반역자들이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됐던 이유는, 그들이 휘두르는 펜이 시민 다수의 사고를 오염시켜 사회의 윤리를 마비시킨다고 임시정부의 주석 드골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대표적 친일 언론으로 활약한 조선일보가 해방 후 7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온갖 사회적 악행을 자행하는 가운데 판매 부수 1위를 지키며 국민들의 사고를 오염시키는 현실에 비춰볼 때, 드골의 탁견과 단호한 실천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 언론과 언론인들에 대한 처벌은 엄격했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44년 9월 30일 언론계 숙청에 대한 훈령을 발포, 나치점령군과 비시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는 모두 발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치의 파리점령 이후(1940년 6월 25일)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 그리고 나치독일의 점령기간에 계속 발행된 신문과 잡지들을 모두 발행 금지시켰다. 언론사 538개가 재판에 회부돼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모두 폐간됐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숙청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소개한 책 『프랑스의 대숙청』(1999)에서 저자 주섭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는 2018년 1월 24일 자 기사를 통해 해방된 프랑스가 행한 “나치 협력자 1만여 명에 대한 처형이 형평성을 잃었고, 장기화되자 민심이 돌아섰다”며, 문재인 정부가 시작도 안 한 적폐청산 작업에 노골적으로 재를 뿌리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나치 협력세력 청산 작업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지금까지도 지엽적 사례를 나열하며 비판을 가하는 자들이 살아남은 나치 협력 세력인 극우진영인 것과 같은 꼴이다.  

 

좌우가 함께 행한 부역자 청산

세계사는 2차 대전의 승리를 미-소가 중심이 된 연합군이 거둔 것으로 기록하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것은 드골 장군과 레지스탕스가 거둔 승리의 결과로 각인돼 있다. 수도 파리가 레지스탕스에 의해 해방돼, 드골이 연합군의 진주에 앞서 개선문 앞을 통과한 장면은 해방된 프랑스에서 드골과 레지스탕스의 입지를 결정짓는 장면인 동시에 미국의 군정야욕을 좌절시킨 행동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해방이 이뤄지기 1년 전부터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민족 반역자 숙청을 진행한 것도, 영국 망명 시절에도 처칠과 늘 까칠한 관계를 유지하며 곁을 내주지 않은 드골의 태도도 모두 같은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다.      

드골은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주로 프랑스 국내에서 활동한 좌파 레지스탕스 인사들로 임시정부를 수립해 소위 좌우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런 결단은 해방 정국에서 철저히 외세를 배격하고, 주체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5년 10월 수립된 제헌의회 선거 결과를 보자. 해방 후 치러진 첫 선거에서 제1당은 27.1%의 의석을 얻은 공산당이었다. 드골의 지지를 등에 업은 중도 우파정당(MRP)이 25.6%로 2번째 위상을 차지했고, 국제노동자정당(SFIO)이 24.9%를 얻어 제3당의 자리를 얻었다. 또 다른 극좌 정당이 얻은 12.1%의 의석과 함께, 해방 직후 치른 첫 선거에서 좌파진영이 얻은 64.8%의 지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는 지표다. 레지스탕스 진영의 군사적인 지휘권은 드골에게 있었으나, 그 실질적인 국내적 역량은 좌파 진영에 드넓게 확산돼 있던 것이다. 그들은 고스란히 해방 후 프랑스를 건설해 가는 주축이 됐다. 여성이 참정권을 행사한 첫 투표이기도 했던 이 선거에서 5.6%의 여성의원(33명)이 당선된 것도,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조선의 항일운동이 좌우 양 진영에서 진행됐던 만큼, 우리의 해방정국에서도 당연히 좌우합작이 시도됐다.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은 바로 몽양 여운형. 여운형은 1944년 8월에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다. 여운형은 일왕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하던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다음의 5가지를 요구한다. 


1.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당장에 경성 시민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해줄 것.
3. 우리 조선이 주체적으로 치안을 맡는다.
4. 치안 유지와 건설 공사에 총독부는 방해하지 않는다.
5. 학생들과 청년들 활동을 총독부가 방해하지 않는다.


우리 또한, 해방 즉시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하면서 건준을 중심으로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을 준비를 갖췄던 셈이다. 건준은 전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전국에 100여 개의 지부가 마련됐고, 건준은 각 지역 지부인 ‘인민위원회’를 만들어가기도 했다. 여운형은 이 틀 안에서 좌우합작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 세력과 함께 왼쪽의 박헌영, 김원봉 등과 송진우 김구 등 우파 진영 사이의 중심축이 돼, 하나 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노력하던 여운형은 좌우 양쪽 진영으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협박을 받았고, 7번에 걸친 테러를 당한 끝에 1947년 7월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엔 60만 명의 인파가 몰려나와 이후, 우리가 맞이하게 된 처절한 운명을 함께 애도했다. 

여운형의 사망은 해방된 조선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실패로 결정짓고, 하나 된 조선의 미래를 포기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후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반공을 새로운 국시로 내세워 친일을 덮어버린 이승만의 선택으로 인해, 해방된 조선에서 민족반역자들은 완전히 부활했다. 이루지 못한 친일청산이 남겨놓은 암세포들은 나경원, 황교안, 조선일보 등으로 대변되는 반민족 극우 세력으로 자라나, 부끄럼을 모르고 활개 치는 우리 사회의 한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의 친나치 청산, 가혹하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군단은 러시아와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대륙을 점령했다. 따라서 친 나치 세력에 대한 청산 또한 프랑스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나치 하에 있던 나라들은, 그들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는 길을 갔다. 

전범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 지도부를 숙청하는 절차를 밟았으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전범들을 끝까지 색출해, 나이의 고하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죄를 묻는 원칙을 견지해 왔다. 2차 대전의 또 다른 전범국 일본이 자국의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놓고, 시시때때로 국가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전쟁 야욕을 드러내고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나치의 침략을 받은 유럽국가들 가운데, 프랑스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비율의 사람들이 나치 협력에 대한 법적 대가를 치른 경우에 속한다. 친나치 협력 혐의로 수감된 사람들이 프랑스에선 인구 10만 명당 94명인데 반해, 덴마크에선 374명, 네덜란드에선 419명, 벨기에에선 596명, 노르웨이에선 633명이었던 걸로 집계된다.

특히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2/3가 감형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초기에 신속하게 숙청된 나치 협력자 1만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과도한 관용이 베풀어진 셈이다. 이 모든 나라들이 이렇듯 과거의 죄를 벌했기에 더 이상 2차 세계대전을 기념하는 어떤 날이 돌아와도, 과거의 상처를 재조명하거나 사회적 울분으로 상처 주지 않는다. 독일과 프랑스는 전후의 역사를 함께 기술한 공동역사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하고, 예술과 교육에 집중된 공영방송국 ARTE를 공동운영하기도 하는 등, 화해와 협력의 시절을 함께 나아가고 있다. 이는, 오직 과거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이를 단죄한 청산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지스탕스에 대한 간소한 포상

반면, 해방을 위해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에 대한 훈장은 6만 5,295명에게 수여됐다. 이 중 2만 5,000명은 사후에 추서된 훈장이었다. 좌우 합작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좌우가 고루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입헌의회를 수립한 나라에서, 서훈을 함에 있어 이념적 대립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다른 국가유공자들처럼 훈장을 받고 국가유공자로서 취업특전과 생전에 일정한 연금을 받았을 뿐, 사후에 3대까지 생활비를 지원받거나 특혜가 이후 세대에 계승되는 방식의 포상은 없었다. 

친일을 하면 3대가 잘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필요한 포상의 방식이었을지 모르지만, 민족반역 범죄자들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 행해진 나라에서는 불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좌우합작의 임시 정부가, 제헌의회가 수립되기도 전, 일급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엄중한 재판이 진행 중이던 와중에 가장 먼저 진행한 조치중 하나가, 사회보장제도의 수립(1945년 10월 4일)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였지만, 그들은 나치의 야만에서 되찾아온 새로운 프랑스에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을 보장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마음을 함께 했던 것이다.  

각 시대가 지니는 사명이 있고, 숙제가 있다. 그것들을 당대의 사람들이 행하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줄 때, 후손들은 그들이 짓지 않은 업보로 인해 오래 고통을 겪는다. 일제를 벌벌 떨게 하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친일경찰에게 뺨을 맞고 고문을 당한 끝에, 다시 나라를 떠나야만 한다면, 이승만의 사욕이 벌인 역사적 과오를 뼈저리게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김원봉에 대한 국가 유공자 서훈 추서를 주저한다면, 더 이상 그 어떤 국민이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정의롭게 나설 수 있을까?

정의를 심는 곳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불의를 뿌린 곳에 불의가 넝쿨이 돼 세상을 욕되게 하리니.  

 

 

글·목수정
동숭아트센터 기획팀장, 국립발레단 기획팀장,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을 지냈다.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칼럼리스트, 작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성의 사랑학』,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스테판 에셀 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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