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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재로 이야기하는 법 – 영화 <김군>(2019)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재로 이야기하는 법 – 영화 <김군>(2019)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9.05.2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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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기부 건물들이 둘러싼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연극 <푸르른 날에>를 본다는 것, 그 경험은 적어도 무대 위 과거와 현재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과 순간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 없게 만든다. 드라마센터가 과거에 어떤 장면들을 마주했을지 그리고 공포에 떨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는 그곳에서 김남주의 「학살2」를 외치며 스러져간 이들의 모습을,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 차분히 감싸 안은 커튼콜을 볼 수 있다. 이 연극을 선택하는 것 자체에 큰 불안을 느끼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무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현재가 된다. 그래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인 이 5월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가사는 바로 지금 그들을 떠올리자는 말이 될 수 있었고, 그 순간 과거의 그때와 공명할 수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현재이고 현재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맘때쯤 쏟아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해석과 행보, 여태까지 어떻게 드러나지 않았는지가 신기할 만큼 엄청난 이야기들의 폭로 등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분명한 현재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억을 가진 생존자가 있고, 생존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기억이 있고, 생존자의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은 이들이 현존하는 상황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현재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과거의 저편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아무리 충격적인 증언과 고백이 나와도 그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공론화가 되지 않는 것,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재의 일로 생각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영화 <김군>(2019)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김군>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과거로 보내는 시선이 거둬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죄책감이 거두어진 첫 영화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이를 다룬 작품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 있는데 그 시작은 1987년의 단편영화 <칸트씨의 발표회>(1987, 35min)부터이다. 이 작품은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화려한 휴가’를 외치는 입을 클로즈업 하며 시작한다.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한 남성을 쫓고 있는 이 작품은 누군가가 고문당하는 장면, 발레슈즈를 앞에 둔 젊은 여성의 영정사진을 뒤로 발레를 하고 있는 여성의 장면, 실제사항이라는 외침, 즐비한 관들이 놓인 광주, 군인들이 시내를 점령한 장면, 뼛가루를 뿌리는 장면 등 단편적인 컷들이 삽입되면서 남성의 정체를 조금씩 드러낸다.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는 남성을 지켜보는 한 군인은 그가 늘 이 시간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이곳을 찾고 있다고 익숙한 듯이야기 하지만 그의 계속되는 기행에 신원조회가 들어가고 그는 1980년 이후 행불자로 밝혀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신원을 알 수 없는 사체가 충남의 한 저수지에 떠올랐다는 뉴스 기사로 마무리 된다.

이 작품은 칸트씨라는 한 젊은 남성을 통해 1980년이 한 개인이 무엇을 감내해야했고, 그로 인해 어떻게 변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가 흘러나오는 엔딩크레디트는 이 작품이 칸트씨를 경유한 광주의 고발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1980년대에 나온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들은 5.18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확인시키고 드러내려는 노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의도가 가장 잘 포착되는 것이 바로 미군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를 등가에 놓아 피해자로서의 ‘우리’를 상정하는 것이다. 1980년대의 두 장편영화 <황무지>(1988)와 <오! 꿈의 나라>(1989)는 정확히 이 경로를 관통한다.

두 작품은 모두 기지촌에서 일을 하며 그곳의 생리를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황무지>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가 의기(조선묵)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도망친 탈영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오! 꿈의 나라>의 종수는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아는 형을 찾아 내려온다. 그가 전남대생이라는 것을 들은 이들은 광주의 상황에 대해 묻지만 자신은 직전 서울로 올라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결국 당일 시청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전사를 가진 이들이 일하고 있는 기지촌은 힘을 가진 미군들이 힘없는 한국인들을 무시하고, 칼을 던지는 놀이를 하며, 종국에는 사기를 쳐 자살하게 만드는 곳이다. 두 영화는 광주에서의 폭력과 기지촌에서의 폭력을 병치시키며 두 곳의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힘 있는 자들이 짓밟고, 그 안에서 고통 받으며 죽음에 까지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황무지>는 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광주를 떠올리던 의기가 군복을 입고 5.18의 묘역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것으로, <오! 꿈의 나라>는 성조기와 미국의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 한다.

 

지극히 80년대적인 고발의 방식은 90년대에 들어 사라지지만 80년대의 영화에서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것은 바로 죄책감이라는 심상이다. 내가 가해자라는, 나 홀로 살아남았다는,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이 모든 과오는 죄책감으로 드러났다. 이 심상들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리는 데에 깊숙이 자리했다. 이는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자 애도의 방식, 혹은 예의로 보인다. 충분히 애도되지 않았기에 그만큼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는 것, 여기에서 비롯된 죄책감은 길게 이어졌다.

90년대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첫 영화 1991년의 <부활의 노래>(1991)부터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생이 자신들과 함께하던 이를 두고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것을 경유하지 않아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고발을 대체한 것이 바로 이 죄책감이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영화 <꽃잎>(1996)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라 총에 맞아 쓰러지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도망쳤던 소녀(이정현)의 뇌리 속에 깊이 박혀 버린 장면은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으로, 그 기억을 잊기 위한 몸부림치는 것으로 밖에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 <꽃잎>의 폭력적인 충격은 깊은 상흔을 남겼고, 그만큼 이후의 영화들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그들의 슬픔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선택일 수 있다. 이는 더 넓은 범위에서의 피해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서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는 데에 있어 약 3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어딘가 안일해 보인다. 아니 위험해 보인다는 표현이 옳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분명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을 만큼 아직까지 논의되어야 하는 사안이 가득한 현재이고 또 현재이지만 이 죄책감을 중심에 두었을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과거의 역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앞세웠을 때 영화의 서사는 한 인물의 기행, 혹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설정이 필요해진다. 영화 <스카우트>(2007),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택시운전사>(2018), <임을 위한 행진곡>(2018) 등은 대체로 이 선상에 있는 영화들이다. 이 인물들은 자신이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잘 모르거나(<스카우트>, <택시운전사>), 과거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으로 현재를 잘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상흔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야 할 고통스러운 현재는 이미 <꽃잎>을 통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었는지가 드러난 방법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라는 설정은 왜 아직까지 필요한지 의문이 들지만 이러한 설정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 인물들에 대한 진실을 깨달았을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현재가 아닌 과거로 박제화 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과거의 그 일 때문에 누군가 망가져 있으며, 알지 못하는 그 일이 현재의 일상을 뒤흔든다. 죄책감 속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이미 지나가버린 그 일이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분명한 거리를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다.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아직도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있으며, 아직도 고통 받는 이들이 있다는 점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지금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앞세워 외국인의 눈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지, 과거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되물어야 한다. 이 영화들이 대체로 후반부에 눈물을 쏟게 한다는 점에서 그 귀결이 감상으로 밀어 넣는 것이라면 더욱 설명이 필요하다. 이 감상의 세계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일 장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김군>이 성취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군>은 ‘유사과학’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논리를 구축한 그들의 의견을 보여주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들이 어떤 논리 속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이는 <김군>이 과거의 영화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찾은 힌트와 다르지 않다. 그들이 번호를 붙여가며 북한에 있다던 그 ‘광수’들을 실제로 찾는 것은 바로 그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감상이나 죄책감, 혹은 무시가 아닌 그들의 논리에 대한 반론을 통해 현재의 문제로 5.18광주민주화운동 끌어올리는, 증명할 수 있는 전환의 방법이다. <김군>은 그들의 논리는 영화 속 한 인터뷰어의 말마따나 만약 북한군이 광주에 내려왔다면 당시 국방부는 뭘 한 것이냐는 분명한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것을 믿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들의 논리를 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며 지금 움직이고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조명한다.

 

영화는 ‘광수’라 지목한 이들을 쫓으며 크게 조명되지 않았던 시민군들의 실상을 천천히 훑어나간다. 소명의식보다는 친구와 이웃이 죽어나가는데 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그 당시 시민군의 한 마디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정치권에서 뒷배를 두고 할퀴며 해댔던 말들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프레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김군>은 시민군들이 복면을 쓰게 된 이유, 화순·나주·함평에서 받아온 총의 종류, 시민군이 목격한 군인들의 총과 트럭의 종류, 쉽게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넝마주의들과 보육원 출신의 시민군 등에 대한 진술을 통해 그들의 논리에 조근 조근 반박한다. 이처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곳에 있던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의 조합, 그것을 통한 논리적 구성과 자료, 실체의 접근이라는 것을 <김군>은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군>은 이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이야기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바뀔 때가 됐다고 이야기하는 쪽이 맞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너무 늦고, 낡고, 후진 이야기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변명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접근하는 법’은 다큐나 극영화라는 형식을 넘어서기에 더욱 그렇다. 아마도 <김군>을 보려면 조금은 작은 극장에서, 아침잠을 쪼개거나 피곤한 몸을 끌고 다녀야 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것도 열심히 극장을 찾아 한참을 이동해서야 볼 수 있는 수고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화는 나지만, 화낼 수 있는 이들이 <김군>의 관객일 것이다.

 

 

<김군>(2019.5.23. 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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