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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떠있는 벌판’을 걷고 또 걷는다-산티아고 순례의 길
‘별이 떠있는 벌판’을 걷고 또 걷는다-산티아고 순례의 길
  • 이재형 l 번역가
  • 승인 2019.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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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성인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 중 한 명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부활한 이후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러 떠난 다른 제자들처럼, 야고보도 전도를 위해 이베리아반도로 갔다. 7년 뒤 그는 여전히 로마인들이 점령 중이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가, 유대의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됐다. 그리하여 야고보 성인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의 유해를 훔쳐 배에 실었고, 천사들이 물길을 안내했다. 그의 유해는 7일간 떠돈 끝에 스페인 서쪽 끝의 갈리시아 지방에 닿아 묻혔다. 야고보 성인이 어디 묻혔는지 그 정확한 위치는 7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잊혔다.

 810년경, 은둔자 펠라지우스는 꿈속에서 이 성인의 유해가 묻힌 장소를 계시받고 떠나 무덤을 발견했다. 무덤이 있던 곳은 캄푸스 스텔라에(별이 떠 있는 들판)라고 불렸다가 지금은 <산티아고>라고 부른다.

 

야고보 축일을 기념하는 순례행렬

 산티아고의 명성은 기독교 세계에 멀리 퍼져나가 산티아고로의 순례는 11~14세기 황금시대를 맞았다. 야고보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주일인 해, 즉 성년(聖年)이 되면 4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이곳을 향해 걸었다. 13세기 중반 예루살렘이 터키인들에게 점령당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순례길은 더욱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 순례는 시작되자마자 중세유럽을 각성시켰고, 덕분에 과학과 의학, 철학 등의 학문이 크게 발전했다.

 순례자들을 위해 도시와 마을들이 세워졌고, 다리가 건설됐고, 성당과 병원이 세워졌다. 그러나 14세기 들어서부터 산티아고 순례는 서서히 잊혀갔다. 백년전쟁에 이어 16세기에 종교전쟁이 발발하고, 그들을 보호해주던 템플기사단도 해체되면서 순례 여행을 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20세기에 들어 기적처럼 되살아났고,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15년에 이 르퓌 순례길을 걸은 사람들의 숫자는 모두 5만 4,329명이며, 이 숫자는 해가 거듭될수록 증가추세다. 이 길이 이처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풍부한 문화유산과 다채로운 풍경 덕택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도 순례자에게 매우 편리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례길 부근의 도시나 마을 사람들 또한, 순례자의 존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매우 호의적이다. 

 보통 유럽인들(요즘은 캐나다인과 미국인들, 일본인들, 한국인들도 많이 르퓌에서 출발한다)은 산티아고 순례를 프랑스의 르퓌에서 시작, 생장피에드포르를 거쳐 스페인 서쪽 끝의 산티아고에서 끝내고, 기간은 약 두 달에서 두 달 반이 걸린다. GR(장거리 코스) 65로도 불리는 르퓌 순례길은 프랑스 제3도시 리옹에서 남서쪽으로 110km가량 떨어진 종교도시 르퓌에서 출발, 남서쪽으로 걷다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끝나는 750km 규모의 길이다. 

 그리고 다시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서쪽 끝 산티아고까지 이어진 750km의 길이 바로 한국인들이 많이 걷는 프랑스 순례길(프랑스가 아니라 스페인에 있는)이다. 이 길 역시 한 달에서 한 달 보름 정도 소요된다. 보통 프랑스에 있는 이 르퓌 순례길과 스페인에 있는 프랑스 순례길을 합쳐서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부른다. 물론 프랑스에는 르퓌 길 말고 다른 순례길들이 있고, 스페인에도 프랑스 길 말고 다른 순례길들이 있다. 어느 길을 걷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단 길을 나서는 일이다. 

 2010년 4월, 떠나라고, 걸으라고 나를 떼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스위스 작가 니콜라 부비에는 『세상의 용도』에 이렇게 쓴다. “이 억누르기 힘든 욕망, 그걸 뭐라 불러야 할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무엇인가가 점점 더 커지다가 어느 날인가 닻줄이 풀리면, 반드시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떠나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은 지 1주일 만에 짐을 꾸려 “일단은 떠나고 봤다.” 4월 5일, 힘들게 넘은 오브락 고원에는 무릎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2015년 9월, 2016년 5월, 2017년 5월, 그리고 2017년 9월, 이렇게 다섯 차례 프랑스에 있는 르퓌 순례길을 걸었다. 여기서는 르퓌 순례길 중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또한 가장 힘들기도 한 르퓌에서 콩크까지의 구간(일반적으로 8박 9일)에 대해 소개한다.

순례자는 르퓌를 떠나 블레이 지방의 화산지대와 마르즈리드 지방의 화강암질 산괴, 오브락 고원, 로트 지방의 계곡, 케르시 지방의 석회질 고원, 가스코뉴 지방의 작은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피레네산맥을 멀리 바라보고 걸으며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할 것이다. 

 순례 첫날, 르퓌에서 출발해 숙소가 있는 생프리바달리에까지 걷다 보면 돌담이 지천인 풍경이, 영락없이 제주도다. 모르타르 없이 올려놓은 돌들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큰 돌과 작은 돌, 못난 돌과 잘난 돌, 둥근 돌과 네모진 돌이 차별 없이 골고루 섞여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담을 쌓아 올렸으니, 꼭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 같다. 

 골고루 섞여 있는 돌의 세계처럼, 순례자의 세계에도 차별과 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중요하지 않고, 빈자인지 부자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순례자의 세계는 완전히 평등한 세계다. 

 돌담과 생울타리, 그리고 줄지어 늘어선 물푸레나무, 이 세 가지가 블레이 지방의 농촌 풍경을 이룬다. 물푸레나무는 농촌생활을 상징하는 나무로 온갖 종류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 가축들에게 아주 좋은 먹이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초원에 풀이 드물어지면 농민들은 이 나무의 가지치기를 해서 잎이 달린 가지는 소나 양에게 던져준다. 가축들은 가지와 껍질, 잎사귀 등 이 나무의 모든 것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어치운다. 어떤 농민들은 가지를 말려서 겨우내 가축들에게 사료로 제공한다. 물푸레나무는 자기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데 대해 앙심을 품지 않고, 그다음 해에도 다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낸다. 물푸레나무는 땔감이 되기도 하고 가구와 연장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나무인 것이다. 

 나무들은 사회적 존재다. 배우고 기억하고 서로 돕는다. 나무 세계의 사회연결망이라 할 수 있는 균성 소통 시스템을 활용, 위험이 닥친다 싶으면 미세신호를 보내 방지하는 것이다. 또한 나무들은 서로를 배려해 햇볕이 다른 나무를 비추도록 가지의 방향을 잡아준다. 순례자들은 나무들을 보며 서로에 대한 배려를 배우게 될 것이다.

『나무 수업』이라는 책에서 페터 볼레벤은 “나무는 워낙 느리게 자라기 때문에 세포가 매우 작고 공기 함량도 아주 적다. 그러나 탄성이 뛰어나 폭풍이 불어도 잘 부러지지 않는다. 나무들의 인내는 20여 년 뒤에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른다. 그것은 엄마 나무가 죽으면 그 이웃들이, 죽음으로 인해 비워진 공간 속으로 가지를 뻗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것이 나무의 속도다.”

이 느림의 미학이야말로 천천히 걸으며 많은 것을 보는 순례의 미학과 맞닿는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쓴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에 의하면,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며, 순례는 그 같은 삶의 방식을 길 위에서 실현한다. 

 

르퓌 노트르담 성당 문 앞에서 첫 걸음을 내디디려 하는 순례자

마법의 렌틸콩 수프

순례자는 블레이 지방에서 렌틸콩으로 만든 요리를 먹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르퓌는 꼬투리 안에 양면이 볼록한 렌즈 모양의 콩 두 개가 들어 있어, ‘렌즈콩’이라고도 불리는 이 콩의 주산지이기 때문이다. 지방은 적고 단백질은 풍부해 세계 5대 슈퍼 푸드 중 하나라고 하니 넉넉하게 먹어둘 일이다. 나는 르퓌에서 출발해 30km를 지나 도착한 마을, 로슈기드의 한 숙소에서 이 숙소를 운영하는 가족들과 함께 렌틸콩을 곁들인 소시지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르퓌에서 렌틸콩을 얹은 타타르식 연어 스테이크 요리를 맛본 적이 있다.

세 번째 맛본 렌틸콩 요리는, 르퓌 순례길이 아닌 스티븐슨의 당나귀 길을 걷다가 먹게 된 렌틸콩 수프다. 그날 길을 잃어 40km 넘게 걸은 후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늦은 밤 숙소에 들어선 내게 주인장은 이 수프를 내놓았다. 이 따뜻한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집어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마법의 렌틸콩 수프였다. 

소그에서 출발해 소바주로 갈 때 통과하는 숲은 대부분 추위와 가뭄에 매우 강한 유럽적송(구주 소나무라고도 부른다)으로 조림돼 있다. 나무들이 곧게 뻗어 있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 마르즈리드 지역의 소나무는 바람이 많이 불고 얼음처럼 차가운 이곳의 겨울 날씨에 적응하다 보니 마디가 많고 발육이 좋지 않다. 그러나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 살 수 있다. 이 소나무에서 짜내는 식물성 기름은 목이 아플 때 좋고, 송진은 전통적인 도료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자생종은 너도밤나무인데, 오브락에 도착할 때까지 자주 보게 된다. 너도밤나무는 매우 느리게 자라는 나무지만, 옛날에 이곳 주민들은 이 나무 덕분에 결혼식 등 큰 행사를 치르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알리고와 양파수프, 오베르뉴의 맛

순례자는 오베르뉴 지방의 오몽오브락에서 나즈비나스 사이에 있는 숙소나 식당에서 ‘알리고’를 맛보게 될 것이다. 으깬 감자와 치즈, 크림, 버터, 마늘을 넣어 만든 알리고는 소를 많이 키우는 고산지대 오베르뉴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나도 르퓌 순례길에서 몇 번 먹었는데, 알리고를 먹으면 정말 속이 든든해진다. 알리고는 잡아당기면 쭉 늘어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알리고를 파는 숙소나 식당에서 포크로 알리고를 머리 위까지 잡아 늘이는 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베르뉴 지방은 4월에도 눈이 올 정도로 추우므로 걷다 보면 따뜻한 국물이 생각난다. 이럴 때 따뜻한 양파수프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면 좋다. 양파수프는 대부분 전채로 먹지만, 위가 작은 나에게는 충분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지역에 따라 조리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양파와 버터, 식용유, 빵 조각, 치즈, 소금, 후추는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양파수프 한 그릇이 10유로가 넘는 경우도 있지만, 예전에 추운 날 르퓌길 순례를 할 때는 이름 없는 시골 식당에서 1유로에 먹은 적도 있다. 내가 후다닥 먹어치우고 식당 주인을 무심결에 쳐다봤더니 한 그릇 더 가져다준 적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아직 시골인심은 넘쳐난다. 

 

순례자들의 성인인 야고보 성인

자유를 꿈꾸는 프랑수아 토켈 정신병원
 
소바주를 떠나 오몽오브락으로 가는 도중에 생탈방쉬르리마뇰이라는 제법 큰 마을이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무심코 이 마을을 지나치지만, 사실 이곳에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수아 토켈 정신병원이 있다.

191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태어난 토켈은 스페인 내전(1936~1939)이 일어나기 전부터 정신과의사로 일하면서 정신의학의 치료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환자들을 바르셀로나 해변으로 데리고 나가서 해수욕을 시키는 것 등이 그런 시도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통합당의 일원이었던 그는, 공화주의자들이 내전에서 패하자 프랑코 체제의 위협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망명해야만 했다.

1940년 생탈방쉬르리마뇰에 도착한 토켈의 가방에는 두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한 권은 독일의 정신과의사 헤르만 시몬의 저서 『정신병원에서의 정신치료』, 다른 한 권은 자크 라캉의 박사학위논문 『개성에 비춰본 망상증』이었다. 그는 첫 번째 책에서 “환자를 치료하려면 우선 병원을 치료해야 한다”라는, 즉 사회적 소외와 싸워야 한다는 원칙을 발견했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은 치료자들의 교육을 위해 병원 인쇄소에서 복사해 배포했다. 

토켈은 다른 의사들과 합심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고, 생탈방쉬르리마뇰 마을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도착한 그는 환자들이 식량을 배급받을 만큼 상황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따라서 당시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이 굶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를 목격한 토켈은 굳게 닫혀 있던 정신병원 문을 활짝 열고, 환자들을 들판으로 보내 농민들을 돕게 했다. 환자들은 노동의 대가로 감자, 양배추 등을 받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토켈은 병원의 벽을 허물어 환자들은 자유롭게 마을에 갈 수 있게 했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마을사람들을 채용했고, 마을사람들도 병원 일을 도왔다. 그 후 20여 년 동안 토켈 의사는 환자들이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 등의 행사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환자들이 지역사회에 동화되게 함으로써,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는 1962년까지 이 병원에서 일했는데, 프랑스 국적이 아니었던 그는 처음부터 다시 의사교육을 받고 실습 과정을 거치고, 국적을 획득해야만 했다. 그는 많은 의사를 길러냈는데, 프란츠 파농도 토켈의 제자다. 토켈은 펠릭스 가타리와 지네트 미쇼, 장 우리 등의 의사들과 ‘정신치료 및 제도화된 사회치료 그룹’을 결성해 함께 활동했다. 그의 이론과 생탈방쉬르리마뇰에서의 임상경험은 ‘제도화된 정신치료’라는 명칭으로 이론화됐고, 20세기 후반부터는 정신의학과 정신의학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도화된 사회치료의 요람인 생탈방쉬르리마뇰의 토켈 정신병원은 ‘아웃사이더 아트(Art brut)’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의 그림을 보관하지 않고 버렸다. 일부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신병리학적 관점의 연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생탈방쉬르리마뇰 병원에서는 1914년부터 이 그림들을 빠짐없이 모아뒀고, 이에 장 뒤뷔페, 폴 엘뤼아르, 레이몽 크노 등이 관심을 가졌다. 1943년 아내 누슈와 함께 이 병원에 머물렀던 시인 폴 엘뤼아르는 환자들의 그림을 보고 파리로 가져왔다. 엘뤼아르는 그림들 중에서 특히 끈으로 작은 형상들을 만든 오귀스트 포레스티에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오늘날 이 작품들은 아웃사이더 예술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전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프랑수아 토켈 정신병원은 1943년부터 토켈과 보나페 의사가 주도하는 비밀레지스탕스 운동의 본거지였다.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하에 있는 동안, 이 병원의 수녀들과 의사들, 직원들, 환자들은 부상당한 레지스탕과 폴 엘뤼아르를 포함한 망명자들을 맞이했고, 은신처와 치료를 제공했다. 생탈발쉬르리마뇰이라는 마을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고립돼 있어, 독일군이나 프랑코 지지자들을 피해서 도망쳐온 수많은 레지스탕스 운동가들과 지식인들, 의사들, 예술가들이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었다.

이 자유의 병원 앞을 지나면서, 나는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나지막하게 읊어본다. 
 

(…)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풍차 위에 
너의 이름을 쓴다.
(…)  
 
오, 자유여.


순례는 몸도 마음도 자유로운 자의 행위다. 

 

 

 

글·사진=이재형
프랑스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영어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 『목마른 사람들』 『사막의 정원사 무싸』 『벼랑 끝에 선 사랑을 이야기하다』 등 총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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