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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여성의 저항, 한국의 저항 영화 <알라딘>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여성의 저항, 한국의 저항 영화 <알라딘>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07.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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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은 무엇이 특별한가. 누구나 다 아는 우화의 일반구조를 생각해보면 ‘선한자의 승리’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충분히 자각되지 못했던 자스민(나오미 스콧)의 의미와 가치가 이 빤한 서사 속에서 강력하게 재발견된다.

 

그리고 그녀의 힘으로 결국 알라딘은 재평가 된다. 이제 우화이자 애니메이션 ‘알라딘’은 영화<알라딘>과 같지 않다. 자스민은 저항의 의미를 침묵의 무력함을 통해 강화시켰다. 이런 서사는 저항의 주체가 관습적으로 전제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저항의 의미를 담는다. 

 

이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영화에서 지니(윌 스미스)를 활용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의 역할은 빤한 서사의 공식에 젖기도 전에 다소 빠르다 싶을 정도로 알라딘(메나 마수드)의 우유부단함에 자리를 잡고, 그래서 다른 영화에서라면 결과를 빗 맞추기 어려울 지경의 클리쉐를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듯 경험하게 한다.

왜 이런 역할이 필요했는지는 분명하다. 지니의 감초와 같은 빠른 개입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알라딘이 알아서 자파를 이기고 자스민과의 사랑을 이루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지금과 같은 환호와 지지를 보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착한 마음을 지닌 알라딘의 소원성취가 세계적인 이 동화가 주는 교훈이지만 가이 리치 감독은 지니를 한 박자 빠르게 알라딘의 등장에 개입시켜 알라딘의 영웅성을 차단하면서 온전히 자스민에게로 그 시선을 옮길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알라딘’을 전형적 영웅 캐릭터로 만들려고 자스민을 수동적 캐릭터로 소모하지 않는다. 덕분에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다른 영화들이 ‘착한 여성’을 강조할 때,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여성’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항하는 인간’에 이어 결국 ‘우리는 왜 침묵할 수 없는가?’로 발전한다. 저항하기 위한 의지는 ‘삶의 의지’이고 이 의지를 이끌고 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스민의 저항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왜 침묵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이 질문을 받게 되면 한국인은 누구나 그 의미를 직감한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원래 동화였다가 애니메이션이었던 이 영화가 실사화되어 나타났다. 이 과정을 일종의 꿈의 실현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는, 적어도 이 영화의 흥행이 성공한 곳이라면, 그들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충동의 재현일지도 모르겠다. 알다시피, 우리는 침묵하면 안 될 몇 몇 상황에 동시다발적으로 던져져 있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자스민은, 자파의 찬탈 시도를 목도하던 와중에 자신의 아버지인 술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동시에, 인간의 저항 정신을 극적으로 꺼내 놓았다.

 

자스민의 저항 논리는 명료하다. ‘나는 원래 침묵하지 않았으니 침묵하지 않겠다’이다. 이 논리는 저항의 주체가 하나의 신분, 혹은 어느 위치에 의해 실행되는 힘이 아닌 인간의 본성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즉 순응과 저항의 이자구도를 되묻는 구조가 아니라, 저항하려는 본성과 저항하려는 의지는 같은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알라딘>의 'Speechless'의 폭발적 반응은 자스민의 목소리 속에 이미 이러한 가치를 예고해 둔 것에서 비롯된다. 이제 이 영화에서 보게되는 ‘자스민’의 태도는 우리의 태도를 회복케하는 시뮬레이션이다. 조금 다르게 보면 이 영화는 저항의 의미, 특히 여성의 저항을 남녀관계로 묻는 사람들에게조차 저항은 그 자체로 인간의 의지라는 점을 설득하는 시뮬레이션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의 저항이라는 화두로써 이 영화를 본다면 <알라딘>은 인간 보편의 문제로 치부하기보다 더 급박한 여성의 정신적 재생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문제가 한국 사회의 존재론적 관심사와 연동되어 그 의미에 추진력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이 영화가 특히 한국에서 주목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만약 그렇다면 영화 <알라딘>은 자스민을 통해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만큼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여성의 저항과 한국의 저항.

결과적으로 시류를 적절히 읽어낸 영화 <알라딘>은 한국에서 만큼은 자스민의 목소리에 동화돼 남성과 여성을 넘어 우리의 문제 속에서 ‘저항’의 흔적을 어떻게 남겨야 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그 답은 자스민의 노래 가사처럼 명료하다. ‘우리는 원래 침묵하지 않으니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이처럼 정확하게 대변하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한 편의 영화 속에서 바로 이런 의미의 저항을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에 우리는 자스민에게 환호를 보낸다. 뜻밖의 흥행 성적을 보인 <알라딘>의 비밀은 바로 그 환호 속에 숨어 있다. 나는 이것이 좋은 영화의 역할이라고 굳게 생각한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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