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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일본극우와 왈츠를 출 때
그들이 일본극우와 왈츠를 출 때
  • 한승동 l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
  • 승인 2019.08.0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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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들이 잘못 끼운 첫 단추’라는 제목으로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전영기의 시시각각) 한 편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칼럼의 내용에 분개한 일부 네티즌들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합법… 한국적 특수성 지나쳐’라는 제목을 달아 칼럼을 공유했고, 중앙일보는 이를 ‘변조에 의한 편집권’ 침해라며 경찰 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히 제목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원제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 투자를 기대하나?(韓国はどの面下げて日本の投資を期待するか?)”

<조선일보>의 7월 4일자 기사 ‘일본의 한국 투자 1년대 -40%, 요즘 한국기업과 접촉도 꺼려’의 일본어판 제목이다. 그 기사가 나간 지 2주일이 지난 7월 20일, 조선일보사가 자사 기사를 제공하는 일본의 최대 포털 사이트 야후 재팬에 실렸던 문제의 그 기사를 찾아봤다. 야후 재팬이 관리하는 사이트에선, 문제가 되자 이미 삭제되고 없었으나, 같은 제목의 말을 기업관계자의 말로 앞세운 유튜브가 있어서 보니 누적 조회수가 34만 1천이 넘으며 약 2천 개(1,967개)의 답글이 달려 있었다. 그 내용이 어떤 것들일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15일 게재된 같은 신문의 일본어 기사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국민의 반일감정에 불을 붙인 한국 청와대(원래 제목은 ‘국채보상, 동학운동 1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청와대’)’ 등 문제가 된 다른 기사들 몇 개도 야후 재팬이 관리하는 사이트에선 삭제되고 없었다. 

하지만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옮겨진 동일한 제목과 내용의 일본어 기사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7월 15일 <중앙일보>의 칼럼 “대법관들이 잘못 끼운 첫 단추”(‘전영기의 시시각각’)는 한국 정부가 아니라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린 대법원 대법관들을 겨냥하고 있다. 한일 갈등의 책임이 한국 쪽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거나, 적어도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 칼럼은 특히 전쟁 배상은 승전국이 패전국에 대해 강제하는 것으로, 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한국은 국제법상 아예 처음부터 배상 청구 소송을 벌일 자격 자체가 없었다며, 그것도 모르는(또는 알면서도 판단을 잘못한) 한국 대법관들이 없던 문제를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원망을 담고 있었다.

“사고는 대법원이 치고 고통은 국민이 속절없이 당하는 형국이다. 대법관들의 판단력이 야속하기만 하다.” 

17일 일본 극우 <산케이신문> 계열의 <후지TV> 논설위원이, “이제 한국에 남은 선택지는 문재인 대통령 퇴진뿐”이라며 탄핵을 선동하는 조롱조의 방송을 내보냈다가 말썽이 일자 내렸다. 역사교과서 한일관계 왜곡으로 유명한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책을 내는 출판사 후소샤(扶桑社)도 아베 정권의 대변지가 됐다는 이 신문과 같은 계열사다. 중도좌파적 중립지라는 <아사히신문>조차 사설 등에서 아베 정권의 한국 제재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촉발한 것은 한국이며, 특히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한국 정부 책임이 크다는 주장을, 아베 정권 비판의 전제인 양 끊임없이 강조하며 상기시킨다. 

한국 정부 탓이라는 투의 <아사히>의 지적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동일한 명제를 끊임없이 중복 게재하는 행위는, 발신자나 수용자(독자) 모두에게 해당 내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해, 미확인 상태가 주는 심리적 갈등 소지를 없애고 확신을 선사한다. 한국의 유력 수구매체들과 일본의 매체들은 적어도 이런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아베 정부나 일본 보수우파 세력의 최근 발언들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과잉 자신감과 상대를 깔보는 듯한 폐쇄적 우월감이, 한일 간의 이런 기묘한 언론풍토와도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시사한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자유이나, 자신감의 근거가 객관적 사실인식과 판단이 아니라 왜곡된 인식과 자아도취라면 서로에게 불행한 결과를 낳지 않겠는가. 

도널드 트럼프의 공화당 정권 등장 이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의 미국 주류 매체들이 민주당과 일종의 反트럼프 진영을 형성하고 <폭스> 등 트럼프 지지 우파 매체들과 서로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시대 급변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현상이지만, 좌우를 망라한 일본의 거의 모든 매체가 상대국 때리기에 올인하며 의기양양해 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공세를 당한 한국의 주류 매체들이 같은 사안을 두고 자국 정부를 일제히 공격하는 일종의 ‘동조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대법관들 판단을 국민에게 짐만 지운 철없는 짓으로 단칼에 매도해버린 <중앙일보> 칼럼의 자신감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그리고 그 칼럼니스트는 “이 판국에 아베 편드는 듯한 발언을 하는 분들은… 도쿄로 이사를 하시든가”라는 유시민 씨의 발언을 서두에 인용하며, “유 씨는 지금 사태를 무슨 종족 간 패싸움으로 몰고 가 진영의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세상은 그런 사람들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유 씨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바 아니나, 아베 정권이 수출규제로 도발한 지금 사태야말로 ‘진영의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벌이는 종족 간 패싸움’ 그 자체거나 그보다 나을 게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 칼럼니스트는 “요즘 상황은 한국의 대법관들이 첫 단추를 이상하게 끼우는 바람에 비롯된 측면이 있다”면서 이렇게 이어간다. 

“발생 원인의 상당 부분을 한국 측이 제공했다는 인식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만연해있기에 우리가 ‘아베가 잘못했다’고 외치고 다니면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한국의 유권자들은 이 정부와 집권 세력이 종족 간 패싸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오히려 쿨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2012년 5월 24일 당시 김능환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대법원 소부의 ‘일제 강제징용 사건’ 파기환송 판결문과 2018년 10월 30일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 전원합의체의 판결문이 “세계 일반의 상식과 법의식에 부합하는 논리의 자연스러운 전개는 찾기 어렵다”며 지금 “한국인의 민족적 정의를 내세우는 감성적 호소가 많고 세계사적 보편성보다 한국적 특수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칼럼니스트의 이 모든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2012년 판결문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는다’며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헌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 ‘우리 대한국민이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선포’한 사실을 제시했다. 그러나 국제법에서 국가의 법적 효력은 운동이나 선포로 확립되지 않는다. 영토·국민·주권의 3대 요소가 실체적으로 존재해 이를 국제사회가 승인함으로써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권은 헌법과 입법·사법·행정 3부가 실제로 작동하고 독립적인 군사력과 외교력을 갖춘 권력이다. 이에 따라 2012년 판결문의 취지 ‘1919년 한국이 건립됐으니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그 자체로 불법이다’는 국제법적으로는 전제 불성립의 오류로서 국제사회에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헌법은 한국인에겐 절대적이지만 분쟁 상대국이나 국제사회에서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 국제법은 ‘하느님 말씀’처럼 절대적인 게 아니다?

칼럼니스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따라서 한국이 일제와의 전쟁 당사국이고 전승국이라는 주장이 상대적이듯,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쪽 역시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1919년 한국이 건립됐으니 1919~45년까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그 자체로 불법이다’는 국제법적으로는 전제 불성립의 오류”라는 주장도 언제나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칼럼니스트는 국제법이란 것이 마치 바이블의 글자 하나하나가 무오류의 신성한 ‘하느님 말씀’ 그 자체라고 믿는 축자영성설을 신봉하는 기독교 광신주의자의 그것처럼 절대적 기준으로 주어져 있는 것인 양 말한다. 하지만 국제법도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것도 주로 힘을 가진 세력이나 국가 또는 복수의 그들이 그들의 이익에 맞게 타협해서 만든 상대적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절대적인 듯 보이는 까닭은 다만 그들이 그것을 일정 기간 강제할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 국제법은 그 자구 하나하나도 바뀌고 그것을 만든 가치나 시대정신도 바뀐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나 식민지 침탈도 대부분 그들이 만든 ‘국제법’상으로는 합법이었다. 마치 1910년 일제의 조선병합이 당시 국제법상으론 합법으로 대접받았듯이. 노예제나 신분제도 근대에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혁파될 때까지는 합법이었다. 보통선거권도 20세기까지 그것을 주장하는 게 불법인 곳이 많았다. 침략자의 행위를 그것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로 따진다면 대부분 ‘당대 국제법적으로는 합법’이라는 판정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침략이나 수탈에 항의하는 피해자나 약자들의 주장은 모조리 국제법상 불법이 되고 말 것이다. 2012년과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바로 그런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이 옭아매고 있던 한계를 뚫고 나간 것이다. 그것은 한국적 특수성에 사로잡힌 상대적, 비보편적 가치에 매몰된 무지나 편견이 아니라 더 큰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이든 뭐든 이미 확립돼 있던 기존의 틀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불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지켜야 할 보편이라면, 그것은 철저히 기득권자의 이익을 영속화하기 위한 논리다. 결코 보편이 아니며 그야말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상대적 가치, 상대적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2.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협상에 초대받지 못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를 결정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해 9월 체결돼 1952년 4월에 발효)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면, 한국인이 일본을 상대로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자의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에 “대일 평화(강화)회담 참가국으로 결정”돼 있었다. 1949년 12월 초안의 전문에 한국은 ‘연합국 및 협력국’의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그해 12월 29일 미국 국무부가 초안과 함께 작성한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에 대한 논평’에서 한국을 강화조약 서명국(당사국)에 포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한민국은 극동위원회 회원국이 아니며 소련의 승인을 받지 못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지속된 저항운동, 일본에 대항한 전쟁에서 활발한 전투의 기록(중국국민당 군대와 함께)을 가지고 있으며, 참석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며, 만약 미국이 한국의 참가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분개할 것임….”(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2010)

말하자면 한국은 전쟁 당사국이었고, 전승국이었으며,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므로, 조약에 서명하는 건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그 강화조약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 특사 존 포스트 덜레스(1888~1959.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아이젠하워 정부 국무장관으로 강력한 반공정책 주도)가 그렇게 한국을 조약 초안에 교전당사국(서명국) 명단에 넣었다. 그랬다가 그것을 뒤엎고 양유찬 당시 주미 한국대사에게 한국은 교전국이 아니므로 조약 서명국이 될 수 없다고 최종 통보한 것은 1951년 7월 9일이었다. 조약 체결 두 달 전까지 한국은 (비공식적이지만) 서명국 지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덜레스로부터 최종 통보를 받은 양 대사는 “왜 우리가 조인국이 못 되는가. 우리 (상하이) 임시정부는 2차 대전 전부터 줄곧 일본과 싸워왔는데.”라며 항의했고, 당시 이철원 공보처장은 “군사적으로 대일교전국이었던 한국이 배제된 채, 폴란드·체코같이 소련의 위성국이자 대일전에 상관없는 국가들이 대일 강화회담에 참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정치적으로는 가장 큰 피해국인 한국을 배제하고 일본의 군국주의·제국주의를 청산할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정병준의 책). 그 조약에는 또 다른 최대 피해국들 중 하나인 중화민국(대만의 장제스 정권)도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 정권)도 초청받지 못했으며, 소련은 참가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덜레스의 문서철에 있던 지도엔 독도가 분명히 한국령으로 표시돼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전승국 지위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령으로 명기돼 있던 독도는 나중에 소속 자체가 어디인지 명기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로 얼버무려졌다. 지금의 ‘독도 문제’ 씨앗이 그때 뿌려졌다. 왜 존 포스터 덜레스는 한국의 전쟁 당사국, 즉 주권을 지닌 연합국·전승국의 지위를 인정했다가 박탈해 버렸을까.

정병준의 책은 그 복잡하고 복합적인 사정을 미국 국립공문서관의 1차 사료들을 토대로 자세히 추적하고 있는데, 그 요체는 당시 미국이 냉전의 교두보로 육성하고 있던 미국의 대일정책 변화와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집요한 한국 배제 요구였다. 당시의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때 요시다가 덜레스에게 보낸 비망록 ‘한국과 평화조약’이라는 문서의 전문을 인용한다.

“미국이 다가올 평화조약의 서명국에 한국을 참가시키기 위해 초청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이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이 문제를 재고해 주기를 희망한다.

한국은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의 종결에 따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소위 ‘해방된 국가들(Liberated nations)[1948년 6월 21일 자 SCAP 비망록에 따르면 특별지위국 Special status nation]’의 하나다. 이 나라는 일본과 전쟁상태나 교전 상태에 있지 않았기에 연합국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한국이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내 한국 국민은 재산, 보상 등에서 연합국 국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에조차 거의 100만에 달하는 한국인 거주자 수(종전 무렵에는 거의 150만)로 인해 일본은 모든 방식의 증명할 수 없고 엄청난 요구에 압도될 것이다. 재일한국인 거주자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일본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하고(미국 초안 제3장 영토 3조), 일본이 한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는 것으로 평화조약을 제한하며, 양국 간의 정상관계 수립은 현재 한국사태가 해결되고 반도에 평화와 안정이 회복될 훗날에 체결될 조약으로 남겨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확신한다. 1951. 4. 23.”

요시다는 한국이 일제의 교전국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고(그래야 ‘한일합방’이 국제법적으로 합법이 되므로), 한국을 연합국·전승국·서명국으로 참여시킬 경우 일본은 한국인들을 감당할 수 없으며, 한국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므로 일본은 위험에 빠지고 미국이 계획하는 냉전의 반공 교두보 일본 건설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을 압박했다. 이런 일본의 강력한 반대와 함께 영국이 일본 편을 든 것도 미국의 한국 배제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역시 2차 대전에서 한국은 연합국이 아니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상 핑계에 불과했다.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에 기여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한 ‘그레이트 게임’의 당사국이자 동서냉전 강화에 앞장선 전통적 친일국이었다. 

미 국무부는 장제스와 협력한 상하이 임시정부 쪽 항일세력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중국 마오쩌둥 혁명에 직접 가담하거나 협력한 더 많은 수의 항일 조선인들은 언급도 하지 않았으나, 조선인들의 대일 항전은 피식민지 민족해방전쟁 역사에서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겼다. 게다가 일본과의 교전국·강화조약 서명국 지위와 관련해 잠시 일제 지배를 받았을 뿐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일본과는 무관한 폴란드 등(조선인들의 활동이나 존재감과는 비교될 수 없는)이 서명국에 포함된 것은, 칼럼니스트가 말한 그 국제법적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인 것이며, 힘 있는 자의 이해에 달린, 상대적인 것인지 보여주는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칼럼니스트의 다음 주장도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민족적 감성을 앞세운 주관주의적인 오류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 2018년의 대법원 판결문은 1965년 발효된 한일 청구권 협정 중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조에 대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 안 된 범주’를 신설해 거기에 강제징용 문제를 포함시켰다. 신규 범주는 한국이 일본에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따른 법적 배상 청구권’을 당연히 가진다는 전제 위에 설정됐다. 

그런데 국제법적 진실은 패전국에 ‘법적 배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승전국’밖에 없다. 한국은 국제법상 일본에 승전국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배상권을 행사할 수 없는 관계였다. 전승 연합국들과 패전국 일본과 전후 처리 협상인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협정에 한국이 초대받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 힘으로 해방하지 못해서 벌어진 분하고 원통한 일이지만 사정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2018년의 대법관들은 법적인 배상 청구권을 기어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 논리적 귀결은 ‘일본과 전쟁해서 승전국이 돼라’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은 승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받지도 서명국이 되지도 못한 것이 아니라, 서명국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받지 못했기 때문에 승전국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가른 지극히 정치적인 결정은 바로 미국의 전후처리 방침 변경, 미국의 국익에 따라 내려졌고,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미일 안보동맹)이 사실상 강화조약의 알맹이였다.

 

3. 승전국 여부와 개인 배상권은 다른 문제다?

게다가 배상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승전국이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칼럼니스트의 주장은 도대체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동남아 국가들이 한국(북 포함), 중국과 달리 배상금을 받은 것은 그들이 승전국이었기 때문이고, 그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큰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은 승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배상 청구권도 없다는 게 국제법적 정의란 말인가? 한국과 중국이 승전국이나 서명국에서 빠진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을 교전당사국이나 서명국에 포함시킬 경우 냉전 교두보 일본 육성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질 것이라는, 미국과 일본의 지극히 자국 중심의 편의적·자의적인 계산, 전후처리 방침 때문이었다. 거기에 보편타당한 절대권위의 국제법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들어설 여지도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은 종결됐으며,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도 소멸했다는 아베 정권의 주장이나 거기에 동조 현상을 보이는 한국 주류 언론이나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도 잘못돼 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은 많다.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공 출신자들의 대일 소송에서 희생자들 편에 서 온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최근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손해배상 판결을 두고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단”(아베 총리)이라거나 “양국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폭거”라는 등의 일본 쪽 한국 비난이 사실 은폐나 자가당착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한일협정 체결 이후의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 쪽 주장은 2000년 전후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 자신이 부인해 온 논리다. 

예컨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나 시베리아 억류 일본인들이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을 때 미국이나 소련은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1956년의 일소(일본–소련) 공동선언에 들어 있는 “그 국민의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고…”라는 조항을 근거로 보상 청구권은 소멸됐으며, 보상하려면 일본 정부가 하라는 논리를 폈다. 그때 일본 정부가 내세운 논리가 “조약으로 포기한 것은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기초로 해서 외국과 교섭할 국가의 권리(외교 보호권)일 뿐”, “국민 자신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에서도 양국과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 및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또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규정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 당시부터 그것은 외교 보호권 포기일 뿐 개인의 배상 청구 권리가 소멸된 것은 아니라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그렇게 한 이유는 만일 일본 정부의 협정 체결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면 식민지 조선에 재산을 가지고 있던 일본 귀환자들이 배상을 청구할 경우 일본 정부가 배상해야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고자 개인에게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한 것이다. 

1990년 전후 한국이 민주화되기 전까지는 한국인 피해자들이 개인적으로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에 일본 정부는 그것으로 책임을 피해갈 수 있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개인들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1990년대 초 시베리아 억류 한국인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을 때 야나이 슌지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양국 간 청구권 문제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해결됐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지고 있는 외교 보호권을 서로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개인 청구권 자체가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했고, 외무성이 간행한 <외무성 조사월보>도 그런 해석을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고 명기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이후 한국인 피해자들이 수십 건의 전후보상재판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일본 기업이나 국가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2000년께 일본 정부는 조약 조항의 해석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외국인의 보상 문제는 조약 체결로 해결이 끝났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일본인 피해자들의 보상청구에 대해서는 “조약으로 포기한 것은 외교 보호권에 지나지 않으므로 피해자는 가해국의 국내절차에 따라 청구할 길이 남아 있으므로 일본국가엔 보상책임이 없다”는 기존 논리를 견지했다(<세카이> 2019년 1월호 참조). 일본인 피해자들이 개인적으로 배상이나 보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소송은 일본이 아니라 관련 당사국에 가서 하라는 소리다. 그야말로 오로지 책임을 회피하려고 지어낸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궤변이다. 

2007년 중국인 피해자들의 소송 판결을 계기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 관한 소송에서 “(일본) 국가는 최고재판소 판결 논리를 원용해 개인 청구권이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청구권협정에 따라 (배상을) 소송을 통해 청구할 순 없다”는 또 하나의 해석을 추가했다. 말하자면 개인의 배상 청구권이 있긴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것을 재판을 통해 실현할 길은 막아버린 것이다. 그러자 한국인 피해자들은 한국 재판소를 통해 청구권을 행사했고, 마침내 승소해 그것을 인정받았다. 그것이 지난해 10월의 대법원판결이었다. 따라서 일본 재판소의 이상한 해석으로 일본에선 불가능한 청구 소송을 한국에서 제기하고 판결에 따라 해당 기업에 배상을 강제하는 것은 완전히 합법적이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해당 기업이 배상하는 것 자체를 위력으로 방해하고 있고, 일본 조야는 한국을 향해 온갖 비난과 협박조의 거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아베 총리와 고노 외상의 비난을 그대로 되돌려 말하면, 그들이야말로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단”을 하고 “양국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폭거”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 속의 희망, 야마모토 변호사의 말

아베 정권과 일본 우파는 야마모토 변호사도 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대법원판결을 받아낸 원고 두 사람은 미성년일 때 좋은 곳에 취직 시켜 준다는 달콤한 모집 광고에 속아 응모했다가 오사카로 징용당했다. 일본제철 오사카공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위험한 중노동을 강요당했지만, 임금도 받지 못했다. 도망치려 했다가 구타당하는 등 가혹한 노동과 학대를 당했고, 그런 조선인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피해를 당한 지 70여 년, 일본 재판소에 제소한 지 20여 년, 여덟 번째의 판결에서 비로소 그들은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을 살아서 받은 원고는 94살이 된 이춘식 씨 혼자였고, 일본 언론 중에 이를 보도한 것은 통신사 배포 기사를 받아쓴 지방지 몇 곳뿐이었다. 

일본 정치가나 매스컴에서 원고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고난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식민지배와 가혹한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의 소리를 전한 곳은 없었다. 징용공 판결에 대한 일본 쪽의 한국 비난이 아무 근거 없는 것이며 일본 정부 스스로의 입장을 뒤집는 것이라는 사실은 판례집이나 국회의사록만 뒤져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도, 마치 한국이 약속을 깨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양 비난하며 이웃 나라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하고 있다. 아베 정부와 우파는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야마모토 변호사가 <세카이>에 쓴 글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전쟁 당시 미성년이었던 피해자도 90살 전후가 돼 이미 때를 놓친 것이긴 하지만, 본건의 당사자인 신일철주금도 최소한이나마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사죄와 배상을 하고, 세상 떠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유족에게 마땅히 배상과 예를 다한 위령과 기념을 하고 비참한 인권침해의 재발 방지를 맹세해야 한다. 일본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생존 피해자 뒤에 한을 품고 죽은 수천 명의 피해자들이, 또 그 뒤에는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업은 국가정책에 따라 징용공을 사용한 것이니만큼, 정부는 그런 화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추진해야 할 입장에 있다. 지금 일본 정부에는 그런 걸 기대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피해자 개인과 민간기업 소송에 개입해서 지불과 화해를 방해하거나 사실을 숨긴 채 이웃 나라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하는 짓거리만은 그만두어야 한다.”

일본에는 이처럼 거대한 절망도 있지만 희망도 있다. 우리는 그 희망과 손을 잡고 그것을 함께 키워야 한다. 

 

 

 

글·한승동
메디치 출판사가 운영하는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과 한겨레신문의 도쿄 특파원 및 국제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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