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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장난 대의민주주의
한국, 고장난 대의민주주의
  •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1.01.07 19:0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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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ée 특집] 민주주의와 이상한 벗들

 1. 폭력과 대의정치

<월스트리트저널>에서 2010년을 장식한 사진 150여 장을 골랐다. 그 가운데 우리 국회의 난장판 모습이 뽑혔고, 이 나라에서 말깨나 한다는 언론사들은 예외 없이 그 소식을 “망신스럽다”고 전했다. 자랑스러운 일은 분명 아닌데, 그렇다고 이를 도저히 못 견딜 정도로 부끄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들은 핑계와 변명과 명분축적용 수사에 몰두하고, 그런 일에 식상한 시민들은 양비론에 수반되는 정치혐오증을 통해 불쾌감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착각의 재주를 익혀간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무분별한 개탄과 성토, 비난으로 목청을 돋우다가 며칠 지나면 체념과 포기, 망각으로 침잠하는 냄비 근성의 주기적 발작에서 벗어나려면 고쳐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따져봐야 한다. 의사당에서 번번이 몸싸움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폭력 국회”, “대의민주주의 실종” 따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상투적 어법이 정당하고, 필요한 폭력도 세상에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외면한다. 연평도에 포격을 당한 후 ‘자위권’이라는 이름으로 ‘응징’과 ‘보복’을 떠들어대는 사람들 앞에서 “폭력은 안 된다”는 설교가 먹힐 리 없지 않은가.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10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 대통령은 결과가 패배로 나오자 “부정선거가 있었다”면서 뒤집기를 시도했다. 부정선거 여부를 판정할 권한은 헌법재판소에 있는데, 헌법재판소는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판정하면서 제대로 집계해보니 51%의 득표로 당시 대통령이던 그바그보가 재선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유엔의 지지를 받은 와타라 정부가 들어선 상태지만, 유혈충돌과 대규모 피란 등의 사태를 겪은 후의 일이다. 결말은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정치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결정이 폭력을 통해 내려진 사례로 코트디부아르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어떤 나라에서든 찬탈, 내란, 봉기, 쿠데타, 혁명, 전쟁 따위 폭력투쟁을 겪지 않은 나라는 없다. 모든 나라가 많은 비용을 들여 경찰과 군대 같은 폭력조직을 유지하며, ‘범죄’를 색출하고 징벌하기 위한 폭력의 사용을 당연시한다. 그리고 폭력 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는 ‘인민의 뜻’ 또는 ‘민의’라는 문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인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 <비 오는 날 국회의사당>, 2004-김봉규
논의를 위해 명백한 사례 하나와 논쟁적 사례 하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연쇄 살인범이나 아동 성폭력범을 처벌해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범죄자가 저항한다면 경찰은 무력을 사용해 진압할 것이다. 이때 경찰의 무력은 정부의 공권력을 대변하고 정부는 인민의 뜻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찬반론이 시끄러운 4대강 사업 같은 경우는 어떤가? 정상적인 선거로 집권한 이명박 행정부와 국회의 압도적 과반수를 차지한 한나라당은 인민에게서 위임받은 정당한 권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반면에 민주당을 비롯해 이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산안 심의 같은 절차와 과정들을 통해 정부의 사업을 견제할 권리와 의무가 또한 인민의 뜻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선거에서 이겼다고 무소불위의 권력이 위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4대강 사업의 시행 과정도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라야 하며, 건강한 양식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이 점에 착안해 예산안 심의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표결 강행을 육탄으로라도 막아야 했을 것이다. 반면에 심의하고 견제할 수 있는 야당의 권리가 곧 집권당이 벌이는 모든 사업을 방해할 수 있는 비토권을 뜻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국회 다수파가 추진하는 일을 소수파가 물리력으로 막으려 든다면, 다수파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에서 폭력은 선거 결과를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나는 정도는 아니다. 좋은 예로 노무현의 당선을 기득권 세력이 인정하지 못하고 재검표 소송에 이어 결국 탄핵소추까지 가는 소동이 있었지만, 2004년 4·15 총선으로 나타난 민의에 의해 정리될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의 선거관리위원회나 헌법재판소가 기득권에서 얼마나 독립되어 있는지 묻는다면 상당한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검표 소송을 악용해서 선거 결과를 억지로 뒤집거나 총선으로 표출된 강렬한 민심을 묵살하고 탄핵심판을 결정하지 않을 정도의 독립성은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위와 관련한 논란은 폭력을 통하지 않고 일단락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지위처럼 현저한 사안에 관해서는 평화적 해결이 가능할 만큼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가 작동하는 셈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번 예산안 처리 과정을 비롯해 거의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국회 내 폭력 사태가 보여주듯이, 조금 덜 현저한 사안에 관해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곳은 곧 위임된 권력과 전제적 권력이 쉽사리 포개지는 회색지대에 해당한다.

2. 위임과 전제의 사이

민주정치라는 이념이 유행하기 전, 추장이나 두목, 군주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정당성을 갈구하던 권력자들은 대개 자신이 민심이나 정의를 대변한다고 자처했다. 특히 찬탈자일수록 더 큰 명분을 위해 “찬탈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때 으레 동원하는 구호로 ‘인민의 복리와 안전’이 빠지지 않았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스탈린, 히틀러, 김일성, 박정희, 피노체트 등 독재자일수록 민족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독점함으로써 잔인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인민이라는 개념이 지극히 미끄러워서 손아귀에 쥐려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인민의 뜻’, ‘인민의 이익’, ‘인민이 원하는 바’ 따위의 문구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항상 모호해 인공적 조작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안에 관해서든지 시민 가운데 상황을 명료하게 직시하는 부류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라면, 권력자의 농간에 따라 공론이 춤을 추는 사태가 빚어지기 쉽다.

그럴 수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 권력이 상황의 진상을 호도, 은폐, 왜곡할 수 있는 여지가 넓게 열린 점이다. 천안함 침몰사고 같은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국리와 민복에 보탬이 되는지 확정하려면 먼저 침몰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도 안에서 꼼꼼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권력은 진상 자체보다는 진상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달라질 정치적 효과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항상 유혹을 받는다. 더구나 권력은 국가안보라든지 전문 영역이라는 등의 빌미를 내세워 자기 편에게 불리할지 모르는 정보는 기밀의 벽 뒤에 감출 수 있다.

민족의 안보를 빌미로 정권 안보를 획책하는 짓은 권력자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유혹이다.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 역시 동일한 유혹에 의해 자행되었다. 핑계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생산시설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쳐들어가 보니 흔적조차 없었다. 더구나 그런 시설이 이라크에 있을지 모른다는 첩보가 엉터리였음을 당시 미국의 부시 정권과 영국의 블레어 정권에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나중에 드러났다.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거나 전쟁 위기를 부추기고 과장해 내부 권력을 강화하는 수법은 인류의 정치사에서 빈번하게 악용돼왔다. 고대나 중세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현대사회에서 그럴 수 있는가? 정부가 흘리는 ‘외부의 적’이라는 선전문구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공포 효과를 일으키는 반면, 외부에 정말로 그런 적이 있는지 따지는 관심은 정치적으로 개명되지 못한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짜증날 정도로 사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 <비 오는 날 국회의사당>, 2004-김봉규
정보를 조작하거나 왜곡해서 전쟁의 공포 아래 시민의식을 감금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는 수법은 언젠가 백일하에 탄로 난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이는 사악한 권력자들이 정보의 조작이나 왜곡을 망설이도록 만드는 충분한 억지 요인이 되지 못한다. 첫째, 그런 은폐와 조작의 전모는 대개 정권이 바뀐 다음에나 밝혀진다. 조작과 은폐를 자행한 정권이 유지되는 한, 조작과 은폐에 관한 의혹은 ‘국가 기밀’이라는 편리한 장치에 가로막혀서 공정하게 조사되기 어렵다. 둘째,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관련자들이 가차 없이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도 실무자 몇 명이 불법 고문 같은 죄목으로 처벌받았을 뿐, 부시나 체니 같은 정책 결정자는 오히려 그 덕택에 제2의 9·11 테러가 예방되었다고 큰소리를 친다. 의도적인 왜곡과 선의의 오판 사이에 선명하고 날카로운 분별이 지극히 어려운 현실에서, 이전 정권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심판은 현 정권 담당자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수 있다. 셋째, 경위야 어떻든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대부분 우리 편이 이기기를 바란다. 부시가 9·11 테러 이후 조장한 ‘애국’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적 광풍이 가라앉으며 부활된 비판적 양식에 힘입어 당선된 오바마지만,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깨끗하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러려면 그 사이 흘러간 시간 동안 새로 생성된 국내외 여러 가지 이해관계들을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악랄한 인간일수록 권좌에 오르면 임기 내에 무슨 짓이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해치우면서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고 뻔뻔하게 버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의정치나 민주정치는 기본적으로 공론이 형성될 수 있을 때까지 논의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촉박한 상태면 대의민주주의의 번잡한 논의 과정이 사치가 될 수밖에 없다. 농구경기 중 1분 타임아웃을 얻은 상황에서 토론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다음 경기를 준비할 때면, 또는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에 대비할 때면 농구선수와 감독 사이라 해서 토론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팀의 전략에 관해 어떤 선수가 의견을 낸다고 할 때, 괘씸죄를 적용해 핍박하는 감독은 전제적이라는 자리매김을 받게 될 것이다. 선수들이 그런 전제를 감수한다면 자리를 보전하겠지만, 선수 다수가 거부한다면 버릇을 고치든지 아니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농구 감독과 선수 사이에는 대의정치나 민주주의가 필수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헌법 제1조에 ‘민주공화국’을 천명하는 나라에서는 정부 권력과 인민 사이에 민주적 관계가 필수적이다. 민주 정부의 모든 직책과 권력은 인민의 위임을 받아야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사업이 전쟁처럼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면, 정부와 인민 사이의 관계는 슬그머니 20초 타임아웃 때 농구 감독과 선수 사이의 관계처럼 둔갑해버리고 만다. 정부가 ‘공공이익’을 내세워 몰아붙이는 어떤 사업에 대해서든 따지고 들어가는 일 자체가 ‘반역’인 것처럼 배척하는 뒤틀린 문법이 마련되는 것이다.

대의정부에서 정부 권력은 어디까지나 위임받은 권력이고, 주권은 인민 전체로 구성되는 공동체에 속한다. 권력자 가운데에는 공공의 혼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있고, 개인적이거나 계급적 탐욕을 위해 직권을 착취하는 사람도 있다. 위임받은 권력을 착취해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일수록 자신이 공익을 위해 헌신한다고 포장할 필요가 더욱 간절해지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공표하는 현란한 수사는 겉과 속이 같은지 다른지를 검증해야 한다. 그러므로 권력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권력을 강하게 행사해야 할 긴급성이 있는지에 관해 인민이 해명받을 권리(accountability)는 대의정치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요소이다.

그런데 정부가 행하는 권력 작용을 모든 시민이 납득할 때까지 해명하게 할 길은 없다. 정부기관의 어떤 작용에 대한 해명이란 결국 그 사안에 관심 있는 다수가 수긍하거나 묵인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천안함 침몰의 진상에 대한 정부의 발표가 논리적으로 아무리 엉성하더라도 인민 다수가 묵종하고 넘어간다면 수사권 없는 시민사회가 결정적인 반증을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천안함 사건처럼 국제적으로 조명을 받은 사건마저 이럴진대, 하물며 공론의 시선이 미치기 어려운 정부 각급 기관의 내부에서 이뤄지는 무수한 작은 결정들은 더욱 관계자들 사이에서 묵계가 맺어져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해명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모든 나라의 현실 정치에서 명목상으로는 인민에게서 위임했다고 하는 권력이 사실상 전제를 저지를 여지가 폭넓게 열려 있는 것이다.

3. 의제 변환의 메커니즘

▲ <비 오는 날 국회의사당>, 2004-김봉규
이와 같은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계기는 결국 건강한 공론의 질서가 자리잡는 길밖에 없다. 시민 그리고 지식인 가운데, 특정 당파의 선동에 놀아나는 부류가 일으키는 바람몰이로부터 공론장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대의정치와 전제정치를 뚜렷하게 분별하는 부류가 늘어나야 한다. 이런 분별 능력은 물론 몇 가지 요소로 정리될 수 없다. 하지만 지면이 부족한 만큼 한 가지 요소만 강조한다면 의제 변환의 메커니즘에 관한 명료한 인식 능력이다.

현대 정치에서 의제 설정 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 많이 알려져 있으리라고 믿는다. 의제 설정 권력이란 어떤 쟁점을 공론장에서 다룰 것인지, 묻어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력인데 대체로 문화적·구조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의제 설정 권력이 조·중·동이라 통칭되는 극우 신문사에 장악되어 있고, 이것이 현재 이명박 정권의 횡포를 마치 대의정치인 것처럼 왜곡하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재론하지 않는다. 의제 변환의 메커니즘은 의제 설정 권력이 작동하는 한 통로에 해당한다.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한국방송 사장이던 정연주는 감사원의 특별감사, 이사회의 해임결의 등의 절차를 거쳐 2008년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이 해임했고, 동시에 그는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정연주는 해임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서울행정법원은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하지만 본안 소송에서 배임 혐의는 2009년 8월 서울남부지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해임 처분은 2009년 11월 서울행정법원에서 무효 판결이 나왔다. 다만, 이때는 임기가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은 상태여서 결국 2008년의 해임 처분은 모든 효력을 발휘했고, 법원의 무효 판결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부당한 해임 처분으로 말미암아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한 사례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정권의 방송 장악 시나리오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권이 방송 장악 시나리오를- 예컨대 언명이나 문서의 형태로- 공표한 적은 없다. 감사원, 한국방송 이사회, 검찰, 법원 등은 모두 청와대의 압력 없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 이 와중에 경영 손실, 배임, 이사회 권한, 대통령 권한 등 기술적 용어들이 등장하고, 그럼으로써 논쟁의 초점은 정치적 차원에서 전문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런 의제 변환을 ‘정치의 사법화’라든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대립’이라고 부르면서 문제시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치와 사법,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등은 평면적으로 다른 구획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는 의미와 함께 서로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사법 기능의 정치적 중요성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시각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대립에 관한 피상적 우려가 아니라, 사법부를 대의정치의 한 축으로 인식하는 관점이다. 요컨대 ‘87년의 전환’으로써 무력통치가 물러나고 법치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면, 이제는 법치의 민주화를 추구해야 할 순서이다. 이를 위한 핵심 요건은 사법을 전문가가 독점하도록 방치하지 않는 시민의식이다. 하지만 이 주제는 여기서 더 이상 파고들 수 없기 때문에 이 정도 거론하는 데 그치고, 대의정치를 방해하는 우리 사회의 단견을 몇 가지 지적하려 한다.

4. 한국 대의정치의 걸림돌

중요한 정책은 모두 국회에서 법률 형태로 제정된다.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려면 찬성파와 반대파가 이치와 세력을 서로 겨루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해부해보면 두 단계의 다수결이 끼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마땅히 해당 법률안에 관한 본회의의 표결이다. 다른 하나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표결할 것이냐에 관한 결정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의사당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대개 표결의 시점과 방식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표결의 시점과 방식을 결정하는 규칙을 명확하게 정해놓는다면 난장판 국회를 방지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미국 상원은 더 이상의 논의를 중단하고 표결하자는 데 100명 중 60명이 찬성하기까지는 의사 진행 발언을 통한 소수당의 표결 방해를 무한정 허용한다. 다수파의 날치기와 소수파의 육탄 방어가 암울한 전통이 되어버린 한국 국회에서는 이 기준을 3분의 2나 4분의 3 정도로 높여야 소수파가 좌절감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면 성질 급한 한국의 주류 세력은 그 정도로 소수파의 권리를 인정했다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걱정에, 그 기준도 단순과반수여야 한다고 고집할 것이다. 어쨌든 이 기준은 어떤 식으로든 국회법 안에 정해둬야 한다.

의사 진행 규칙을 정하는 차원과는 별도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정치의식의 전환이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정치사회에서 모든 결정은 힘겨루기라는 의미를 철저하게 씻어낼 수 없다. 국제적으로는 이라크와 미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현재 남·북한이 보여주듯, 국내적으로는 우리 국회와 서울시의회, 여러 사회단체들의 각종 회의가 보여주듯이 말로 해결 안 되는 분쟁을 기어이 결판내려면 무력밖에 없다. 그러나 무력을 통한 해결은 협상과 설득, 흥정을 통한 해결에 견줄 때 야만적인 것 또한 틀림없다. 특히 협상과 설득과 흥정의 가능성을 충분히 시험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력에 호소한다는 것은 야만 중에서도 지극히 원시적 형태에 속한다. 용맹을 가식함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사춘기적 치기 또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두려워서 공황상태에 빠지는 무지로 인한 조급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국회나 시의회, 교회, 기업, 각종 사회단체 등의 중요한 회의에서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폭력 사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편이 먼저 폭력을 도발했는지 상당 부분 가려낼 길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안건일수록 회의가 잘 안 되는 원인은, 무력을 곧 대표적 덕성으로 숭배하는 마초이즘과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조급증 때문이다.

이번에 한나라당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김에 상대를 밟아주겠다는 마초이즘으로 일을 저질렀다면, 야당 역시 그냥 밀리면 체면이 안 선다는 사춘기 정서로 호응했다. 한나라당도 소수이던 시절에는 의사당 점거 따위 폭력을 당연한 권리인 양 실천했다.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도 내부 결정 과정을 보면 다수파의 전횡에 이은 분당 사태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의사봉을 손에 쥐는 기회가 왔을 때 일단 두드리고 본다는 발상이나, 이번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발상이나,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벼랑 끝 심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결사 반대’, ‘배수진’ 따위 전쟁 용어들이 걸핏하면 등장하는 데서도 미개한 마초이즘과 조급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바탕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민의를 곧 실제 인민의 의사와 동일시하는 자기중심적 아동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대한민국 5천만 인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해서는 누구나 나름대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5천만 인구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5천만 인구에게 물어보더라도 확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5천만 인구가 표명할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 무엇을 공동체의 의사로 간주할 것인지 매개가 필요하며, 아울러 질문을 어떤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묻느냐에 따라 각자 표명하는 의견의 분포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란 결국 조직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을 조직된 집단의사로 변환시키는 매개의 예술이다. 매개가 공정하게 이뤄지려면 명확한 절차 확립과 함께 적용의 일관성에 관한 사회적 표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절차로 이해하는 관점을 아직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다. 대의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라 부르면서 직접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도식이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부터 무비판적으로 주입되는 탓이 매우 크다.

이런 도식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착각을 초래하는지는 간단하게 밝힐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를 한다면, 가령 국민투표나 여론조사를 통해 모든 결정을 내린다면 대의의 문제가 없어지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또 ‘진정한’ 민의를 찾기 위해 어떤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투표나 조사를 해야 할지 논란이 이어질 것이다. 나아가 그렇게 찾아낸 민의의 집행 또한 모종의 기관에 위임될 수밖에 없다고 보면, 그 기관이 그 민의를 ‘제대로’ 대변해 집행하는지도 다시 공동체가 넘어야 할 과제가 된다.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더라도 여전히 인민의 의사를 어떻게 대변할 것이냐는 질문은 남는다.

대의의 문제는 정치사회가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되는 반면, 정치사회의 정책은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는 본질적 양면성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이것은 다른 항목으로 분해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대의는 폭력에 의해 이뤄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절차를 통해 이뤄질 때 문명의 조건에 부합한다. 이런 점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시민이 늘어난다면, 난장판 국회를 초래하는 마초이즘과 조급증이 완화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행태는 대의보다는 전제에 가깝지만, 고장난 대의정치를 고치는 데 도움이 되는 반면교사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취재 관행 개선, 대북정책, 행정복합도시 건설과 균형발전 등에서 그랬듯이, 이전 정권이 정한 어떤 정책도 다음 정권이 완전히 뒤바꿀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는 예컨대 종합편성채널 사업자 선정도, 4대강 사업도, 기타 현 정권이 벌이는 어떤 사업이든 차후에 다수를 차지한 세력이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소수파는 국회 내 소수의 처지에서 공연한 육탄 저항으로 헛심을 빼기보다는 인내를 발휘하는 가운데 다수의 지지를 확보해 정권을 탈환할 길을 궁리하는 편이 논리적으로 현명하다. 아울러 다수파의 일각에나마 이런 관점이 둥지를 튼다면, 근시안적으로 용맹을 과시하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입법과 정책의 장기적 효과를 고려하는 자제력이 생성될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권은 지난 정권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런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복수심에 사로잡힌 정권은 대의정부가 아니라는 보편적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글•박동천
한국정치사상학회 편집위원장.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2010) 등의 저서와 <정치경제학 원리>(나남·존 스튜어트 밀·2010)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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