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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증상 읽기(9) 세대 갈등] 절망한 청년들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한국사회의 증상 읽기(9) 세대 갈등] 절망한 청년들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 홍준기 l 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 승인 2019.08.1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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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

세대 갈등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은 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개인 심리학적 차원에 적용되는 것이겠지만 프로이트 자신을 통해 그것은 사회적‧문화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문명 속의 불만>이나 <모세와 유일신 사상> 등 특히 후기의 프로이트 저작들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미 자신의 작업 초기에서부터 신경증이라는 현상을 보다 넓은 사회적‧문화적 맥락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혁명이 발발했을 때 이 학생 운동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저항', '아버지 살해’ 등 오이디푸스적 갈등으로 표현하는 수많은 구호들이 거리와 매체를 장식했다. 요즘 아들(자녀)과 아버지(부모)의 갈등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무척 많은데 이러한 방식으로 세대 간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도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를 통해 재발견된 오이디푸스 신화를 억압된 사회에 대한 아들의 반항이라는 관점에서 수용했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오이디푸스적 반항을 사회주의 혁명을 지칭하는 은유로서 적극 활용했다. 그 후 초현실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권 예술 속으로 흡수되었지만 이러한 전통 그 자체는 (대중예술을 포함해) 사회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예술 장르의 중요한 소재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드라마나 소설, 영화는 오이디푸스적 갈등이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을 암시하면서 사회적 차원이든 개인적 차원이든 세대 갈등의 문제를 전달한다. 드라마의 한 예를 든다면 대표적인 것이 요즘 방영중인 <풍문으로 들었소>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한창 진행 중이므로 어떻게 끝날지 미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자녀들 세대가 부모에 대해 왜, 그리고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물론 허구적 사건을 묘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의 근본적인 문제, 즉 권력과 자본, 그리고 법의 부당한 결탁에 대한 자녀들의 정의로운 저항을 묘사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오이디푸스적 저항이 곧 사회적 저항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그 어떤 작품보다 잘 보여준다. <힐러> 역시 세대를 통해 누적되어 분출된 진정한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다룬 드라마이다. <힐러>는 특히 매체와 권력의 공모를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과거에도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가 많았지만 요즈음 드라마들은 시대가 많이 변해서 그런지 ‘정의롭지 않은’ 아버지(부모)에 대해 ‘정의로운’ 아들(자녀)이 승리하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는 ‘바람직한’ 차이가 있다. 과거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이 눈물과 통한, 혹은 용서와 화해의 방식으로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킬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방향으로 작업을 했지만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정신분석은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과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힐링 열풍과 더불어 안타깝게도 개인 심리학적 차원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

프로이트와 같은 탁월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가 개인적인 병리 현상을 사회와 문화, 환경의 영향과 무관하게 정의하고 진단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치료해달라고 프로이트에게 아내를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긴 적이 있다. 이 여성(아내)은 히스테리로부터 해방되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이는 만약 히스테리로부터 해방된다면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의 통찰을 일반화해 프로이트는 자신의 신경증 이론을 사회적 억압의 문제로 확대했고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이렇게 정식화한다. “인간은 사회가 그 문화적 이상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인간에게 부과한 억압(Versagung)의 정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신경증자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는 주체를 억압하는 사회, 문화, 또는 타자와의 관련성 속에서 신경증의 원인(트라우마)과 그것의 치료의 문제를 사유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선 그것을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즉 개인 심리학적 틀 속에서 사유했고, 이를 문명과 사회라는 더 넓은 차원으로 확대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전조가 드리운 세계에 직면해 프로이트는 문화와 사회의 파국이 곧 닥치리라는 불안한 전망 속에서 사회신경증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개인 심리치료라는 한계를 넘어서 정신분석을 문명공동체까지 확대하려는 시도가 결코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디에서 그 통로를 찾아야 할지 그는 답을 알지 못한다.

“(…) 그런 치료를 집단에 강요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데 사회신경증을 아무리 정확하게 분석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문명 공동체의 병리학에 용감하게 착수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언급을 ‘소위’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던지는 당연한 말’로 가볍게 듣고 넘어가지 말도록 하자. 이 중요한 발언을 진정성 있게 발전시키고 실현시켜야 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다. 개인심리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프로이트의 이 용기 있는 발언은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낳는 정신적, 물리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다시 읽어야 한다.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신경증

프로이트 스스로가 던진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프로이트를 철저히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신경증 발생에서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은 얼마만큼 관련이 있는가? 신경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또는 누구를 위한 치료인가?

프로이트는 처음에 인간이 신경증에 걸리는 이유는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보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트라우마란 성인에 의한 성적 유혹(또는 추행) 또는 현실적으로 경험한 여러 종류의 충격적 사건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유혹설을 포기하고 환상설로 견해를 바꾼다. 히스테리 환자가 이야기하는 성적 추행의 사건이라는 것이 종종 실제로 존재하는 사건이 아니라 환자가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혹설(또는 외상설)과 환상설 중 어떤 것이 타당한 견해인가?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환상의 중요성에 더 무게를 두어 프로이트를 해석해왔고 개인의 환상이나 유전적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현실에서 (과거와 현재 모두를 포함해)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실제적인 외상적 사건들이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적으로 무시한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실제 죽음을 체험하고 견딜 수 없는 상실감과 불안에 빠진 사람의 경우 그의 경험을 단지 환상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라플랑슈라는 분석가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유혹설(외상설)과 환상설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현실적으로 경험한 외상(또는 유혹)을 바탕으로 인간은 환상을 발전시키는데, 신경증은 그러한 환상과 현실적 작업이 함께 작동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 대한 라플랑슈의 깔끔한 해결책은 이론적으로는 손색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추상적인 이야기만으로 정신분석이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외상설(유혹설)을 더 많이 적용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 환상설을 적용해 환자를 치료해야 할까? 아니면 두 이론을 적당히 취사선택하여 그때그때 환자에 대해 상황을 임기응변적으로 납득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치료인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를 생각해보자. 견딜 수 없는 불안과 분노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청년이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아 절망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친구는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친구를 만나는 것이나 동창회를 나가는 것도 즐겁지 않다. 그들을 만나면 무능력한 자신을 더욱 탓하게 되고, 알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과 대화할 때, 특히 사회에서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불안해서 말이 꼬이고 식은땀이 난다. 불안과 열등감 때문에 타인을 만나는 것이 싫어서 차라리 혼자 지내기를 원한다.

독자들이 상담가라면 이런 청년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무능력하다고 말하지 않는데 혼자 당신은 무능력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할 것인가? 좀 더 유능하고 생각 있는 상담가라면 “당신이 경험한 가정환경,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환경 탓에 당신은 고통 받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매우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라깡주의 분석가라면 이러한 접근은 자아 심리학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라깡주의 정신분석은 가능한 한 분석가의 개입을 절제하고 스스로 자신의 환상과 무의식을 분석하고, 억압된 당신의 충동 또는 주이상스를 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라깡주의 분석가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상징계를 벗어나 실재를 찾으라는 이론, 즉 충동(또는 주이상스)을 찾아야 한다는 교리를 따른다. 그런데 라깡주의 분석가의 말을 따라도 이 가련한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는 구체적인 지침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가 라깡주의 분석가로부터 듣는 대답은 없다. 침묵으로 일관하라는 것이 라깡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구체적인 대답을 주는 것은 자아심리학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라깡은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그 환자는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고 그리하여 더 큰 혼란과 분노에 빠질 뿐이다. 그에게 라깡주의 분석은 또 다른 소외와 절망의 경험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라깡주의 분석가는 당신을 억압하는 상징계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찾으라고 말할 수는 있다. 다른 ‘더’ 유능한 라깡주의 분석가는 욕망은 상징계적인 것이므로 욕망이 아니라 주이상스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도대체 욕망은 무엇이고 주이상스는 무엇인가? 이러한 이론적인 문제에 몰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라깡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젝이라는 라깡주의자(물론 지금은 자신은 라깡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가 등장해, 정신분석의 끝에 도달한다는 것은 ‘충동의 발현’이라는 라깡의 논제를 공산주의 혁명과 동일한 것으로 재해석한다는 걸 의미하게 됐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주이상스 또는 욕망을 밑도 끝도 없이 강조하는) 개인주의자 라깡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젝의 경우처럼 공산주의 혁명과 동일화된 라깡이 있다. 이것이 오늘날 가장 현대적인 정신분석학이라고 종종 평가받는 라깡 이론의 현주소이다.

반면 프로이트는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외쳤던 라깡과는 달리 우리의 비판적 사유에 적합하고 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프로이트는 당신의 신경증은 당신 탓일 수도 있지만 사회 탓이므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솔직하고 명쾌한 대답을 두려움 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깡이 타자에 의한 소외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깡의 타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개념이므로 우리의 절망한 청년은 라깡 이론으로부터 별다른 해결책을 얻을 수 없다.

정신분석 상담가로서 일을 하다보면 간단히 정리할 수 없는 수많은 복잡한 사례를 접하게 되는데,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유형화할 수 있다(물론 다른 유형화도 가능하다). 실제로는 타인의 탓인데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도 많은데 타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이 두 가지 경우가 섞이게 되는 때가 더 많다. 어떤 경우든 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세대 갈등의 문제에 접근할 때는 아들들보다는 부모세대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접근해야 진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경증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억압적인 타자 또는 사회 때문에 생겨난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이며 왜 문제인지를 명확히 지적하고 이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재해석

여기에서 오이디푸스 신화에 관한 한 논문 <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였는가: 그리스 드라마에서의 보충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논평(1953)>에서 드브뢰(Devreux)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확대하는 해석을 시도한다. 드브뢰가 말하는 다양한 보충사항 가운데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는 오이디푸스적 갈등과 아들의 공격성은 아버지 라이오스의 사디즘적 폭력으로 인해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드브뢰에 따르면 당시(1953)까지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보충적인’ 부분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드브뢰의 이러한 강조는 클라인과 그의 영향을 받은 분석가들인 소위 대상관계이론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파솔리니 감독의 <오이디푸스 왕>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드브뢰가 제시하는 해석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평온하게 길을 가던 오이디푸스를 먼저 공격한 것은 아버지 라이오스이고 오이디푸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라이오스와 격투하게 되었고 그를 살해했다. 드브뢰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서 이러한 점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책임을 아들에게 돌리려고 하는 성인들의 깊숙이 자리 잡은 필요”때문이다. 프로이트 이후에 지속된 이러한 축소된 해석은 “아마도 19세기 가족의 삶의 권위적인 분위기에 뿌리박고 있을 것이다.“ 드브뢰는 초기 프로이트가 초기 히스테리의 병인을 연구할 때 이러한 주제(성인의 공격성)를 실제로 다루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오이디푸스 이론이 보다 넓은 맥락으로 확대되어야 함을 주장한 바 있다. 드브뢰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정신분석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멜라니 클라인, 그리고 위니콧 등은 환경에 의해 어린 주체에게 가해지는 외상적 경험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신분석학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다 해결되었는가? 정신분석은 포괄적인 이론으로 자신의 이론적 지위를 되찾았는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인 심리치료이론에 머물고 있는 정신분석학은 방금 언급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다른 측면’을 놓치고 있다. 오늘날 3포 세대를 넘어 5포 세대(또는 7포세대)가 되어 버린 아들(자녀)들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로 인해 생긴 아들들의 정신 병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보다 진지한 문제 말이다. 미래에 대한 절망과 불안 속에서 자신이 만든 문제가 아닌 것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살아야 하거나, 사회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기성세대에 분노하면서 자신을 소진하면서 보내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혹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고 열등감 속에서 자신을 탓하는 청년들도 많이 있다.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자신에게 학비를 대준 부모님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루 빨리 좋은 직장을 얻어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막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세대 갈등은 불행하게도 아들들이 항상 패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기성세대, 즉 오이디푸스적 아버지의 힘은 막강하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공무원 연금 개혁만 보아도 그렇다. 국민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공무원 연금 개혁을 단행한다고 하지만 (통과되리라고 예상했지만 결국 유보된) 공무원 연금개혁안도 결국 노회한 오이디푸스적 아버지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정되었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국민연금 역시 후세로 갈수록 더 많이 내고 더 적게 받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반면 청년세대를 위한 투자 및 복지지출은 매우 인색하다. 많은 정치인들은 유권자 수가 더 많은 노년층을 위한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만 젊은 세대들을 위한 정책, 즉 일자리 창출이나 교육 투자(가령 등록금 인하) 등, 후세대를 위한 투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이는 국민연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과 개인의 연금보험 부담률이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 사학연금과 동등해질 때까지, 그리고 후세대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문제 중 하나인 노인 빈곤의 문제를 무시해서도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1위이다.

 

저항의 필요성

세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피케티의 대답은 명쾌하다. 세대 갈등과 계층(계급) 갈등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말고 계급(계층) 간의 불평등을 해결해 나가는 가운데 계층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진국의 경우] 분명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더 부유하다. 하지만 실제로 각 연령집단 내 부의 집중은 전체 인구의 부의 집중과 비슷할 정도로 크다. 즉 통념과 달리 세대 간 전쟁은 계층 간 전쟁을 대체하지 않았다.” 세대 갈등이 실체 없는 갈등이라거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후세대가 기성세대에 의해 희생당하는 현재의 잘못된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부유한 아버지’를 둔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즉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하는 일에 동의하는 대가’로 안락한 삶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갈 곳 없이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는 대부분의 가난한 아들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거리에서 포악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아버지를 만난다. 이때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굴욕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신경증 또는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저항하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대학생, 청년 운동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누가 감히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청년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공정한 사회’의 수립을 위해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봄처럼 아버지에게 저항해야 한다. 아버지 라이오스가 아들을 위해 자신의 쾌락과 특권, 안락한 삶, 그리고 화려한 소비생활을 자발적으로 양보할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저항 방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 등록금 인하 또는 면제 운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열려 있는 문제이지만 유럽의 많은 국가들처럼 자녀들의 교육은 국가가 가능한 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최근 독일에서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기민당이 대학등록금을 다시 도입하려고 했을 때 독일 대학생들은 격렬하게 항의시위를 했으며, 결국 헌법재판소는 등록금 도입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사례는 다시 한 번 새겨볼만하다. 또한 (구직 노력을 전제로 한) 청년실업수당, 직업재교육 및 주거수당 등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같이 경제적으로 풍부한 시대에(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 13위 국가다) 돈이 없어서 공부도,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할 수 없는 세대가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알바를 할 필요가 없는 학생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몇몇 운 좋은 우리나라의 아들들이 세습재산으로 아버지의 부를 물려받듯이 대부분의 운 없는 아들들은 자신의 가련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불평등과 절망을 다시 자신의 아들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등록금 인하 또는 면제 운동은 세대 갈등을 청년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동시에 계급 간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등록금 인하 또는 면제를 위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청년들이 노력한다면 자녀를 둔 기성세대들이 이러한 운동에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 상담가로서 필자는 단언컨대 오늘날 심리문제(자살, 불안, 열등감, 우울 등 대표적인 현대적 심리문제)의 70~80%는 사회적 문제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적 욕망’이 좌절되어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또는 인격을 짓밟는 사회적 열등감과 절망 때문에 사람들은 우울과 불안에 빠지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자살할 수 있다.

요컨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들들(청년들)이 라이오스의 ‘은혜’를 갈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대의 권익, 그리고 ‘세대 간 정의’의 실현을 위해, 그리고 라이오스와는 달리 힘이 없지만 아들들을 위해 희생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부모)을 위해 지금이라도 무언가 시작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홍준기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라캉과 현대 철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라캉과 현대철학> 등이 있다. 역서로는 <라캉과 정신분석 임상: 구조와 도착증>, <강박증: 의무의 감옥> 등이 있다.

 

1) Das Unbehagen in der Kultur. Studienausgabe Bd XI. Frankfurt am Main: Fischer, p. 218.
2)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 속의 불만>(열린책들, 1997), 339~340쪽.
3) Georges Devreux, "Why Oedipus Killed Laius: Note on the Complementary Oedipus Complex in Greek Drama", inthe International Jouunal of Psychoanalysis Vol. 34, 1953.
4) Rolf Vogt, Psychoanalyse zwischen Mythos und Aufklärung, Frankfurt am Main: Fischer, 1989, p. 134.
5) George Devreux, ibid., p. 132.
6) 피케티, <21세기 자본>, 296~297.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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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연재 시리즈**
 
1회: 불안 -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철학)
2회: 관계 - 이성민(도서출판b 기획위원, 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철학)
3회: 돈 - 김석(건국대, 철학)
4회: 성숙과 정체성 - 백상현(수원대, 철학)
5회: 증오와 폭력 - 이만우
6회: 사랑 - 정지은(홍익대, 미학)
7회: 외모 - 정경훈(아주대, 영문학)
8회: 직업 - 이성민(도서출판b 기획위원, 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철학)
9회: 중독 -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철학)
10회: 무관심 - 김서영(광운대, 철학)
11회: 지식 - 김소연(연세대, 영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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