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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종족주의
친일 종족주의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9.08.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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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에서 내려진 일장기_사진출처:뉴스1

‘종족주의’라는 대단히 제국주의적인 용어가 갑자기 소환돼 포털 검색어 상위에 오르락거린다. 평소에도 친일적인 ‘소신’ 발언으로 일각에선 ‘신(新)친일파’로 불려온 이영훈 등 일군의 학자들이 쓴 『반일 종족주의』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올라, 최근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에 성공적인 기획사례로 꼽힐 정도다.  

우익언론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청개구리처럼 신이 나서 『반일종족~』를 띄우려 날뛰고 있다. 한 보수언론은 이 책을 시대정신에 부응한 뛰어난 기획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혹자는 언론 보도에 공감해서, 혹자는 그냥 궁금해서 책을 찾았을 게다. 저자들은 비판적인 목소리에 대해 자신들이 수행한 수십 년간의 성과물에 대한 모욕이라며 민·형사소송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허접한 연구에 ‘명망’ 높은 학자들이 수십 년간 열정을 쏟았다는 자체도 놀랍지만, 그 결과물이 일본 제국주의 대학 또는 연구소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기에 가히 경악스럽다.

그들은 왜 이리 확신을 가지고 일본 정부의 가증스러운 주장을 애써 정당화하며, 피해자들의 깊이 팬 상처에 생채기를 내는 것일까? 그들의 견해는 범죄국인 일본보다도, 또 일본에 협조한 친일파보다도 교묘하고 사악하게 느껴진다. 학술연구라는 미명을 내세워, 일본의 식민지배논리를 정당화하고, 성노예, 강제노역 등 일본의 범죄행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및 일반 시민들의 주장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훼함으로써 인류보편적인 인간존엄성 회복 노력을 한낱 ‘종족’의 기질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  

‘종족’이나 ‘종족주의’라는 용어는 대단히 오리엔탈리즘적이다.  19세기 제국주의에 봉사한 지식인들은 종족 구분 짓기에 나서, 자신들의 기준으로 각기 다른 국민과 민족의 등급을 매기고 성향과 기질, 능력을 자의적으로 규정지었다. 명저 『자유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자국이 식민지배한 인도인이나 중국인에 대해서 “책임감이 없어 자유를 구가할 권리를 부여해선 안 된다”라고 주장한 것이나,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창한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을 서구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격상한 반면, 자국의 속국으로 여겼던 ‘조선’에 대해서는 미개국이라고 비하한 것이 그 예다. 

유키치의 저서들에는 조선인에 대해 ‘완고하고 고루함’, ‘고루하고 편협함’, ‘의심 많음’, ‘구태의연’, ‘겁 많고 게으름’, ‘잔혹하고 염치없음’, ‘거만’, ‘비굴’, ‘잔인’ 등 수많은 비과학적인 묘사들이 언급된다. 이 같은 조선인에 대한 표상(表象)은 식민지에 대한 다양한 보고서에서 반복되고, 학술적 텍스트 속에서 언급되는 동시에 실제 통치행위 속에 참조됨으로써 실체화돼 갔다. 아시아에서 문명의 ‘우두머리’가 된 일본과 미개의 ‘고루한’ 인접국가인 조선과의 경계를 구분 짓고, 결국 스스로 자국을 대표할 수 없는 조선을 대신해서 일본이 조선을 계몽시켰다는 도착증세를 가지게 했다.
종족주의를 내세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이처럼 일본에서 재복제된 것은 일본이 ‘아시아’라는 자신들의 지정학적 정체성을 망각한 채 스스로 서구를 흉내 낸 데서 기인한다. 우리 스스로를 ‘반일 종족주의’란 해괴한 용어로 규정한 ‘기획물’은 대체 어떤 맥락에서 나왔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이웃국가들을 짓밟기 위해 위계화한 ‘종족주의’를 지금 일본과 다툼을 벌이는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학자들의 저서에서 다시 맞닥뜨리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우리에게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줬는데도, 일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일본의 ‘영광스러운 유산’에 취해 있다.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들로부터 부과된 도덕을 지배자들보다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1)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적처럼, 이미 오래전에 드러난 일제의 범죄행위로 인한 상처의 고름을 빼내려 하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일제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케시마(독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의 극우세력이 든든한 친구로 남아 있다. 이에 더해, 한국사회의 공론장을 지배해 온 이 땅의 수구 논객들과 언론들이 변함없는 후원자로서 그들이 힘들고 지칠 때 격려해 주고, 이끌어주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말을 빌려, 나는 그들의 일탈을 ‘친일 종족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그들의 주장에 미혹(迷惑) 당하는 현실은 합리적 비판능력의 부재와 역사관 혼란에서 기인한다. 늘 그렇듯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9월호에도 우리의 비판능력과 사유의 지평선을 넓고 깊게 확장해주는 글들로 가득하다. 

감히 독자 여러분에게 청한다면, <르디플로>와 함께 인간 존엄성이 충만하고 인류애가 넘치는, 코스모폴리탄 사회로 향하는 지성의 창(窓)을 활짝 열고서, 우리 사회의 1차원적 ‘종족주의’ 잔재를 훌쩍 털어버리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1) T.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 지성사, p.227, 2001년(원서 초판: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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