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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은 멜로?!
[이정옥의 문화톡톡]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은 멜로?!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19.09.23 13: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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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Narrans와 이야기의 홍수시대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본능적이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 당신이 접한 이야기의 양을 산술적으로 계산해보시라.

우선, 당신이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물론 혼족이 대세인 시대에 무슨 시대착오적인 일반화의 오류냐는 냉소적인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면대면으로 만나지 않는 혼족이라 해서 결코 타인과의 교류를 차단한 채 무인도에 갇혀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을뿐더러,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혼족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접할 확률이 높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는 각종 통신매체를 통해 수시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넷에 오른 수많은 기사들을 검색하며 정보수집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그 속에 담겨진 이런저런 이야기를 탐색하고 있다. 게다가 업무에 지쳐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늦도록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웹소설과 웹툰 등을 섭렵하며 이야기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를 즐기는 인간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전해들은 이야기에 이리저리 살을 붙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말 하려는 욕망이 강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로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을 Homo Narrans라 한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대로, 인간에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전달하려는 욕망과 능력이 없었다면 지금도 나무열매와 그늘을 찾아다니던 맹수와 다름없는 동물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인원에 가까웠던 인간이 오늘날과 같이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Homo Sapiens(지혜로운 사람)로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즐기는 언어능력을 가진 Homo Narrans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1)

이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욕망을 지닌 Homo Narrans가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터넷을 놀이공간으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Digital Ludens(2)와 만나 디지털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식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플랫폼에 접속하기만 하면 누구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놀이처럼 향유할 수 있게 되어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야기의 홍수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야기의 홍수시대에 가장 떠오르는 장르는 단연 로맨스이다. 웹툰이나 웹소설의 로맨스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 OSMU(One Source Multi Use)의 상업화에 성공한 이래 웹시장이 확대일로에 있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추세이다. 사극풍의 로맨스 <구르미 그린 달빛>(윤이수 작)이나 오피스 로맨스 <김비서가 왜 이럴까>(정경원 작)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그러나 로맨스 열풍의 원인을 단순히 스낵 컬쳐(2) 시장의 확대라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한정지을 수만은 없다. 오히려 사랑이 빠르게 상품가치로 전환되는 디지털시대에 역설적으로 로맨스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회적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애를 하고 싶어도 탈연애를 선택해야 하는 젊은 여성들의 고달픈 현실을 고려하면, 로맨스의 열풍은 사랑의 서사를 소비하고픈 독자들의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가 반영된 현상이다.

 

로맨스와 멜로드라마, 중독성 강한 사랑의 서사

사랑의 서사로 분류되는 장르에는 로맨스와 멜로드라마가 있다. 물론 SF와 미스터리, 판타지 등을 비롯한 모든 대중서사에도 사랑의 서사가 들어 있지만, 그 주제(thema)는 각각 과학과 추리, 환상 등이다. 사랑이란 주제를 서사의 생명력으로 삼는 장르는 로맨스와 멜로드라마 둘 뿐이다. 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로맨스는 물론 멜로드라마 역시 지금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해 왔다.

사랑은 개인의 본성에 대한 발견과 타자를 향한 열정의 결합을 통해 고양되는 황홀한 충만감이다. 사랑의 감정은 중독성이 강하여 모두가 사랑의 묘약을 구하려 찾아 나서지만, 신기루와 같아 다가갈수록 달아나 번번이 공허함과 비애감만 남을 뿐이다. 때문에 현실의 사랑은 언제나 쌉싸름한 반면, 대중서사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너무나 달콤하고 달콤함이 남긴 황홀한 비애감은 전율에 사로잡힐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로맨스와 멜로드라마가 사랑을 대하는 관점과 방식은 전혀 다르다. 로맨스는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추구하지만, 멜로드라마는 낭만적 사랑을 도덕규범으로 규율한다. 낭만적 사랑은 언제든 당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적 미덕의 경계선을 넘어 성적 방종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사회를 타락시킬 해악의 위험성이 내재된 개인의 사랑을 도덕적 윤리라는 지침으로 통제하는 계몽주의적 산물이다. 문제는 규율의 대상이 항상 여성이라는 점에 있다.

이 두 장르는 오랜 시간 혼종과 중첩을 거쳐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런 까닭인지 이 둘 사이를 구별 짓기 위한 학술적 논의는 매우 일천한 편이다. 학술적 논의가 빈약하니 모두가 동일한 언어로 로맨스와 멜로드라마를 말하지만 정작 기표만 남고 내포된 기의는 모래와 같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로맨스와 멜로드라마에 대한 개념마저 착종되어 작가와 독자 사이에 기대지평을 공유하는 최소한의 관습이나 가이드라인조차 불분명해져 자의적이고 공허한 기표만이 난무할 뿐이다.

 

로맨스와 멜로드라마 사이, 그 어디쯤에서 길을 잃다

최근 믿고 보는 로맨스의 남주로 급부상한 배우, 정해인이 열연한 세 편의 드라마와 영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JTBC 금토 드라마, 2018.3.30.~5.19.)<봄밤>(MBC 2019.05.22.~2019.07.11.) 그리고 <유열의 음악앨범>(2019.8.28. 개봉)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봄밤>은 안팍석 감독과 김은 작가가 손을 잡고 연이어 만든 드라마이다.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서 만들어갈 진짜 연애를 그리겠다는 감독의 포부가 담긴 전자나,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30대 여성이 오랜 연인과 서로의 관계를 되돌아보며 새롭게 찾아온 사랑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후자 모두 확연하게 로맨스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서사는 두 남녀 주인공이 일궈나가는 감정선 보다 그들의 사랑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사회적 통념이나 가족공동체의 안정과 이해를 중시하는 가부장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친구의 동생인 연하남(서준희)과 친구의 누나인 연상녀(윤진아)20년이란 세월동안 유사가족 공동체로 지낸 사이이다. 분명 이 둘 사이의 연애와 결혼은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마치 사회 통념상 용납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규정한다. 딸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엄마)의 사랑은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독립체로 성장한 30대 중반을 넘긴 딸의 연애와 결혼은 물론 프라이버시까지 간섭하고 침해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한다. 더욱이 직장에서 일 잘하는 능력자로 인정받는 여주는 4살 어린 연하남에 의지하여 부모의 통제와 직장 내 남성들의 성추행, 전남친의 데이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동적 인물로 그려져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봄밤>

이를 의식한 결과인지, 후속작 <봄밤>에서는 미혼부(유지호)와 사랑이 없는 진부한 연애에 지친 30대 중반의 직장 여성(이정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여주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연애 감정에 충실한 양상으로 전환됐다. 그럼에도 엄마에서 아버지(이태학)로 역할만 바뀌었을 뿐 자식에 대한 부모의 통제와 규율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내세워 평범한 가정의 미혼부인 남주를 압박하는 전 남친(권기석)과 그의 아버지(권영국)가 만드는 대결구도는 돈과 사랑, 즉 부자 남자와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남자 중의 택일이라는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이분법으로 귀착된다. 두 사람의 감정 선에 집중한다는 의도겠지만, 지루하게 둘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주의 더딘 행보에 “30년 전 순정드라마 주인공보다 더 답답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로 시대착오적이다.

한마디로 두 드라마는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은 멜로인, 로맨스의 외피를 입은 멜로드라마이다. ‘이 시대 진정한 로맨스를 만들겠다고 투지를 불태우던 감독은 드라마에 공을 많이 들여 디테일이 풍부하고, 연기인지 실제 연애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도 돋보였다. 그럼에도 ‘Stand by your man’을 주제음악으로 선정한다거나 연하남에 의존하는 사랑의 서사는 연애를 하고 싶어도 탈연애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심지어 딸에 대한 애착이 강한 엄마(김미연)를 '미개인'이라고 비난하는 대학원생 아들(윤승호)의 발언은 다분히 여성 비하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낭만적 사랑의 남성적 전유가 여성의 삶과 사랑을 억압하고 규율하는 멜로드라마의 발생 기원이자 장르 문법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유열의 음악앨범>

최근 개봉된 <유열의 음악앨범>은 로맨스와 레트로 감성을 가미한 멜로드라마를 표방한 영화이다. 그러나 로맨스로 분류하기에는 두 사람의 연애 감정이 번번이 단절되는 사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사적 해명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멜로드라마로 규정하기에는 두 사람의 연애 감정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시대적 도덕감정이나 억압 기제가 충분치 않다.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90년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개로 시작된 사랑을 어렵게 이어가는 동력으로 삼아 90년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레트로 감성에 호소하고 있지만, 이를 지탱할만한 서사적 힘은 매우 약하다. 일찍 지병으로 죽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미수제과와 얽힌 여주(미수)의 고단한 생활의 속내나 의도치 않게 친구의 죽음에 연루되어 인생이 꼬여버린 남주(현우)의 어두운 과거사는 압도적인 감성에 묻혀버려, 감성을 촉발시키는 원천으로서의 서사적 힘을 잃고 말았다. 레트로 감성에 취해 로맨스와 멜로드라마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예쁜 누나와 연하남의 달달한 로맨스”, “수채화처럼 투명한 파스텔톤의 사랑을 그린 순수멜로”, “일상적 여성들이 경험하는 치열한 현실 묘사로 사랑이 달콤해지는 덕분에 단순한 멜로극이 아닌 사회 문제작”, “썸보다 연애에 초점 맞춰 빠르게 전개되는 멜로드라마”, “애절하고 설레는 감성 멜로” ·····

 

장르의 개념과 문법은 작가와 독자, 평자 사이에 공유하는 최소한의 관습이자 가이드라인이지만, 드라마나 영화를 홍보하는 기사와 평론이 쏟아내는 언설은 도리어 시청자나 관객들의 기대지평에 혼란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명확하지 않은 개념과 의미를 미사여구로 포장한 무의미한 수사에 불과하다. 

심지어 <유열의 음악앨범>에 대해 초가을을 적시는 단비와 같은 감성멜로라며 홍보 일색이던 평론가들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평판이 돌자, “화려한 볼거리와 감각을 자극하는 SF나 스릴러와 같은 장르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로맨스나 멜로는 이미 한물 간 장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이는 이 영화를 10번 혹은 20번 이상 보고 또 봤다는 광팬들의 고백을 단지 배우 정해인을 향한 팬덤으로 치부해버린 채 젊은 여성들의 감정구조를 외면한 단견일 뿐이다.

배우 정해인은 로맨스 남주가 갖춰야 할 기본기인 훈남 외모에, 데이트 폭력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무해남과 절대로 바람을 피우거나 배신할 것 같지 않은 조신남의 이미지까지 장착한 이른바 연애를 부르는 로맨스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로맨스를 꿈꾸지만 멜로드라마와 같은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감정구조를 온전하게 읽을 때 비로소 진정한 로맨스가 탄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맨스와 멜로드라마에 대한 학술적 담론이 필요하다.

 

글: 이정옥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대중서사학회 회장 및 편집위장 역임. 관심사는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대중서사적 관점으로 세상 관찰하기가 취미.

 

(1)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 33-41쪽 참조.

(2) Digital Ludens는 디지털과 놀이하는 인간을 뜻하는 Homo Ludens(J. 하위징아의 개념) 의 합성어로 디지털 자료를 활용하여 창조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3) 스낵 컬쳐(snack culture)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즐기는 스낵처럼, 5~15분 이내 의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웹툰과 웹소설 웹드라마 등의 문화 콘텐츠를 가리킨다.

* 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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