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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애드 아스트라> ― 아버지의 이름이 남긴 세 가지 죽음과 자아 성찰의 여정
[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애드 아스트라> ― 아버지의 이름이 남긴 세 가지 죽음과 자아 성찰의 여정
  • 서곡숙(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0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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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F영화의 세 가지 질문: 미래사회, 인간, 진실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SF영화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미래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둘째, 인간이란 무엇인가? 셋째, 진실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는 테크노크라시가 지배하는 미래의 우주론적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블레이드 러너>(1982)는 복제인간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전복을 보여준다. <매트릭스>(1999)는 AI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본질을 자유와 인식에서 찾고 있다.

<애드 아스트라>(Ad Astra, 2019)도 이러한 세 가지 질문을 차례로 던진다. 미국 육군 소령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한 리마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실종된 아버지를 영웅이라 믿으며 능력 있는 우주비행사로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인류를 위협할 전류 급증 현상인 써지 사태가 아버지가 벌인 위험한 실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로이는 써지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적 명령과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사적 욕망으로 우주로 향하게 된다.

 

2. 영웅 아버지의 이름을 향한 강박의 목소리, “다른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애드 아스트라>에서 그리는 미래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이 영화에서 그리는 미래사회는 첨단과학문명이 발달하였지만, 일/가정 혹은 공적/사적 삶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재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영웅 아버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우주 비행사가 되는 공적 삶에만 매진하여 아내와의 사적 삶을 포기한다. 로이는 심박수 정상 유지라는 우주비행의 자격 요건을 위해서 자신의 심장에 무리를 주는 일들은 모두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과거의 상실감과 아내와의 결별이라는 현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자 노력한다. “다른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에게 계속 되뇌는 이 말은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고자 무리한 인생을 살아가는 로이의 강박관념을 더욱 드러낸다.

이 영화는 미래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동시에 보여준다. 첨단과학문명의 발달로 태양계 내에서의 짧은 우주여행이 가능해지고 생활이 편리해졌다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이지만, 인류의 운명이 파멸로 치닫는 위기 상황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디스토피아이다. 주인공이 지구에서 벗어나 우주까지 공간을 확장시키며 공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지만, 사실상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와 아내와의 결별이라는 사적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마치 SF영화의 표피를 쓴 가족드라마에 가깝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이러한 미래사회에 대한 모습과 주인공의 갈등을 익스트림롱숏과 클로즈업이라는 극과 극의 대비로 보여준다. 로이가 사고로 추락하는 장면에서, 로이의 시점숏으로 정신없이 추락하며 바라보는 우주의 광경을 익스트림롱숏으로 보여준다. 우주선이 정상궤도에서 벗어나는 장면에서는, 침착한 로이와 당황한 우주비행사들의 대비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하고 심장 박동을 재는 장면에서는, 그가 우주비행사로서의 임무와 아내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서의 갈등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3. 아버지 이름의 어두운 그림자, “아버지의 죄는 결국 아들의 고통으로 다가오지.”

<애드 아스트라>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무엇인가? 주인공은 지구의 파멸을 초래하는 문제가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게 되면서 우주비행을 위한 심박수 검사에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로이는 아버지가 영웅이 아니라 명령에 불복하는 부하들을 모두 죽인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이도 마찬가지로 자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가로막는 동료 우주비행사들을 모두 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괴물이 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가 누구인지, 매트릭스가 무엇인지, 자신이 ‘그’인지라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진실에 도달할수록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애드 아스트라>에서는 주인공이 진실을 알게 될수록 자신의 힘을 상실하게 되고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로이는 영웅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자신의 사적 영역을 희생시킴으로써 ‘당신은 일밖에 관심이 없지’라며 아내가 떠나버리게 만든다. 지구의 미래가 자신의 아버지 손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로이의 공적 문제와 사적 문제가 서로 연결된다. 결국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고자 한 로이가 도달한 진실은 아버지처럼 자신도 공적으로는 괴물이며 사적으로는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죄는 결국 아들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의 중반부에서는 끔찍한 진실에 직면한 로이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태를 색채의 대비, 반영 이미지,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로이와 헬렌이 복도를 거니는 장면에서, 과거의 진실을 알게 되는 로이의 급격한 심경 변화를 붉은색에서 검은색으로의 변화로 보여준다. 로이가 몰래 우주선으로 잠입하기 위해 지하터널을 통과하는 장면에서, 물속에서 자신의 손발이 헬멧에 비치는 모습은 법의 질서에서 벗어난 무의식의 발로를 표현한다. 아버지의 과거 영상과 아들의 현재 영상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의 질서에 대한 순응과 저항을 동시에 드러낸다.

 

4. 아버지의 이름이 남긴 허망한 실체, “날 실패자로 만들지 마라”

<애드 아스트라>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로이의 아버지는 임무에 집중하고 불가능을 극복하기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거부하고, 실패자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인간들과의 삶을 거부하고, 우주 속으로 떠난다. 반면에 아들 로이는 과거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가족을 거부했지만, 아버지의 실체를 직면하고 나서는 공동체와 가족 속으로 다시 들어감으로써 아버지와는 다른 행로를 걷게 된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처럼 휴머노이드, 복제인간, 기계인간 등 과학기술문명의 발달로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진 상황에서 인간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로이의 아버지는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를 찾는다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30년간 아들을 버렸으며 자신에게 아들도 아내도 의미 없다는 말을 로이에게 내뱉는다. 이에 로이는 자신은 그래도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답변한다. “불가능을 극복해야 돼.”, “날 실패자로 만들지 마라.”는 아버지의 말은 결국 아버지도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의 무게에 눌려 자신을 상실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아버지의 좌절과 아들의 각성을 반영 이미지, 다가가는 카메라, 익스트림클로즈업으로 표현한다. 우주로 떠나가려는 아버지를 로이가 붙잡는 장면에서, 롱숏에서 클로즈업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카메라를 통해 아버지의 좌절과 로이의 애착을 함께 보여준다. 이후 아버지가 우주로 사라지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익스트림클로즈업에서 익스트림롱숏으로 점점 멀어짐으로써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려 하는 미약한 인간의 모습과 가족의 슬픔을 표현한다. 해왕성이 로이의 헬멧에 비치는 장면에서, 로이가 아버지의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는 각성을 나타낸다.

 

 

5. 광활한 우주에서의 자기 성찰의 이야기

<애드 아스트라>는 SF영화의 세 가지 질문을 모두 제기하면서, 시간의 변화와 공간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가족드라마를 우주영화로 만들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결론을 되풀이한다. 즉,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을 보여주며, 일보다 인간(특히 가족)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애드 아스트라(Ad Astra)는 ‘별을 향해서’에서 ‘자아를 향해서’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최대와 최소의 결합을 보여준다. 우주로 가는 길이 영웅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가는 길이었다면, 자아로 가는 길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찾는 길이다.

이 영화는 아버지라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이율배반의 이름을 만들고 지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이름이 의미하는 상징계의 억압이 주인공을 다시 우주 속으로 귀환시키지만, 결국 억압과 결핍의 순환을 겪으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로이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하나의 법질서로 인해 잠식되어 버려,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로 자신을 배제시키려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였다. 하지만, 초자아의 법칙 속에서 편집증적 상태에 빠진 주인공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영웅/괴물의 변형된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한계와 욕망을 깨닫게 된다.

<애드 아스트라>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세 가지 죽음을 겪는다. 로이는 처음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우주에서 영웅으로 죽음을 맞이하여 ‘허상의 죽음’을 겪고, 나중에 아버지가 살아 있으며 영웅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상징적 죽음을 경험하고, 마지막에는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죽음 충동으로 나아감으로써 ‘실재적인 죽음’을 겪는다.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의 경계에서 선 주인공은 상징적 질서를 대리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초자아의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나고, 사회적 실패와 내면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죽음 충동에서 자신의 삶 충동으로 나아간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서곡숙

영화평론가. 비채 문화산업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서울시 영상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학술출판분과 위원장, 르몽드 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머지 자료>

 

* 기존의 SF영화와는 다른 결

- 기존의 기념비적 SF영화들이 보여줬던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심오한 철학적 주제에서 벗어난 <애드 아스트라>

- 브래드 피트의 최근 행적과 오버랩. 섹시한 매력남이면서 성실한 남편, 자상한 아버지라는 완벽한 이미지가 추락-> 알콜 중독, 마약 중독-> 최근에 재개.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브래드 피트의 행로를 보여줌.

<애드 아스트라>는 기존의 기념비적 SF영화들이 보여줬던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심오한 철학적 주제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러한 쾌락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기대를 배반한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는 브래드 피트의 최근 행적과 오버랩된다. 그는 안젤리나 졸리와의 이혼 과정을 통해 섹시한 매력남이면서 성실한 남편, 자상한 아버지라는 완벽한 이미지가 추락하면서,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등 험난한 시간을 보낸 뒤 최근에 재개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상실감과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브래드 피트의 행로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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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 아스트라>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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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한, 「상징적 죽음과 아버지의 이름 - <실미도>, <태극기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을 중심으로 -」, 『아시아영화연구』, 제8권 2호,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2016년, 7-34쪽.

* [강성한] 상징적 죽음과 아버지의 이름 - <실미도>, <태극기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을 중심으로 -: 주인공의 아버지가 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선택하는가? 인물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바로 상징적 질서를 대리하는 ‘아버지의 이름’. 영웅으로 회귀하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닮고자 하는 노력. 영화에서의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의 경계 지점. 심리적으로 내부적 마령과의 싸움. 사회적 실패를 처벌하는 초자아의 통제와 억압. 결핍된 부성적 자아상은 인물의 욕망을 억압하고 가학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을 부추김. 라캉은 모든 충동은 죽음충동이라고 말함.

[어릴 때 아버지가 우주에서 영웅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나중에 살아있는 아버지는 영웅이 아니라 살인자(괴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게 됨. 나중에 실재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자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투영해서 보게 됨. 인물들은 죽음 충동을 통해서 삶 충동으로 나아감.]

이 논문은 네 편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선택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바로 상징적 질서를 대리하는 기표인 ‘아버지의 이름’이다. 네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는 ‘아버지의 변형’들과 동일시하는 자들이다. 주인공들이 놓인 삶의 환경들이 척박하면 할수록 더 강력한 권력으로 회귀하는 실재적 아버지를 그들은 닮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에 의해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의 경계 지점에 위치지어진다. 영화의 공통된 갈등구조에는 외부에서 전개되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대응해서 주인공들은 심리적으로 어떤 내부적 망령과의 시원적 싸움을 실행한다. 그 내부적 망령은 귀환하는 실재적 아버지이다. 그래서 아버지이름의 ‘아바타’인 그들은 퇴행한다. 그리고 모성적 초자아로 고착된다. 그들의 자아이상의 붕괴는 해체적 불안을 통해서 훨씬 더 무자비하고 혹독하게 ‘사회적 실패’를 처벌하는 ‘모성적 초자아’의 통제를 수반한다. 그리고 결핍된 부성적 자아이상은 가학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을 부추긴다. 라캉은 모든 충동은 죽음충동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침내 죽음충동을 통해서 삶충동을 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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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 「‘아버지의 이름’을 향한 욕망의 목소리: R. 슈트라우스 ≪엘렉트라≫(1909) 비평」, 『이화음악논집』,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제20권 2호, 2016년 6월, 1-85쪽.

* [박정숙] ‘아버지의 이름’을 향한 욕망의 목소리: R. 슈트라우스 ≪엘렉트라≫(1909) 비평: 그녀가 가진 강력한 육체도 물질성도 파괴적인 에너지도 모두 조성 질서라는 하나의 법 안에 잠식되어 버림. 그녀가 가진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로 자신을 배제시키려는 법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 세기말이라는 특정 공간 안에서 드러나는 권력관계의 문제, 가치체계의 문제.

[인물의 육체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하나의 법질서로 인해 잠식되어 버림. 자신의 심장박동까지도 통제하고자 하는 비정상적 행위들은 극한점에 다다르게 됨.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로 자신을 배제시키려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음.]

이 논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오페라 ≪엘렉트라≫(Elektra, 1909)의 해석에 관한 연구로서,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에 깊이 박혀있는 가부장적 가치체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페미니즘 비평의 일환이다. ≪엘렉트라≫는 20세기 초 공연되었을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음악계에서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혁신성과 모더니티를 수용한 대표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주인공 엘렉트라는 시종일관 과도하고 격렬하며, 혐오스럽고 히스테릭하다. 세기말의 부정적 이미지들을 오롯이 입고 있는 엘렉트라는 비논리적이고, 이성이란 없는 감정적 존재이며, 퇴행적인, 마치 짐승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음악은 격렬하고 과잉된 불협화와 과도한 반음계적 진행 속에 달려 가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조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녀가 가진 강력한 육체도 물질성도 파괴적인 에너지도 모두 조성 질서라는 하나의 법 안에 잠식되어 버리고 만다.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위한 화성적인 실험들을 감행하고 전통적인 조성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였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분명한 조성의 토대를 마련해 두고 종지를 향한 움직임에 강렬함을 제공하면서 그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엘렉트라는 그녀가 가진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로 자신을 배제시키려는 법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본 연구자는 ≪엘렉트라≫를 세기말이라는 특정 공간 안에서 생성된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곳에서 드러나는 권력관계의 문제, 가치체계의 문제 등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고자한다. 세기말 사회적 불안과 도덕적 관념과 질서의 혼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에 위기를 느낀 남성 극작가와 작곡가가 자신들의 위기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만의 사회적 일치를 강화하기 위해 허구적인 여성 주인공을 어떻게 설정하고 이용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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