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이정옥의 문화톡톡] 로맨스,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와 그 변주
[이정옥의 문화톡톡] 로맨스,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와 그 변주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19.10.28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로맨스의 다층적 의미와 낭만적 사랑
 
살아있는 것들은 변화한다. 동물이나 식물처럼 모든 생물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게 마련이다.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이래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로맨스 역시 살아 있는 생물처럼 역사와 사회문화의 결에 따라 부단히 변화해왔다. 로맨스가 결코 단일한 의미로 고정되지도, 하나의 양상으로 고착되지도 않은 이유이다.
 
로맨스(romance)의 어원은 지방 또는 지방어라는 뜻이다. 중세 유럽의 교양 있는 엘리트들은 라틴어를 공유했던 반면, 로맨스를 처음 전파한 음유시인들이 프랑스 사투리를 사용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12세기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탄생한 로맨스는 점차 유럽에서 연애의 학습과 감정교육을 위한 소설(novel)의 양식으로 정착됐고, 이후 연극과 영화, TV드라마 등을 넘어 오늘날 웹툰과 웹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로 전유돼 왔다. 또한 로맨스는 오랜 시간동안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시대변화와 사회문화의 변동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로맨스의 의미는 다층적으로 축적돼 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해석되는 방식은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로맨스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개인 차원의 사랑 또는 연애 행위, 한 시대나 한 집단에서 통용되는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연애방식이나 사랑에 관한 관념, 연애나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문학(fiction)으로서의 로맨스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층위는 상호 침투하며,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낭만적 사랑이란 표현이 romantic love를 한자어로 번안한 것이니, 로맨스는 개인, 문화, 문학 층위의 로맨틱 러브의 판타지를 아우른다.
 
로맨스의 의미가 다층적이라는 점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남자는 로맨스를 꿈꾸고 여자는 로맨스를 읽는다는 말이 새삼 낯설어진다. 너무 익숙하게 들어 왔던 탓인지 보편타당한 명제처럼 들리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전자는 개인 차원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후자는 문학으로서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지시한다 의미의 층위가 서로 어긋나는 모순적인 명제가 보편적인 관념처럼 통용되는 배경에는 사랑의 비대칭성, 다시 말해 로맨스를 향유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위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로맨스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여기에 한정된 평면적인 접근이 아니라, 낭만적 사랑이 탄생된 배경은 물론 세 가지 층위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가 역사와 시대에 따라 변주되는 양상에 대한 입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일차적으로 낭만적 사랑의 발명에 대해 살펴보자.
 
 
2. 우아한 귀부인을 향한 흠모, 낭만적 사랑의 발명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은 암흑의 시대로 알려진 중세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럼에도 중세가 신과 인간의 사랑을 중시한 나머지 인간의 사랑에 관해 혹독했던 사랑의 암흑기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무덤
나란히 합장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모습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인 엘로이즈와의 비극적 사랑은 유독 사랑에 엄격했던 중세의 시대상을 표상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비밀리에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을 정도로 대담했지만, 아벨라르에게 가해진 거세라는 징벌과 세간의 냉담한 비난에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평생 수도원에 갇혀 서로의 소식조차 모른 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훗날 엘로이즈를 향한 아벨라르의 절절한 사랑의 편지가 발견되어, 후대인들이 수도원에 흩어져 있던 이들의 시신을 파리 외곽에 위치한 페르 라쉐즈 묘지에 합장하고 비석을 세워 추모했다.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이 비극적인 사랑은 죽음마저 초월한 불멸의 사랑으로 거듭나 현재에도 추모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실에서 가혹했던 중세의 사랑은 문학의 발달과 더불어 낭만적 사랑으로 전환됐다. 기사도의 모험담을 기조로 삼아 애절하고 달콤한 사랑의 감정을 입힌 연애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당대의 음유시인들이 마을과 마을을 떠돌며 사랑의 문학을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이런 까닭에 프랑스의 역사학자 샤를 세뇨보(Charles Seignobos)는 낭만적 사랑을 12세기의 발명품으로 손꼽았다. 낭만적 사랑의 핵심은 우아한 귀부인을 향한 기사도의 사랑과 흠모이다.
 
당대의 결혼제도는 여성의 지참금과 유산상속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정략결혼이 주를 이루었다. 귀족 남자들은 경제적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 불륜이란 명분을 덧씌워 부인을 내쫒을 수 있는 가부장적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20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십자군전쟁에 휘말리어 남자 귀족과 기사들이 오랜 기간 왕궁이나 저택을 비우게 됨에 따라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영토와 가사의 주도권이 여성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왕궁이나 제후의 저택은 점차 귀부인이 중심이 되는 사교장으로 발전했다. 이로부터 프랑스 살롱문화의 전통이 비롯됐다.
 
 
궁정풍 사랑
궁정풍 사랑

부와 권력을 거머쥔 귀족 여성들은 예술가의 후원자로 나서기도 했다. 이들의 후원을 받은 음유시인들은 기사도의 모험담에 기품 있는 귀부인을 향한 사랑을 접목하여 연애시를 지어 바쳤다. 12세기 초반 프랑스 남부지방의 공작 기욤 9세는 자신이 사랑한 귀부인 돔나(Domna)에게 바치는 연애시를 노래한 최초의 음유시인이었다. 여기서 유래한 기사도 로맨스는 영웅적인 기사들의 무용담을 칭송하던 영웅서사시와 달리 파격적으로 우아한 귀부인에게 남성 위에 군림하는 특권을 부여했다.

 
기사도 로맨스에서 낭만적 사랑은 점차 십자군전쟁에 참전하는 기사들의 출정식에서 우아한 영주부인을 향한 사랑의 서약식을 치르는 궁정풍 사랑(Fin Amor)으로 전설화됐다. 이후 낭만적 사랑은 사랑하는 여성을 향해 충심을 지키는 궁정풍 사랑의 모델로 진화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우아한 귀부인을 향한 존경과 흠모는 중세 기사들의 용맹을 겨루는 토너먼트 경기의 포상에 불과했다. 또한 십자군전쟁에 출정하기 직전 기사들이 행한 일은 영주부인을 향한 사랑의 서약식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에게 강철로 만든 정조대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중세의 낭만적 사랑은 실상 기사도 로맨스가 만들어낸 문학적 상상력이다.
 
 
3. 남자를 고양시키는 우아한 귀부인과 숭고한 사랑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의 낭만적 사랑은 중세와는 전혀 달랐다.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에 반발했던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을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가 공존할 수 있게 만들고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문학과 예술을 통해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미적 직관의 원천으로 여겼다. 때문에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적 사랑을 자유와 자아실현을 결합하여 정신적 혁명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진작시키는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자는 남자를 고양시킨다! 이는 낭만주의 문학의 대문호 괴테가 남긴 사랑에 관한 명제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평생 많은 여성들을 사랑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괴테의 경험담이 반영된 작품이다.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 베르테르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기품 넘치는 로테를 보자마자 첫눈에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로 마감한다.

 
이는 외견상 우아한 귀부인을 향한 흠모라는 점에서 기사도 로맨스의 낭만적 사랑과 유사하다. 그러나 베르테르가 사랑한 로테는 사회의 통념을 뛰어넘어 인간 본연의 감정을 회복하려는 예술가의 열정과 좌절을 불러일으킨 숭고한 사랑의 현현이자, 죽음마저 불사한 정념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 정신혁명의 화신으로 미화됐다.
 
기사도 로맨스에서 낭만주의 로맨스에 이르는 낭만적 사랑은 결혼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귀부인을 향한 흠모이자 숭배이며, 당대의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이었다그러나 이들의 사랑에서 여성의 목소리나 심리상태는 전혀 들리지도 파악할 수도 없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연인을 향한 아벨라르의 절규는 편지지를 흠뻑 적실 정도로 넘치지만 엘로이즈의 절망적 울부짖음은 애초부터 소거됐다. 서간체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감성 풍부한 베르테르의 열렬한 사랑 고백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일 뿐, 숭고한 여인 로테는 사랑의 찬미조차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출정식을 앞둔 기사도의 서약식은 또 어떤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고 돌아오겠다는 기사의 맹세는 우렁차게 울려 퍼지지만, 흠모의 대상인 귀부인은 우아한 미소로 응답할 뿐이다. 이처럼 당시 로맨스는 남성들이 향유했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였고, 로맨스문학의 생산 주체인 남성의 서사일 뿐이다
 
이로써 로맨스는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인 열정, 무모하고 공상적인 모험담, 혹은 사랑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는 용기, 이상을 꿈꾸는 몽상, 우울을 동반한 열정 등 다소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다양한 함의를 포괄하게 됐다.
 

 

: 이정옥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대중서사학회 회장 및 편집위장 역임. 관심사는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취미는 대중서사적 관점으로 세상 관찰하기.

 
참고문헌
김복래, 프랑스 여성 이야기: 페미니즘과 교태 사이에서, 새문사, 2016.
김진수,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 하는가, 책세상, 2001.
매릴런 엘롬, 프랑스식 사랑의 역사, 강경이 옮김, 시대의창, 2017.
아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서구 세계를 바꾼 사상 혁명, 강유원·나현영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존스탄스 부리텐 부셔, 중세 프랑스의 귀족과 기사도, 강일휴 옮김, 신서원, 2015.
질리안 비어, 로망스, 문우상 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사진 출처: 구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