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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떤 안일함에 대하여 -영화 <타짜3 원아이드 잭>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떤 안일함에 대하여 -영화 <타짜3 원아이드 잭>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3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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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도박으로 돈을 채우고, 낮에는 공무원 학원에서 무력감을 드러내는 도일출(박정민). 그는 왜 이 영화의 주인공이어야 했는가? 한 편의 영화가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전작과 원작에 무작정 기대는 순간, 영화라는 선박이 어떻게 좌초되는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먼저 영화에서의 도일출은 허영만 원작의 ‘타짜 3부작’의 주인공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원작에서는 말더듬이에 비만이고 왕따였다. 그래서 원작에 도일출을 규정하는 두개의 단어는 ‘왕따’와 ‘루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서사의 등장인물을 ‘왕따’나 ‘루저’라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제법 훌륭하게 활용되는 지점은 바로 그 판단을 파열시키는 것이다. 도일출이 애초부터 당차고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주이공이란 설정은 그래서 흥미롭지 않다.

애초에 도일출의 특별함을 이렇게 규정한 탓에 그에 대한 이야기의 극적인 요소는 여지없이 사라지고 만다. 심지어 그 역시 사기를 당해서 모든 돈을 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의미없어진다. 게다가 이 영화는 도일출을 피해자로 그리다가 결국 일종의 영웅으로 그린다. 여기서 영웅은 자신이 모두 가져도 될 돈을 남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는 식의 영웅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타짜’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런 행동을 하거나 그런 행동의 수혜자로 그려졌다.

그렇다보니 이 서사에서조차 어떤 긴장감이 자리 잡을 여지는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이를 여러 갈래로 나눈 후 마지막에 보기 좋게 꼬아놓을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아주 좋게 말해서, 어차피 결론을 알고 있으니 그런 불필요한 수고를 덜겠다는 감독의 의지라고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고서는 너무 순진한 발상에 안일한 생산 방식이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원작기반의 영화는 원작의 주인공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온 몸을 바친다. 그런 노력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건 이 영화의 치명적 단점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도일출을 원작에서 극복시키려는 전략을 애꾸(류승범)를 등장시켜 만회하려 한다. 물론 어느 두 존재가 만나서 하나의 의미가 재탄생하면 시너지 효과가 극에 달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도일출과 애꾸는 그저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를 ‘마귀’(윤제문)라는 특정 캐릭터로써 하나의 연결고리로 삼으려 했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아귀’보다 더 강한 이름의 ‘마귀’는 그 이름값을 ‘아귀’만큼 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마귀‘에 의한 애꾸의 죽음은 뜬금없고 도일출과의 대결은 미숙하다.

여기에 개입된 ‘마돈나’(최유화) 역시 도일출의 배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치명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도일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이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원작이 이 영화에서 변주될 때 실패하는 지점이 여기에서도 또 다시 발견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이야기를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그냥 넘어가겠다는 안일함. 영화 관객들은 이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에 ‘물영감’(우현)이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캐릭터의 변주는 ‘물영감’이다. 그의 역할이 살아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공격당하면 곧바로 반격한다. 그 반격 속에 모든 서사의 균형은 깨지고, 의외의 요소가 자리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무익해지는 건 결국 도일출과 애꾸의 겉도는 관계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도박과 모의하는 장면뿐이다. 도일출의 아버지 ‘짝귀’에게 빚을 졌다는 식의 나레이션만으로는 둘의 관계가 밀접해질 수 없다. 도일출은 애꾸의 이 말에 한번도 진심으로 대한 적도 없다. 그러니 ‘까치’(이광수)가 애꾸의 죽음을 알릴 때 보이는 반응이 무력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런 상황이 2시간 반복되면서 이 영화는 어떤 영화가 재미없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안다고 생각할 때 그 ‘안다는 걸’ 설명해줘야 재미가 배가된다는 진리를 실패로써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의미를 애써 찾자면 원작의 주인공과 각색된 주인공이 있을 때 둘 중 누가 더 의미있는 캐릭터일까를 물어 보기 전에 또 다른 주인공을 개입시킴으로써 이야기를 튀지 않게 비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도는 긍정적이지만 그 과정은 미숙했다. 대사는 전작의 향이 강했고, 캐릭터의 배치 역시 늘 보던 것이었다.

이 영화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이해가 파열되는 쾌감을 전작에서처럼 맛볼 수 없었다. 이미 갔던 길을 다시 걷는 기분으로는 과거를 회상하긴 해도, 어떠한 새로움의 맛을 얻긴 힘들다. 원작의 성공 방식을 정확하게 따라가려할 때조차 공감을 얻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렇게 보여주었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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