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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익숙한 세계 너머를 바라보기 - 82년생 김지영과 이혜미, 정다운의 시를 경유하여
[이병국의 문화톡톡] 익숙한 세계 너머를 바라보기 - 82년생 김지영과 이혜미, 정다운의 시를 경유하여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19.11.18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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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남주 원작의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하였다. 영화는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평점테러 등의 ‘페미’논란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문제가 될 만한가, 하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이미 원작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문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담론을 통해 문제제기했던 사항들이었다. 소설이 나오기 몇 달 전에 발생한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에 기인한 젠더폭력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하였으며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이들의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을 불러왔으며 ‘#○○계_내_성폭력’과 메갈리아 논쟁, 미투 운동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가히 변화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82년생 김지영 - 사진출처:네이버영화
82년생 김지영 - 사진출처:네이버영화

그러나 남성중심적 관행이나 가부장제의 전통적 권력 구조는 공고하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성희롱이나 성적 대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 관한 편견·비하·무지가 남성의 인식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영역에 전방위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무지와 오류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미국의 부통령 펜스의 말을 가져와 만든 ‘펜스 룰’이란 용어처럼 배제와 차별을 희화화함으로써 그것의 사회적 부조리를 더욱 강하게 울타리치고 있다. 한편 어떤 블로그에서는 불행한 여자는 있지만 보편적인 여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여성이 겪는 차별의 구조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지금은 달라졌다고, 옛날과는 다르다고.

그러면서 말한다. “난 여자 좋아해, 난 여성혐오 안 해.” 이 말에 내포된 ‘여자’는 어떤 여성일까. 예쁘고 순종적이고 더치페이 잘 하며 섹시하면서도 남자인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상상된 존재는 아닐까. 2000년대 초반에 개봉한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빌려 말하자면, 있으면 좋을 ‘아내’나 자신에게 헌신한 ‘어머니’의 양태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사회생활로 지친 ‘나’를 위해 집안일을 다 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너’에 대한 ‘자연스러운’ 어떤 이미지에는 그 이미지를 만든 남성중심적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은폐되어 있으며 이를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선행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말이 갖는 힘은 그 말 속에 담긴 역학적 관계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너를 부르는 행위, 이를테면 호명조차 그렇다. 주체인 ‘나’가 대상인 ‘너’를 부름으로써 ‘너’는 ‘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와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우리’를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부르는 주체와 응답하는 대상의 위계가 호명 행위에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시된다. 그것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표출되는 양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남성 일반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이런 것도 있다. “내가 도와줄게, 설거지도 빨래도 청소도. 아이 낳으면 아이랑도 잘 놀아줄 거야.” 이 배려의 말 속에는 기본값인 디폴트가 설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사나 육아는 여성이 하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이때 남편은 아내가 할 일을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가 된다. 일종의 시혜적 관점에서 관계가 형성되는 셈이다. 노동운동의 발달사에서 지식인이 노동자들을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요새는 그렇지 않다고들 한다. 하지만 은연중에라도 남성성과 여성성에 기인한 고정된 사고를 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는 못 할 것이다. ‘배려’라고 간주된 말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이혜미의 시 「스프링클러」를 보자.

 

사진출처:영렘프란트
사진출처:영렘프란트

멍든 자리를 들여다보면 몸의 내부로부터 캄캄한 조명이 비치는 것 같다. 달아나는 죄수를 겨누듯 부딪힌 자리마다 뒤늦게 어두워지고

 

정원이 깊어진다.

 

나무가 정원 한구석에 서 있다. 뾰족한 구두를 신고 진흙에 발을 빠뜨리며.

 

식물이 흙의 신발을 벗는다면 제일 먼저 이 물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겠지. 비를 만드는 우산 속 동그랗게 모여드는 그늘 깊은 우울을.

 

각주가 많은 몸은 슬프지.

죽으면 생전의 멍들이 피부 위로 떠오른다는 이야기처럼.

 

물줄기가 회오리친다. 무릎이 흙에 젖는다. 반짝이는 이파리를 늘어뜨린 나뭇가지들.

 

뿌리마다 작은 하이힐을 신은 잔디들이 수군거린다. 검게 물들며 나무는 낮아진다. 턱밑까지 흙에 잠기며. 귀걸이와 목걸이와 팔찌를 풀어 내버린다. 구두가 벗겨지고 푸르게 지워지는 맨발.

 

나무가 빠져든 자리를 멍의 뿌리라고 불러도 될까. 정원이 온통 푸른 멍으로 뒤덮일 때까지 스프링클러는 돌아가고.

- 이혜미, 「스프링클러」(『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전문.

 

어떤 면에서 관계를 강요하는 일은 일상적인 폭력의 형식인지도 모르겠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물도 상황에 따라서는 폭력으로 감각될 수도 있다. 스프링클러에 의해 마구 뿌려지는 물의 이미지를 상상해보자. 그것이 수행하는 행위는 식물의 생장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응당 수행되는 반복적 행위에 다름 아니라면 어떨까. 불필요하게 전해지는 물은 시혜라는 이름의 폭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일방적인 관계에의 강요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너’를 향한 ‘나’의 시선은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타자에게는 ‘멍’을 만드는 폭력이 될 수 있다. 폭력의 결과물인 멍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달아야 하는 ‘몸’은 슬프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 놓인 ‘너’는 “달아나는 죄수”가 되어 “몸의 내부로부터 캄캄한 조명”을 받고 어두워진다. 스프링클러와 식물의 관계로 형상화된 이 시에는 일상적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그림자가 짙게 드러난다.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여성은 푸른빛을 발한다. 아무도 그것을 ‘멍’으로 보지 않는다. 이를 천천히 스며드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색을 띤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빛으로부터 흡수된 색 중 그 색만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흡수되지 못하고 표면에 부딪쳐 튕겨나가는 것을 우리는 색으로 감각한다. 물이 강요하는 관계는 그렇게 “푸른 멍”의 강요로 탈바꿈된다. 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식물은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물은 생명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기보다는 마치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상상된 관계를 강제하는 의지에 가깝다. ‘우리’를 욕망하는 매혹의 메커니즘은 “정원이 온통 푸른 멍으로 뒤덮일 때까지” 돌아가는 ‘스프링클러’를 감당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때의 ‘우리’는 어떤 관계로 구축되는 것일까. 그 안에 존재하는 차별적 위계는 ‘너’를 고려하지 않고 수행되는 ‘나’의 발화로 이어져 ‘존재’와 ‘관계’의 소외로 나아갈 위험이 다분하다. 악플이 야기한 누군가의 죽음처럼 말이다.(여기에는 성별의 위계만이 아닌 미디어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관계와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내면화한 모든 ‘나’의 발화가 있다.)

 

사진출처: 스마트 서울경찰
사진출처: 스마트 서울경찰

“나는 안 그래.”(“내가 언제 그랬어?”나 “내가 그랬다고? 기억나지 않아.”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라는 말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도 필요할 것이다. 이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불합리한 차별을 통해 획득한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안일한 심리일 수도 있다. 이는 폭력적 상황에 처하는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차별과 배제의 본질적 구조를 외면하고 갈등의 상황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적 수행이자 부조리한 사회를 굳건히 유지하는 데 복무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나는 안 그래.”라는 말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나’로 구축된 남성의 폭력적 상황을 직시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난 비누로도 맞아 봤지

양말에 넣어 돌리는 비누

발목처럼 늘어나지 우리의 기술

보이지 않으면 없었던 것 같은

멀쩡한 아침 숨겨 둔 입 냄새

 

긴 머리칼을 잘랐다가 다시 기르게 되었지

손에 휘감기 알맞을 만큼만

내가 뛰자 그는 잠시 웃었어

그가 웃는 줄 알고

같이 웃었어 끝난 줄 알고

 

여행 사진을 찍어 올리거나

생일 파티를 여는 일로 안심시켜 가면서

문을 닫지

귀여운 단도를 쥐여 주겠다며 아이를 깨우기 전에

둘이서만 연습을 해 보자고 나는

과녁이 되어 주고 입에 문 풍선이 되어 주고

 

이 집이 좋아 언제나 돌아올게요

치면 꺾였다 다시 돌아오는 빰처럼

몇 번이고

붉고 하얀 침으로 뒤썩인 눈 코 입에서

머리칼을 한 올씩 떼어 귀 뒤로 넘기면서

나긋하게 그는 땀을 닦아 주지

수고했어 힘들었지

 

얼굴은 각지고 눈과 눈 사이는 점점 멀어져

후드득 흘러내린 내가 이 집 바닥마다 고여 있지

다시 주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나를 깨요 밟아요

아뇨 힘들지 않았어요

나는 살아남을 거예요

누구보다 오래

- 정다운, 「살아남았으면 된 거야」(『파헤치기 쉬운 삶』, 파란, 2019) 전문.

 

정다운의 이 시에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명징한 가정 내 젠더폭력의 양상이 그려진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과거에는 이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아내 살해’나 ‘가정폭력’ 등의 키워드를 검색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인 셈이다. 이 시 속의 ‘나’는 가정 내 폭력의 피해자로 처절한 삶을 돌파할 어떠한 출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나’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기 위해 “여행 사진을 찍어 올리거나/ 생일 파티를 여는 일로 안심시”키는 한편에서 끊임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나’는 “이 집 바닥마다 고여 있”다.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을 거”라고 “누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말한다. 생존의 강한 열망이 그려내는 폭력의 잔혹함은 ‘나는 안 그래’로 외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폭력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나’는 자신을 내보임으로써 폭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행동하지 않는 ‘우리’의 방관 역시 또 다른 폭력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폭력은 언제나 실제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을 당사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상상적 차원에서 감각하며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혹은 폭력의 실체를 안전한 위치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혐오와 폭력적 언사들도 마찬가지이며 폭력의 결과물을 공유하며 돌려 보는 행위도 이런 맥락에서 사유할 수 있다. 문제 상황에 개입하지 않거나 문제의 결과물을 제3자의 위치에서 서서 향유하는 것이 자신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는 방임의 행위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카르텔을 유지, 강화하는 셈이다. 이는 나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로 떼어놓는다. ‘우리’ 안에서 ‘너’, 여성은 소거된다.

 

사진출처: slowalk
사진출처: slowalk

그렇다고 이제부터라도 ‘너’와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많은 차이를 무릅쓰고 연대만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상상적인 방식으로나 가능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불합리함을 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도 시혜적 사고에 기인한 해결책일 뿐이다. 특정할 수는 없겠지만 남성을 존재의 디폴트값으로 위치한 것부터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나 남성과 여성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윤리를 생각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억지로 배제하거나 은폐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억압을 수월하게 한다. 김지혜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아이리스 매이런 영Iris Marion Young의 ‘차이의 정치’를 언급하며 인정을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는 ‘중립’적인 접근은 일부를 배제하는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페미논쟁이란 용어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남성중심적 세계의 오류를 은폐한 채로 스스로를 ‘중립’으로 가장하여 페미니즘 운동을 논쟁거리로 축소하며 그것을 일탈로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이를 바탕으로 한 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인지하고 이를 반성할 사유의 힘이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혐오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하고 있는 세계 너머를 바라보아야 할 때를 맞이한 것이다.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182쪽.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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