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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국의 문화톡톡 ] 그림 - 그리움 그리고 시인
[최양국의 문화톡톡 ] 그림 - 그리움 그리고 시인
  • 최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0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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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 숨어버린 / 시인의 / 팔다리를

그림이 변한다.

동짓달 초입은 짧기만 했던 가을의 호흡이 뱉어내는 한숨으로 수묵화를 그린다.

자연의 채색을 긁어 내며 데생을 하는 그리움을 향한 바람의 시간이다.

흔히 소묘(素描)라고 부르는 데생(dessin)은 ‘그린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2008년 방송된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 분)은 '그림‘과 ’그리움'을 말한다.

 

* 바람의 화원(SBS ; 2008년), Google
* 바람의 화원(SBS;2008년), Google

스승 김홍도(박신양 분)는 도화서의 생도들에게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신윤복은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이 아닐런지요.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또 그림은 그리움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자꾸 떠올라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또한 그 사람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잊고 있다가도 그 사람이 다시 그리워지니, 이는 그림이 그리움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답한다.

 

‘그림’과 “그리움”은 ‘나’와 ‘너’의 마음의 관계를 유형과 무형의 선과 면으로 나타내며 흔적을 남기는 행위로서 수평적으로 연결된다.

‘그림’은 모사가 아니라 표현으로서 어떤 사람이나 대상의 존재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움’이란 어떤 사람이나 대상의 관계에서 벌어진 틈새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메꾸어 보려는 재현의 감정이다. 눈을 뜨거나 감아도 ‘그림’으로 그려지는 얼굴이 있다면 '그리움'인 것이다.

그림은 그리움이며, 그리움은 그림이고 얼굴이다.

 

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는 서양과 동양의 인물화(초상화)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서양의 초상화는 사람 자체의 속성에만 관심을 갖는 서양적 관점을 반영하여 사람을 크게 그린다. 그러나 동양의 초상화는 항상 그 인물이 처한 맥락을 알기 위해 배경을 함께 그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체 그림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서양의 인물화는 배경을 나타내지 않은 얼굴 중심의 그림이다.

동양의 인물화는 배경을 중요시 하며 전신이 드러나는 배경과 얼굴 조화 중심의 그림이다.

 

자신의 모든 작품은 자서전이라고 하는 독일 태생의 유명한 사실주의 인물화가인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는 말한다.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얼굴만 그렸었는데 마치 얼굴에 집착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것들의 팔다리가 되고 싶은 것처럼..."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 d)의 손자로서 인물들의 얼굴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할아버지의 꿈 해석을 위한 팔다리가 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과 ‘그리움’의 틈새에서 글로 흔적을 남기는 시인의 서양식 인물화를 그린다.

영국의 계관시인 데이 루이스(Cecil Day-Lewis)는 <시학입문>에서 시인의 시작은 원시시대에 원시 공동사회의 일원으로서 농경,사냥이나 전쟁과 같은 힘겨운 노동을 할 수 없는 체격을 가진 사람의 생존 방식이라고 한다.

그들은 거주하는 동굴 벽에 사냥의 성공을 축하하는 언어의 그림을 만들기도 하고, 마술적인 주문을 외워 해와 비를 움직여 수확을 얻고자 기도를 드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공동체의 공인된 형태가 시인의 출발 이라는 것이다.

 

화가는 팔다리가 해야 할 공동체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않는 시인을 위해 '오늘'을 그려야 한다.

화가는 시인의 팔다리가 되어야 한다. 동사가 되어야 한다.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를 같이 한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보듬고 / 안으면서 / 눈망울을 / 느끼고저

그리움이 떨어진다.

늦어지는 가을 햇살에 엎드려져 있는 가장 낮은 잎으로 그리움을 그린다.

 

가을의 절정에 피는 능수화는 은행나무꽃이다.

화가는 그리움을 들고 나아가는 길에 노오란 은행나뭇잎을 맞는다.

곽재구의 <은행나무>를 만난다.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중략)

은행나무의 눈망울로 떨어진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The Idiot)'의 주인공인 뮈쉬킨 공작을 통해 '백치'에 대한 세속적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각하고,순수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우리들 시대의 '백치'에 대한 역설적 승화를 이루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늙은 러시아 문호와 늙어버린 시인의 눈망울은 공작이 가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그 순백의 감성과 지혜를 향해 서로 공감하며 절규한 것은 아닐까.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신화적 서사시를 지은 호메로스(Homeros)와 종교적 서사시인 <실락원(失樂園)>을 쓸 당시의 밀튼(John Milton)은 눈이 먼 상태에서 시를 남긴다.

눈의 순수함으로 눈을 뜨며 눈망울의 관계로 같이 할 수 있을 때, 글의 흔적을 그린다.

 

떨어진 그리움이 기다림으로 밟힌다.

 

* 기다림(신윤복), Google
* 기다림(신윤복;18세기 후반?), Google

화가는 순수하게 맑은 영혼의 재료로 빚어낸 시인의 눈망울이 전하려는,그 얘기를 듣고 그리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화가는 시인의 눈망울이어야 한다. 명사가 되어야 한다.

 

 

명사와 / 동사의 부활 / 그 노래를 / 그린다

시인은 떠나간다.

화가가 어린왕자의 소행성(B612)으로 그리움의 별을 그리려고 떠난 날이다.

 

시인은 고유명사를 잃고 보통명사까지 잃으며, 마지막 동사 한 단어만을 남겨서는 안된다.

명사를 잃어 버린다는 것은 욕망을 놓아 버리는 것, 동사를 잃어 간다는 것은 관계를 놓쳐 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화가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와 신화는 사라지고,우리들 상상력의 근원인 DNA가 낯설은 DNA(Data,Network,AI)로 포장되며 광장의 dna만으로 머무르는, 단절과 분쟁의 소인국(小人國)이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시인은 명사와 동사의 창조적 재현을 통해 '오늘'의 사람과 대상에 대한 존재 의미를 얘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과 자연의 틈새에서 생기는 생채기를 어루만지며, 새로운 존재 의미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황의 시조 <도산십이곡>중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를 함께 한다.

 

* 도산십이곡(이황;1565년), Google
* 도산십이곡(이황;1565년), Google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엇덜고.

(옛사람이나 성현도 나를 못 보고,나도 그들을 만날 길이 없지만 그 가던 진리의 길이 앞에 있으니 아니 갈 수 없구나.)

 

화가와 시인은 연쇄법(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하여 이어가는 시의 표현법)의 선순환으로 같이 하며, 떠나간 길의 그 곳에서 여인(麗人)의 그림-그리움으로 그 노래를 그린다.

 

글: 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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