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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포크 크루세더스의 위트와 우울
[이혜진의 문화톡톡] 포크 크루세더스의 위트와 우울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02 10: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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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치기> 포스터(출처: 네이버)

2006년 한국에서 개봉된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감독의 영화 <박치기>는 북한 곡 <임진강>을 한국에 전파한 계기가 되었다. 1957년 월북 작가 박세영의 시에 고종한이 곡을 붙여 만든 <임진강>은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애절한 감성으로 표현한 곡으로 영화 <박치기>의 OST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기 이전까지 이 곡을 알고 있는 한국인은 매우 드물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곡 <임진강>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수출된 곡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곡을 처음 일본 사회에 알렸던 것은 일본 불세출의 포크그룹 ‘포크 크루세더스’(The Folk Crusaders, 이하 ‘포쿨’로 약칭함)다.

영화 <박치기>는 ‘포쿨’의 원년 멤버이자 작사가로도 활약했던 마쓰야마 다케시(松山猛)가 2002년에 쓴 자전소설 「소년 M의 임진강」을 각색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1968년 교토의 재일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반목과 대립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고도 경제 성장과 사회 개혁 과정에 놓여있던 전후 일본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상과 절망을 따뜻한 시선으로 재현한 것으로 눈길을 끌었다. 원작자인 마쓰야마 다케시에 의하면, 그가 교토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1961년 스포츠 경기를 통해 양국 학생들 간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해보려는 심산으로 축구시합 신청서를 들고 조선학교에 갔다가 우연히 <임진강>을 합창하는 학생들의 소리를 듣고 감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그 가사를 ‘포쿨’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포쿨’이 1절은 원곡의 가사 내용을 그대로 불렀고 2절과 3절은 새롭게 일본어로 창작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박치기>(출처: 씨네21)

나 자신은 평화로운 시대의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교토에서 계속되는 중학생끼리의 작은 전쟁 같은 싸움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늘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하라다(原田) 선생님과 상담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조선중학교와 내가 다니는 쓰키노와(月輪) 중학교에서 축구 경기를 열어 서로 건강하게 땀을 흘리며 스포츠를 함으로써 서로의 이해를 증진하고 친구로 사귀어 보자는 계획이었습니다. 하라다 선생님은 “그거 훌륭한 생각이야. 그렇지만 어른인 우리는 빠지고 너희 중학생들끼리 해보는 쪽이 가장 이상적이니까, 시합 신청은 너희가 해보렴. 학교 운동장 사용 허락은 나한테 맡기고….” 하면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전철을 타고 은각사 근처에 있는 조선중고급학교에 가서 초등학생 때의 친구로서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를 통해 친선 축구 시합을 신청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느 교실에서 그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 것은.

임진강 맑은 물은 / 흘러흘러 내리고 /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그 어쩐지 구슬픈 멜로디는 내 영혼의 순정을 꿰뚫어버렸습니다. 두 개의 나라로 나뉘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가족도 많다는 이야기를 조선인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무렵 친한 친구였던 교코(京子) 씨와 여동생 다미에(民江) 씨의 가족이 당시 북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가운데 제74차 귀국선에 승선해서 일본과 교류가 없는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교코(京子)는 명희(明姬)로, 다미에(民江)는 민희(民姬)라는 조선 이름으로 각각 되돌렸고, 그녀들의 아버지는 성공한 장사를 지인에게 넘기고 많은 재산을 조국에 선물로 바치며 귀국했다고 나중에서야 그녀들의 친척에게 들었습니다.

                                                                             - 「소년 M의 임진강」 중에서-

 

1968년 ‘포쿨’의 두 번째 싱글로 발매될 예정이었던 <임진강>은 일본 대중에도 꽤 호평을 받으면서 당시 일본 학생운동과 짝패를 이루었던 일본 포크 씬의 단골 레퍼토리로 통했다. 그러나 싱글 판 13만장이 이미 제작된 상태에서 음반발매를 일주일 남겨두고 뜻밖에도 조총련의 항의를 받게 되면서 음반 발매원인 도시바 레코드가 곧바로 자체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한 저간의 사정은 영화에도 재현되어 있는데, 사실 <임진강>이 일본 내에서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된 것은 조총련계의 압력과 도시바 레코드사의 미묘한 정치적 입장이 개입된 결과였다.

즉 조총련계에서는 박세영 작사·고종한 작곡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곡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또 마쓰야마 다케시가 일본어로 개사한 것에 대해 원곡의 가사 그대로를 번역해서 부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마쓰야마가 창작한 2절과 3절의 일본어 가사는 남북분단의 정치적 모순을 개탄한 구절이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총련계에서 이를 탐탁지 않아 했던 것. 그러나 당시 냉전체제 하의 일본 정부는 북한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북조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꺼려했다. 한편 도시바 레코드의 모회사인 도시바(東芝)에서는 북한 노래 <임진강>의 대중적인 히트가 당시 활황기에 있었던 대 한국 전자제품 수출사업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도시바 레코드에 압력을 가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 작용한 결과 레코드사는 단호히 자체발매금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현재 냉전체제 하의 남북한과 일본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입장이 대중의 감수성에 미쳤던 저간의 사정들은 모두 잊혀버렸지만, 1960년대 말 일본의 학생운동은 한반도와 일본의 지정학적 모순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첨예하게 인식하고 다루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일본 포크 씬에서 ‘포쿨’은 1960년대 말 일본 전공투 세대의 정신, 즉 국가의 폭압과 권위주의적 기성 질서에 반기를 든 시대정신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줌으로써 현재까지 일본 포크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포크 크루세더스(출처: grapee.jp)

‘포쿨’은 1965년 교토에서 결성하여 1968년까지 활동했던 아마추어 학생밴드였다. 처음에는 5인조 밴드로 시작했으나 이후 3인조 밴드로 재편한 뒤 ‘간사이(關西) 포크계’(당시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계열로서, 훗날 이들이 도쿄에 진출하게 되자 이른바 ‘간사이 인베이젼’으로 평가되기도 했다)의 중심에서 활약하던 중 학업과 가정형편을 이유로 결성된 지 약 2년 만인 1967년 해산을 선언했다. 이때 밴드 해체를 기념하기 위해 23만 엔을 들여 300장 한정 기념앨범 파렴치(ハレンチ)를 자체 녹음·제작했는데, 이 앨범 안에 수록된 곡 <돌아온 술주정뱅이(歸って來たヨッパライ)>가 고베에서, 그리고 <임진강>이 교토에서 라디오 방송을 타자마자 일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아마추어 학생 밴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던 앨범 파렴치는 현재까지도 ‘일본 최초의 언더그라운드 레코드’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돌아온 술주정뱅이>는 1968년에 시작된 일본 오리콘(Oricon) 차트 최초의 밀리언 히트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포쿨’은 그야말로 당대 일본 청년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레코드의 회전수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킨 효과음을 통해 귀엽고 해학적인 위트를 선보인 이 곡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곡으로 알려졌는데, 영화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大島渚)는 동명의 제목을 차용하여 재일조선인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돌아온 술주정뱅이(출처:streo records)

나는 죽었다네 나는 죽었다네 / 나는 죽었다네 천국에 갔다네 /긴 계단을, 구름 계단을 / 나는 올라갔다네 휘청휘청 거리면서 / 나는 비틀비틀 거리면서 계속 올라갔다네 / 겨우 천국의 문에 도달했다네 / 천국은 좋은 곳 한 번쯤은 와보게나 / 술은 맛있고 아가씨는 예쁘다네, 와~ / 내가 죽은 이유는 만취운전 때문이라네, 아렛~ / (중략) / 천국은 좋은 곳 한 번쯤은 와보게나 / 술은 맛있고 아가씨는 예쁘다네 / 나는 매일 술을 마시면서 / 저승사자를 잊고 있었다네 / “너 말이야, 아직도 그러고 다니는 게냐? 그렇다면 썩 나가버려라” / 그렇게 해서 나는 쫓겨났다네 / 구름계단을 내려갔다네 / 긴 계단을 내려왔다네 / 잠깐 발을 헛디뎌 / 나는 깨어났다네 밭 한 가운데서 / 나는 살아났다네 나는 살아났다네, 와~

                                                      - <돌아온 술주정뱅이(歸って來たヨッパライ)>

 

1960년대에 전 세계를 풍미했던 영미 계열의 포크를 모방하는 정도가 일반적인 분위기였던 일본 포크 씬에서 ‘포쿨’은 TV 드라마 주제가를 부르거나 동요를 만드는 등 폭넓은 음악적 실험을 시도하면서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스타일을 추구해갔던 탓에 당대 일본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밴드로 통했던 동시에 일본 팝의 혁신을 시도한 일본 록의 개척자로도 불렸다. 그러나 1967년 10월 ‘제1회 포크 캠프콘서트’의 출연을 끝으로 다시 해산을 선언, 1968년 3월에 재결성을 이루면서 ‘포쿨’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임진강>이 발매금지 처분을 받자마자 발표한 <슬퍼서 견딜 수 없네(悲しくてやりきれない)>가 연이어 대히트를 친 것이다.

곧이어 1968년 7월에 발매된 앨범 <기원이천년(紀元貳阡年)>은 ‘일본 최초의 콘셉트 앨범’으로 평가됨으로써, 현재까지도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비견되는 역사적인 명반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쿨’의 대표 앨범이라 할 수 있는 기원이천년은 메이지(明治) 100년을 의미하는 ‘1968년’의 전 국민적인 축하 분위기를 조롱하고 야유했다는 이유로 저항문화의 시초라는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도 부기해둘만 하다. 특히 B면에 수록되어 있는 <꽃향기에(花のかおり)>와 <무엇을 위해(何のために)>가 베트남 전쟁을 연상시키는 반전가요라는 점에서 이 앨범의 지향점이 1968년 전공투 세대의 정신이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1968년은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을 필두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의 서유럽 도시들이 68혁명의 벨트에 들어가고, 체코의 프라하와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의 도시들이 같은 맥락에서 자유민주화운동에 돌입했으며 미국에서도 베트남전 반대와 관련된 대대적인 운동이 각지에서 전개되던 해였던 것이다.

 

포쿨의 기념비적인 콘셉트 앨범 <기원이천년> 자켓 (출처:옥션)

바람에 흩날리는 올리브 꽃 / 하얀 벽의 교회에서 / 흔들리다 비스듬히 기운 십자기 밑에 / 한 남자가 쓰려져 있네 / 무엇을 위해 무엇을 꿈꾸며 / 이를 악물고 일하다 죽었는가 / 흔들리다가 비스듬히 기운 십자기 밑에 / 한 남자가 쓰려져 있네 / 깨지고 부서진 스탠드 글라스 / 새어나오는 빛이 눈에 스며드네 / 전쟁으로 불타버린 마리아 상에 /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믿고 / 이를 악물고 싸우다 죽었는가 / 전쟁으로 불타버린 마리아 상에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네 /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고 / 상처 입은 늙은이가 되어 죽어버렸는가 / 때 묻은 얼굴에 미소를 띠운 / 남자는 끝내 숨이 끊어져버렸네

                                                                                 - <무엇을 위해(何のために)>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심플한 앙상블을 추구해간 ‘포쿨’의 음악적 특징은 다양한 효과음을 배경으로 활용하는 등의 사운드적 모험뿐만 아니라 일본적 토착성과 민속성 등의 의식을 자신들의 근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일본 최초의 포크밴드’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앨범 <기원이천년>은 당대 일본 사회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면서 해학적인 가사와 레코딩 기술, 그리고 탄탄한 구성력과 엔터테인먼트까지 골고루 갖춘 일본 포크록 역사의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포쿨’은 일본 대중음악계의 새 양식을 구축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쿨’의 절정기였던 1968년 9월 또다시 해산을 선언, 리더인 가토 가즈히코(加藤和彦)는 가수 겸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또 작사를 주로 맡았던 기타야마 오사무(北山修)는 에세이스트, 정신과 의사, 대학교수로, 그리고 하시다 노리히코(端田宣彦)는 솔로가수로 전향하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2009년 10월 16일 가루이자와(軽井沢町)의 한 호텔에서 가토 가즈히코의 자살소식이 TV 뉴스 속보를 타고 흘러나왔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판별되었지만, 그가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세상은 음악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또 창작 의욕도 사라졌다. 죽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사라져버리고 싶다.”

 

가토 가즈히로(加藤和彦)(출처:TAP the POP)

‘포쿨’의 리더이자 일본 굴지의 포크가수였던 가토 가즈히코. 그는 194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 후반 ‘전공투 세대’로 불리면서 일본 사회의 변혁을 주도하며 청춘을 보내고,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풍토 속에서 고도경제성장을 견인해갔던 이른바 ‘단카이 세대(團塊世代)’에 속한다. 미국의 히피들이 1960년대 후반 권위주의적인 기성 질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전쟁과 차별 대신 사랑과 평화, 꽃과 같은 키워드로 자신들을 대변하며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었으나 결국은 미국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논리를 견인해가며 중산층의 세계관을 형성해갔듯이, 일본의 ‘단카이 세대’ 역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선두에 서서 1980년대의 버블경제를 이끌어간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격적인 은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2007년 이후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상대도 없었고, 또 전후 일본 사회가 축적해간 이율배반을 고스란히 자신들의 몫으로 돌려받아야만 했다. 현재 일본 사회에 드리워진 음울한 현상, 즉 1960년대 ‘포쿨’이 밀고 나갔던 사회에 대한 해학과 정치 풍자가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평화헌법’을 둘러싼 작금의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가토 가즈히로의 자살은 더 이상 음악이 고단한 인간의 삶에 위안이 되지 못하는 일본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웹진 <문화 다>(2015.10)에 게재했던 글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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