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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이동으로 완성한 잔열의 계절 - 올리비에 아사야스 작가론
[김희경의 문화톡톡] 이동으로 완성한 잔열의 계절 - 올리비에 아사야스 작가론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06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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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가 사그라질 때 열기를 향한 욕망은 극대화된다. 발열이 막 시작됐거나 서서히 가열되는 단계에선 오히려 감각이 무디게 흐른다. 그러나 온도가 떨어지는 걸 느끼는 순간, 솟구치는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가장 뜨거웠던 절정의 환희를 복기하며, 잔열만이라도 끌어안은 채 버티고 싶어진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시선은 그 미묘한 경계의 순간에 멈춰선다. 계절에 비유하자면, 열기가 타오르는 한여름이 아닌 잔열이 옅게 흐르는 초가을에 가깝다. <여름의 조각들>(2008)부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퍼스널 쇼퍼>(2016), <논-픽션>(2018)에 이르기까지 아사야스의 시선은 때때로 이 즈음에 머문다.

하지만 그는 절정의 순간을 인위적으로 담지 않는다. 영광의 환희를 뽐내려 하지 않으며, 은유적인 표현으로 암시할 뿐이다. 카메라도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를 기점으로 이후 견인될 사건들을 하나씩 비춘다. 종국엔 두터운 열기의 꺼풀이 하나씩 사라져 가느다랗게 남은, 그러면서도 촘촘하게 엮어진 한줄의 문장을 완성하려는 의도다.

이 문장 안엔 열기에 대한 욕망과 함께 식어감에 대한 체념이 교차한다. 주체들은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혼란과 불안을 겪는다. 처음 그의 영화와 마주하면 쏟아지는 말에 압도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이들은 말로써 모든 내재적 불안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방대한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말들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비장하고도 지난한 전투의 한복판에 서 있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문장 안에 배치된 것은 언어만이 아니다. 말과 말 사이의 빈틈 곳곳을 파고들어, 생동하는 리듬을 만드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카메라가 부단히 포착해내는 ‘이동’의 이미지다. 아사야스의 영화에서 이동은 다층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퍼스널 쇼퍼>에선 인물들이 어딘가를 향해 반복해 이동한다. 기차, 자동차, 오토바이 등 각종 이동수단에 번갈아 올라타 움직인다. <여름의 조각들>에선 아사야스의 시선이 누군가가 남긴 잔존물의 이동으로 옮겨가고, <논-픽션>에 이르러선 주체의 이동을 제거해 현상의 이동을 부각하는 실험적인 양상도 나타난다.

출발과 도착 자체에 큰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동 과정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의 표정과 시선을 비추고, 사물의 동선을 통해 열기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톺아본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는 잔열보다 더 오래 지속될, 작지만 찬란한 희망을 머금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잔열의 불안정성으로 침투하다

영화 시작부터 인물들은 어딘가로 향한다. 연극을 소재로 삼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연극처럼 1,2부로 나눠져 있는데, 두 파트 모두 중년의 배우 마리아와 그녀의 매니저 발렌틴의 연이은 이동으로 문을 연다. <퍼스널 쇼퍼> 역시 모린이란 여성이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사야스는 특히 두 작품에 이동의 이미지를 빼곡하게 배치하는데,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선 양가적 상태의 불안정성을 파고드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인기를 누린 마리아가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준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 무대에 다시 서게 되며 느끼는 불안을 담는다. 마리아가 맡게 된 역할은 당시 연기한 생기 넘치는 어린 ‘시그리드’ 역이 아니다. 시그리드를 사랑하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중년의 ‘헬레나’ 역이다. 마리아는 헬레나 역을 처음엔 강하게 거부하다가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열기가 식어감을 인지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발렌틴도 마리아에 비해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면엔 날카로운 불안을 안고 있다. 영화 서사의 중심엔 마리아가 있지만, 카메라는 마리아와 발렌틴을 교차해 비추며 이들 사이에 흐르는 체화된 공허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대부분의 이동도 두 사람이 함께 하다. 영화에서 이동의 이미지는 자주 노출되지만, 움직임은 다소 느슨한 편이다. 카메라는 그 리듬을 천천히 가져가며, 인물들의 불안정성을 점차 배가시켜 나간다. 1부의 시작은 기차 안, 그중에서도 가장 흔들리는 지점인 칸과 칸 사이의 통로에서 이뤄진다. 카메라는 통로에 선 채 왠지 조급해 보이는 발렌틴을 비춘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지만, 잘 들리지 않고 곧 끊어질 것만 같다. 2부는 마리아와 발렌틴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다 길을 잘못 드는 쇼트로 시작된다. 발렌틴이 마리아에게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고 말하자, 마리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돌연 꿈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심리적 혼란을 표출한다. 2부 중간엔 발렌틴의 드라이빙 쇼트가 이전의 이동보다 긴 호흡으로 그려진다. 발렌틴은 외출 후 새벽에 홀로 차를 타고 마리아가 머무는 곳으로 돌아간다. 이때 카메라는 차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 과정을 천천히 비추는 동시에 산 주변을 휘감고 있는 안개를 디졸브 기법으로 겹쳐 보인다. 발렌틴은 결국 차에서 내려 구토를 한다.

마리아와 발렌틴의 불안정성은 존재론적 한계로부터 비롯된다. 두 인물 모두 스스로 발열되기엔 제약을 갖고 있다. 그들의 직업은 각각 배우와 매니저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곧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마리아는 과거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무대에 올려준 감독에게 계속 얽매여 있다.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열기는 처음부터 외부 세계로부터의 ‘발견’에 의한 것이다. 1부에서 발렌틴과 함께 기차를 탔던 것도 마리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감독의 대리수상을 위해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먼 길을 가고 있다. 그 안에서 힘겹게 수상 소감도 준비한다. 2부 시작에 나온 발렌틴과의 이동도 감독이 생을 마감한 알프스의 외딴 지역 실스마리아를 찾아가, 감독이 집필한 연극 무대에 다시 오를 연습을 하기 위한 것이다. 발렌틴 역시 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리아가 감독과 같은 외부 세계에 의존해야 하는 것처럼, 발렌틴은 그보다 더 좁으면서도 절대적인 대상 마리아에 강력히 종속되어 있다. 발렌틴은 이를 의도적으로 전복하고 싶어하는데, 그 행위 자체가 그녀가 가진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누구보다 밀착된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 열기가 식어감을 인지하게 된다. 마리아는 발렌틴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의 신호를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다. 발렌틴은 매니저이기에 마리아에 들어오는 역할을 끊임없이 전달한다. 발렌틴이 소파에 누워 들어온 광고, 영화 등을 웃긴 표정으로 줄줄이 읊자, 마리아는 등을 보인 채 “싫어”를 연이어 내뱉는 쇼트는 이 미묘한 관계를 잘 드러낸다. 나아가 무엇보다 두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일으키는 가장 큰 추동력은 발렌틴의 저돌적인 태도로부터 나온다. 발렌틴은 마리아의 매니저라는 이유로 마리아와 동일한 의견을 내지 않는다. 과거 마리아가 맡았던 시그리드 역에 캐스팅 된 배우 조앤을 좋아하며, 그녀의 연기에 대해 칭찬한다. 조앤은 마리아의 영광의 열기가 옮겨간 새로운 젊음의 상징이다. 마리아 입장에선, 발렌틴이 자신과 조앤에 심리적으로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발렌틴이 조앤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면, 마리아가 어김없이 혼자 인터넷으로 조앤을 검색해 보는 쇼트는 그 불안을 잘 보여준다.

반대로 발렌틴에게 마리아의 반응이 곧 외부로부터의 신호다. 마리아는 발렌틴과 대사 연습을 주고 받으며 발렌틴의 젊음에 점차 사로잡히게 된다. 이로써 발렌틴은 점차 우위에 서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발렌틴은 마리아에게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인지하게 된다. 마리아의 역할 해석에 대해 반복해 의견을 내지만, 마리아는 이를 계속 배척한다. 발렌틴은 이 지점에서 한계를 느끼고, 갑자기 카메라 밖으로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의 이동 쇼트도 모두 끝나버린다. 둘은 구름의 아름답고도 거대한 이동이 이뤄지는, 연극 제목과 동일한 ‘말로야 스네이크’ 현상을 보기 위해 함께 산을 올랐었다. 그러나 발렌틴은 이곳에서 종적을 감추고, 마리아는 혼자 남겨진다. 마리아와 발렌틴의 열기는 그렇게 모두 사그라진 것처럼 보인다.

 

체념을 압도하는 욕망의 표상

<퍼스널 쇼퍼>는 다층적인 의미에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와 궤를 같이 한다. 돌연 종적을 감춰버렸던 발렌틴이 <퍼스널 쇼퍼> 안으로 들어와 배우 키라의 옷과 가방 등을 구매해주는 모린이 된 듯하다. 그리하여 발레틴으로서 미처 구현하지 못한 열기를 모린이 되어 보다 강렬하게 갈구하는 것 같다. 발렌틴을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퍼스널 쇼퍼>에서 모린 역을 맡은 것도 하나의 연결고리가 된다.

<퍼스널 쇼퍼>에 이르러 이동의 정도와 깊이도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퍼스널 쇼퍼>에서 이동은 그 횟수를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자주 반복된다. 주요 사건 사이에도 늘 모린이 이동을 하는 쇼트가 배치된다. 이동의 위력도 훨씬 크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이동이 욕망과 체념을 동시에 확장시켜가는 과정이라면, <퍼스널 쇼퍼>에선 하나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이동이 체념을 압도하는 욕망의 표상이자, 열기를 되찾기 위한 불쏘시개로 작동하는 것이다.

앞서 밝혔듯 이 작품도 이동 쇼트로 시작된다. 모린이 차를 타고 죽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가 살던 집으로 향하는 설정이다. 두 사람은 먼저 죽게 된 사람이 사후 세계로부터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었다. 모린은 루이스의 영혼이 신호를 보내올 것이라 믿고,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간다.

루이스의 죽음은 모린의 열기를 앗아간 주요 원인이다. 모린 스스로가 밝히듯 루이스는 자신이 늘 따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모린과 루이스는 사후 세계와 현실을 잇는 영매인데, 모린은 루이스가 자신보다 더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린이 보기에 루이스는 ‘자기 확신’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모린은 누군가가 루이스의 영혼을 보았냐고 물어볼 때마다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뭔가 느껴지지만 정확하진 않다며 혼란을 그대로 표출한다. 그리고 자신과 루이스를 비교하며, 루이스는 영매로서 분명한 확신을 가졌다고 말한다. 모린의 열기는 ‘쌍둥이’라는 분신과 같은 존재이자, 더 우월한 존재인 루이스를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모린은 따라할 대상을 잃었다.

그러나 곧 모린의 욕망은 보다 강력한 형태로 나타난다. 욕망은 사후 세계와 현실이란 두 갈래로 나눠져 증폭된다. 사후 세계로부터는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다. 루이스는 사라졌지만 루이스의 영혼을 통해 자신도 확신을 가지길 원한다. 루이스의 영혼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신호들이 오면, 모린이 격하게 화를 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실에선 자신이 계속 구매를 대행하고 있는 키라의 자리를 갈망한다. 영화는 모린과 키라와의 주종관계를 의도적으로 부각한다. 키라가 밀린 2주치 월급을 올려놨다며 남긴 메모를 모린이 움켜쥐고 가만히 보고 있기도 하고, 키라와 통화를 하며 구매 비용 처리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는 쇼트가 나오기도 한다.

모린은 기차, 자동차, 오토바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동수단으로 움직이는데, 공통점은 이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매번 ‘문’을 연다는 것이다. 루이스 집, 키라의 집, 키라를 대신해 옷을 사러간 매장의 문,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초대받은 호텔 방 등이다. 하지만 수많은 문을 열고도 모린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다. 스케치북에 반복해 자기만의 문을 그리는 행위는 자신의 욕망이 좀처럼 채워지지 않고 있으며, 더욱 갈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동을 할 때마다 모린에겐 더 큰 자극이 주어진다. 휴대폰을 통한 두가지 자극, 유튜브와 문자 대화다. 모린은 영혼을 실제 만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동을 하며 유튜브로 찾아본다. 모린은 스스로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하는 존재기에, 루이스 영혼을 만나는 방법조차도 다른 사람을 모방해 습득하려 한다. 이보다 더 큰 자극은 발신제한표시가 걸려 ‘Unknown’으로만 표시되어 나타나는 누군가와의 문자 대화다. 영화에서 문자 대화는 대부분 이동 중에 이뤄진다. 연속되는 움직임 안에서 문자 대화는 불규칙하게 개입하는데, 이는 모린을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심지어 첫 문자를 받는 순간부터 모린은 무너져 버린다. 고작 “난 널 알아”라는 단 한줄의 짧은 문장이다. 그러나 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어조는 확신없는 모린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모린은 여기에 “존재하긴 해요?”라고 반응한다. 이는 상대가 사후 세계에 있는지 여부를 떠나,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온전히 믿고 있음을 보여준다.

급기야 모린은 상대가 보내는 문자의 내용을 앞질러 욕망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금기 없인 욕망도 없지”란 말을 스스럼 없이 문자로 보내기도 하고, 키라의 집 옷장 문을 열고 그녀의 옷을 입어본 것을 먼저 고백 하기도 한다. 문자 속 인물이 호텔로 오라고 유인할 땐 키라의 반짝이는 옷을 차려입고 호텔로 향한다.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고, 앞으로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욕망은 좌절되고 만다. 하지만 이를 통해 폭발적인 화력을 품고 있음을 모린 스스로가 얼마나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잔존물에 생기를 더하다

아사야스의 시선은 때로 열기의 결과물에 머문다.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고민은 아사야스만의 정교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여름의 조각들>과 <논-픽션>에 깃들어 있다. 두 작품은 ‘시대’라는 거창한 틀 안에서 요동치는 사회적 화두들이 소규모 집단 안에 들어와 어떻게 파편화되어 흐르는지를 보여준다. <여름의 조각들>은 가족 안 세대, <논-픽션>은 더 좁혀진 부부라는 틀 안에서 미시적인 관점에서 다루는데, 그 결과물의 형태는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여름의 조각들>에선 개인이 소장했다가 덩그러니 남게 된 잔존물, <논-픽션>에선 각 인물들의 일상에 스며든 사회적 현상으로 그려진다.

<여름의 조각들> 서사의 중심에 선 잔존물은 어느 작은 집을 가득 채웠던 묵직한 미술품과 고가구들이다. 오랜 시간 수집하고 보관해 온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삼남매의 어머니 엘렌은 각 시대의 열기가 담긴 작품들을 가까운 지인들을 통해 모아왔다. 그런데 나이 든 엘렌에게 이 잔존물은 하나의 큰 걱정거리가 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식들이 이를 어떻게 처분할지 몰라서다. 엘렌은 이 작품들이 자신의 집에 고스란히 머무르며 열기를 그대로 품고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작품 관리를 장남 프레데릭과 딸 아드리엔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시작된 엘렌의 당부는 그동안 쉽게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말의 충격을 선사한다. 내용의 자극성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간결하게 정리되지 않은 장황한 설명을 현실에서 그대로 퍼올린다. 이런 말의 넘침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선 연극의 대사. <퍼스널 쇼퍼>에선 휴대폰 문자라는 파생적인 틀 안에서 이뤄졌기에 충격이 완화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여름의 조각들>과 <논-픽션>에선 이 틀조차도 제거한 채 여과없이 다룬다. 그 정도는 <논-픽션>에서 보다 심화되어 나타나는데, 아사야스는 이미 <여름의 조각들>에서부터 현실의 언어를 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엘렌이 한 당부의 말들은 자식들이 집을 떠남과 동시에 흩어져 버린다. 이는 이후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드러난다. 엘렌은 자식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자마자, 쓸쓸히 어둠 속에 앉아 가정부 엘로이즈에게 잔존물의 향방을 예감한 듯 말한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남을 ‘찌꺼기’들이 걱정 된다며. 이 거친 표현은 아무리 고귀한 열기를 품고 있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이를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다음 세대에겐 어떤 의미로 느껴질지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낸다.

 

엘렌의 예상처럼, 그녀의 죽음 이후 잔존물은 더 이상 그 집에 남아있지 못하고 외부로 보내진다.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강제적인 행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잔열의 이동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과정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잔존물을 둘러싼 각 인물들의 ‘이유있는 변명’ 때문일 것이다. 프레데릭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작품들을 어머니의 집에 그대로 보관하고 싶어한다. 이를 아드리엔, 남동생 제레미와 함께 논의하지만 다들 각각의 사정을 이야기하기에 급급하다. 아드리엔은 재혼을 할 것이며 프랑스에 오는 것조차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집도, 프랑스도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며 단정적으로 말한다. 제레미는 북경에 가서 살아야 하는데 추가 자금이 필요하다며, 어머니의 집을 매각하기 위한 사전 정보까지 이미 알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중 누구도 악의를 갖고 있지는 않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사정과 이해관계를 조금씩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쳐져 엘렌이 품어온 열기를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후 잔존물은 두 경로로 나눠져 이동한다. 엘렌의 집에 있던 작품들은 전문가들에 의해 감정을 받게 되는데, 이중 단 한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오르세 미술관으로 보내진다. 카메라는 오르세 미술관에 작품들이 전시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비춘다. 이를 바라보며 프레데릭의 아내는 진열을 잘했다고 하며, 전시 자체의 가치를 발견한다. 반면 프레데릭은 ‘갇힌 것 같다’며 안타까워 한다. 여러 의미를 담고 있지만, 어머니를 거쳐 사람들의 일상에 존재하던 작품이 자신의 세대에 이르러 결국 이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프레데릭은 작은 일탈을 감행한다. 오직 한 작품의 이동 경로를 바꿔버린다. 엘렌을 제외하곤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쌍둥이 꽃병이다. 주방 수납장 한켠에 있던 꽃병의 가치는 감정 나온 전문가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오르세 미술관에 나란히 전시될 운명에 처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집에 들른 엘로이즈에 의해 향방이 달라진다. 엘로이즈는 엘렌이 생전 좋아했던 꽃을 사들고 와 그 꽃병에 꽂는다. 꽃병의 산술적 가치를 논한 직후에 배치된 이 쇼트는 하나의 갈등을 만들어낼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비싼 꽃병에 함부로 물과 꽃을 담는 것은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또 그녀가 꽃병을 다루다가 깰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사야스는 이 장면에서 어떤 갈등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꽃병의 동선으로 영화의 주요 메시지를 전달한다. 엘로이즈가 꽃병을 다루는 걸 본 프레데릭의 표정엔 약간의 동요도 없다. 카메라도 이 꽃병에 인위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프레데릭은 그저 엘로이즈에게 가장 갖고 싶은 하나를 가져가라고 하고, 엘로이즈는 그 가치를 모른채 꽃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또 갈등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이 모든 예상을 뒤엎듯 프레데릭은 미소 짓는다. 결국 가장 뜨거운 열기를 간직한 쌍둥이 꽃병 중 하나는 엘렌의 집도, 오르세 미술관도 아닌 엘로이즈의 집으로 가게 된다.

엇갈린 쌍둥이 꽃병의 이동을 다룰 때 카메라도 상반된 움직임을 보인다. 엘로이즈가 가져간 꽃병은 물을 담기 직전에만 클로즈업 한다. 이렇게 긴장감을 형성한 후엔 카메라는 줄곧 꽃병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반면 오르세 미술관으로 간 남은 쌍둥이 꽃병은 투명한 수납장 안에 전시되어 있다. 프레데릭은 아내와 함께 이 꽃병을 바라보는데, 이때 카메라는 함께 멈춰 서서 갇혀 있는 꽃병을 한참동안 비춘다. 이 끈질긴 응시는 오히려 갑갑함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아사야스는 가장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으려 정해진 틀 안에 박제해 두는 것보다, 그 열기가 잊혀진다 하더라도 가만히 흘러가는대로 두길 원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프레데릭의 일탈엔 아사야스의 소탈하면서도 개방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중첩된 현상과 관계의 움직임

<논-픽션>에 이르러 아사야스의 시도는 보다 과감해진다. 영화 안 인물들의 이동을 억제함으로써 영화 밖 현상의 이동을 완성한다. 인물들의 이동은 강박적으로 느껴질만큼 대부분 제거된다. 이를 통해 아사야스는 대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 거대하고 근원적인 현상의 이동에 관객의 시선이 집중되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출판사 편집장 알랭과 소설가 레오나르가 만나자마자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대화는 10여분간 이어지는데, 그 사이 공간은 출판사에서 식당으로 단 한번 바뀌고 이동의 과정마저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폐쇄된 공간에서의 인물들의 움직임도 제한적이다. 둘은 고정된 자리에 앉아 계속 대화만 주고 받는다. 두 사람의 대화 직후엔 다섯명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쇼트 또한 알랭의 집 안에 제한돼 있다. 알랭과 그의 아내 셀레나, 지인들이 모인 것인데, 진지한 토론을 펼치는 동안 거실에서 미세하게 위치만 바뀐다. 다섯명의 대화가 끝난 후엔 다시 알랭과 셀레나 둘만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그 대화도 알랭의 집 안 침실에서 이뤄진다. 이토록 장대한 대화가 펼쳐지는 동안 카메라의 움직임도 단조롭다. 주체들의 쇼트와 역쇼트를 반복해 담아내는 게 전부다.

 

그러나 이 대화 안엔 커다란 열기의 이동이 깃들어 있다. 종이책은 위기를 맞았고, 전자책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시작했다. 책은 잘 보지 않지만 블로그, 트위터 등을 통해 수많은 문장이 쏟아지는 모순된 ‘글의 시대’도 도래했다. 이 모든 현상이 과연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존의 열기는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개인의 사유만으로는 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이 아닌가. 그런데 아사야스는 알랭과 레오나르가 만난 첫 쇼트부터 이 거대 담론을 쏟아내게 한다. 정답을 보여주기 함이 아니라,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 열기의 이동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단숨에 드러내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영화에서 현상의 이동은 개인간 관계의 이동으로도 비유된다. 알랭과 셀레나 부부, 레오나르와 발레리 부부, 여기에 로르라는 여인까지 총 다섯명이 교차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알랭은 출판사의 변화를 위해 영입한 디지털 전략 담당 로르와 바람을 피우고, 셀레나는 레오나르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다. 셀레나는 알랭의 외도를, 발레리는 레오나르의 외도를 확신하고 있다. 알랭 역시 셀레나의 외도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토록 복잡한 관계는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영화 밖 현상을 만들어내는 주체이자 열기의 이동 요인인 ‘대중’의 난해한 심리와 묘하게 겹쳐진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관계를 무너뜨릴 생각이 없다. 그 관계에 대한 옅은 회의감과 새로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공존하는 상태를 아슬아슬하게 즐길 뿐이다. 여기서 종이책을 외면할 마음은 없지만 전자책의 편리함에 매료된 대중 심리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부부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고 로르가 출판사를 떠나는 것도 영화 안팎의 현상과 이어진다. 영화 안에선 알랭의 출판사가 전자책에 집중하는 사이 오히려 종이책 매출이 늘어났고, 영화 밖에선 비슷한 회귀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인물들의 관계만큼이나 이들의 대화도 복잡하게 진행된다. 알랭은 레오나르의 소설 출간을 거절하면서 그 거절 사유를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고심한다. 레오나르가 이전 소설처럼 쓰길 원했냐고 물은 후, ‘회의’가 드냐고 재차 묻자 알랭은 모두 부정한다. 그런데 ‘의문’이란 단어를 제시하자 기다렸다는 듯 수긍한다. 이 단어는 알랭이 레오나르 소설에 대해 느끼는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다. 실제로는 진부하고 불편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레오나르의 기분을 크게 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일부 담은 ‘타협’하는 단어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만큼 난해하기에, 상대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는다. 레오나르는 ‘의문’을 거절의 단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출판 일정을 재차 묻는다.

관계의 회복은 오히려 타협하는 단어를 거부할 때 이뤄진다. 레오나르는 발레리에게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려 한다. 발레리는 상대는 정확히 모르지만 외도는 눈치채고 있다. 그러나 이를 굳이 상대로부터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은폐’나 ‘위선’이 있다고 믿냐는 레오나르의 질문에 발레리는 고백을 눈치채고, 그보다 ‘암묵’이 있음을 믿는다고 답한다. 그의 외도를 알지만 말려들고 싶지 않은, 회피하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레오나르는 이 경고에도 암묵을 깨뜨리며 상대가 셀레나였음을 알린다.

이 쇼트를 기점으로 영화에선 갑작스런 전환이 일어난다. 물리적 이동이 거의 없던 주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마치 이들의 활발한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레오나르와 발레리 부부가 한 스쿠터를 타고 사이좋게 달려오는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이들이 알랭가 셀레나 부부의 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이동 과정을 계속해 응시한다. 다소 당황스럽지만, 두 부부는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과 책 이야기를 한다. 이는 결국 열기를 회복하는 가장 어렵고도 쉬운 방법은 그 현상과 상대를 회피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암시한다.

 

스스로를 태우는 찬란한 문장

종국에 사그라지는 열기에 대해 아사야스가 내린 영화적 답변은 무엇일까. 하나는 발열의 주체였으나 그 열기를 잃어감에 무너지고 있는 자신을 향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다음 세대로의 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끄는 것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와 <퍼스널 쇼퍼>에서 제시한 답변은 전자에 해당한다. 두 영화는 시작이 비슷했듯, 마지막도 동일하다. 카메라가 이동의 주체로 환원하며 끝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무대 위에 오른 마리아를 비추는 것으로 종결된다. 연극의 막이 오르는 순간 끝나기 때문에, 잔열만이 남은 마리아가 이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쇼트를 직전에 배치한다. 마리아는 조앤에게 관객들이 자신이 맡은 헬레나 역에 시선을 좀더 둘 수 있도록 마지막 장면에서 헬레나를 응시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조앤은 당돌하게 이를 거절한다. 마리아는 조앤의 반응에 잠깐 멈칫하는데, 이는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고 조앤의 거절을 수용한다. 그 요구가 열기에 대한 집착임을 인지하고,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행위다. 그리고 무대가 시작되기 전 마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 미소엔 강렬한 집착을 벗어던진 홀가분함,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호젓함이 함께 스며 있다.

<퍼스널 쇼퍼>에선 카메라로 모린 자체를 가리켜, 욕망의 근원과 실체를 벗겨낸다. 모린은 루이스의 영혼도 찾지 못하고 키라도 살해 당하자 파리를 떠난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는 오만으로 향하는데, 여기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루이스 영혼의 신호를 받게 된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방문을 열었더니 유리컵이 허공에 떠 있는 걸 보게 된 것이다. 유리컵은 모린을 기다렸다는 듯 아래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난다. 이때부터 모린은 영혼에게 질문을 시작하는데, 모린의 질문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루이스 영혼임을 짐작할 수 있는 신호에도 만족하지 않고 평안한지, 누군지 재차 묻는다. 그러다 끝내 스스로에게 건네지 않았던 금지된 질문을 하고 만다. 영혼이 곧 자신인지를 물은 것이다. 그러자 강렬한 신호가 울려퍼지고 모린은 눈을 번쩍 뜬다. 그토록 깨고 싶었던 금기도, 금기를 깨뜨려 완성하고 싶었던 욕망도 모두 모린의 내부에 존재했음을 함축한다.

아사야스는 이처럼 통렬한 성찰을 제시하는가 하면, <여름의 조각들>과 <논-픽션>에선 보다 개방적인 문장을 완성한다. 주체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 방식이다. <여름의 조각들>엔 결말에 이르러 이전의 전개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질적인 쇼트가 나온다. 프레데릭이 딸 실비의 비행에 속상해 하는 장면이다. 실비는 고지식하고 정적인 프레데릭과 달리 과감한 성격에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닌다. 그런 실비는 갑자기 할머니 엘렌이 살던 집에 친구들을 떼로 데리고 간다. 다른 사람에게로 곧 집이 팔리기 전에 마지막 파티를 열기 위한 것이다. 이 파티는 엘렌이 보았더라면 기겁했을 정도로 시끄럽고 파격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실비는 남자친구의 손을 이끌고 할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곳으로 간다. 그리고 추억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미 떠나간 세대의 열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만 같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온기를 마음으로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논-픽션>도 다음 세대의 등장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다. 발레리가 레오나르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 설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레오나르, 그리고 그를 받아준 발레리는 아직 서툴지만 서서히 관계를 회복해 간다. 그 과정에서 갖게 된 아이는 이미 식어버린 줄 알았던 열기를 새롭게 지펴줄 가능성을 안고 있다.

아사야스가 완성한 문장은 이토록 따스한 희망을 품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잔열만을 품게 된 주체들은 어느 때보다 분주히 이동하며, 욕망하고 체념한다. 아사야스는 어쩌면 이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발열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굳이 외부로부터 열이 주어지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열이 옮겨가더라도 또 얼마든지 한껏 스스로를 태울 수 있는 법을 알려주며 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정책 및 기획 전공 박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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