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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기정체성과 의지정체성 - <헤로니모>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기정체성과 의지정체성 - <헤로니모>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01.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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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욕망은 기원적 정확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원적 정확성은 지정학적 근거를 중시 한다. 그래서 모든 이들의 이름에는 지명(본관)과 지형지세(underwood, underhill 등)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기원을 보장한다. 사람들은 변치 않는 땅을 통해 나의 정통성을 보장 받고 싶어 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적 욕망의 진실은 늘 다른 현실을 마주케 한다. 실제로 얼마 전 미국에서 유행했던 ‘조상찾기 DNA검사’가 불러온 사람들의 당혹감은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니 이렇게 고쳐 말할 수도 있겠다. 기원에 대한 욕망은 가끔 ‘자기확신’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일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여기에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기원의 욕망에서 좌절이 오고 자기확신에서조차 혼란이 오게 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가.

 

영화<헤로니모>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의 마음과 그 변화를 추적한다. 기원의 욕망이 좌절되면 민족정체성이 무너지고, 자기확신에 혼란이 오게되면 국가정체성이 흔들린다. 민족과 국가 모두에게 자신의 기원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이 주변인임을 자각하게 되면 무엇을 바라보게 되는지 이 영화는 그 과정을 천천히 뒤쫓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쿠바 속 한인들의 정체성 문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포의 영역과 다른 궤를 그린다. 쿠바혁명의 공과를 이뤄낸 한인, 그리고 쿠바인이었던 자신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헤로니모 임’의 변화 지점은 우리에게 전에 없던 의문부호를 과감하게 선사한다.

그러나 <헤로니모>를 더 중요한 영화로 만드는 것은 ‘자아’와 ‘국가’에 대한 통찰력이다. ‘헤로니모 임’과 쿠바라는 나라에서 오는 ‘차이’는 쿠바인으로 살고 있던 ‘헤로니모 임’의 자아로부터 의문이 발생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는 한국인인데 불행한 역사로 인해 쿠바인의 정체성으로 태어나고 말았다는 것. 그러고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또 다른 헤로니모를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한국인의 내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왜 끝까지 한국인임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가?’ 사실 그는 자신의 내적 정체성을 한국인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반면, 그는 쿠바인으로 보이기를 원하여 어떤 식으로든 이를 드러내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그는 한국인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쿠바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제3자의 눈에는 모호한 존재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헤로니모에 대해 취하는 이런 태도는 곧 국가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헤로니모 임>이 아니라 <헤로니모>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 제목-이름은, 이국적 뉘앙스를 통해 기원적 욕망을 회복하려는 듯 보이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 기원은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로니모의 ‘한국인 되기’는 절절한 혼란이 된다. 이 일은 곧 비극과 같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런 비극은 늘 어떤 실천을 이끈다. 비극과 만난 실천은 영화 <헤로니모>에서 ‘보편’ 내지 ‘본질’에 맞닿으려는 의지가 된다. 헤로니모는 이런 의지적 실천을 정체성 확인으로 바꾸려 하는데 이 때 전후석 감독의 카메라는 그의 이런 실천을 가치 있는 혼란으로 바꿔준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나니 그는 쿠바인으로서 위대한 사람이었음에도 한국인임을 외면한 사람이 아닌 게 된다. 헤로니모 임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자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는 단 한 번도 한국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쿠바-한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국가와 민족을 이론적으로 말하기는 쉽다. 정체성의 의미를 통해 각각의 의미를 분별하면 간단하게 정리될 일이다. 그러나 영화 <헤로니모>의 의미는 재외동포라는 말로 이해하는, 소위 국가와 민족의 진부한 용법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식의 이해는 헤로니모와 같이 ‘기원적 지형’에서 벗어나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낸 자의 가치를 축소시킨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정리는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불편한 방향으로 흘러갈 여지를 크게 한다. ‘그래도 결국 한국인’이라거나, ‘위대한 한국인’이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틀리다. 이런 이해보다는, 국가와 자아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격차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혼란이 사유의 고통이 될 때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를 통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특수한 인물을 재현하는 다큐멘터리가 반드시 정리해야하는 난제다. 이런 맥락에서 헤로니모를 보면 어떤 지점에서 두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묻어들어 가면서 ‘인간’의 문제로 넘어가는지 그리고 두 정체성의 충돌 속에서 ‘헤로니모’가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바라보는 것,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이 영화에서 직시해야 할 단면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곧 이 영화가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 이외 정체성 하나를 더 추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정체성’이다. 게다가 자세히 그 안을 들여다보면 갑자기 정체성 하나가 더 튀오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의지의 정체성’이다. 이 두 정체성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인간의 문제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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