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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강제된 경계로부터의 탈주를 소망하다 -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시 단상
[이병국의 문화톡톡] 강제된 경계로부터의 탈주를 소망하다 -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시 단상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20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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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해 첫째 주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으며 보낸다. 십 수 년을 반복해 오다보니 삶의 패턴으로 정착되었다. ‘문단’을 둘러싼 특정 집단의 문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신춘문예 공모는 - 일종의 선택과 배제라는 경계가 축제의 형태로 - 모든 독자에게 열린 문화의 장인 것처럼 보인다. 필자에게 연말은 신춘문예에 투고한 글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며 마무리하는 기대와 절망의 시간이었고 응답을 받은 작품들을 읽어야만 했던 연초는 시기와 질투, 비하와 자괴의 시간이었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신춘문예 시즌은 이른바 ‘문청’에서 ‘작가’로 호명되어 인정받느냐 다음해로 지난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느냐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몇 해 전, ‘작가에 대한 인정 형식으로서의 등단과 청탁 제도’를 요청받아 쓴 「상상된 믿음에서 탈영토화하기」(『내일을 여는 작가』73호, 2018)라는 글에서 등단과 청탁 제도에 대한 비판에서도 고백했다시피 필자 역시 오랜 시간 투고의 기대와 호명되지 못한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어찌하여 겨우 호명되었으나, 신춘문예는 문예지와 달리 문단에 안착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요구하고 있음을 경험을 통해 깨닫기도 했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써 역사적 기능을 수행해 오는 한편에서 일정한 경향의 작품들만 선발되고 기존의 문학관만을 답습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신춘문예는 문학장에 기입되고자 하는 ‘문청’들이 ‘작가’로서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인정받고자 수행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해 100여 개의 공모전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 고착화된 영토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논의의 필요성은 다른 곳에서 이야기했으니 여기에서 반복할 이유는 없겠다. 여기서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어보고자 한다. 여러 신문사의 당선작 중 필자가 주목한 작품은 세 편이다.

 

2.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나는 왜 쓰는가』, 이한중 옮김, 한계레출판사, 2010)라는 글에서 자신의 출발점은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이며 자신이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단적으로 말해 정치적인 글쓰기를 시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학적, 지적 진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그에 따르면 작가란 자신의 미학적 열정을 바탕으로 한 글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이번 신춘문예 당선자 중 두 명의 시인도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 개진하고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1월 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이원석 시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차도하 시인은 트위터를 통해 『2020년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원고를 싣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출판한 출판사의 이사 중 한 명이 #문단_내_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었으며 2017년 강제추행죄로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게재 거부는 - 지난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성다영 시인의 행동에 이어 -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저항한 정치적, 윤리적 결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 차도하 시인의 당선작은 시인의 입장을 보다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는 시라 주목된다. 읽어보자.

 

사진출처 - [저작권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삽화. 송정근 기자
사진출처 - [저작권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삽화. 송정근 기자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 차도하, 「침착하게 사랑하기」(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 시에 대한 심사평에서 서효인 시인은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고 하였다. 젠더폭력을 다루는 이 시가 보여주는 용기는 최근의 문학적 경향과 흐름을 같이 한다.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신’이다. ‘신’은 - 명명에서부터 이미 위계적 관계가 설정되어 어느 정도 규범적 관념이 전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 시적 주체인 ‘나’를 타자의 자리에 옮겨놓는 강력한 힘을 지닌 폭력적 존재를 체현하고 있다. ‘나’와 ‘신’의 관계는 불안정하다. 이를 단순히 폭력에 의한 억압적 관계의 양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신은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강변으로 ‘나’를 이끈다. 그곳에서 신은 “몸에 든 멍”에 대해 “신앙으로 설명하”려 든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여도 그것은 자신의 사랑을 ‘나’에게 강제하는 또 다른 폭력의 양태일 뿐이다. 자신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다른 연인의 경우와 비교해 사랑에 대해 묻는 ‘나’의 질문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의심하고 존재를 교란하는 저항이라서 ‘신’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또다시 폭력을 행사한다.

‘나’는 ‘신’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폭력을 당하면서도 사랑을 묻는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신의 사랑으로부터 찾고자 한다. 그러나 ‘나’의 질문은 아이러니하다. 신의 사랑이 자신에게만 향한다면 괜찮은 것인가. 사랑은 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가. 폭력의 구조와 위계적 관계를 체화한 존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인가. 어떤 면에서 ‘나’가 사랑을 묻는 행위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밝혀 ‘나’와 ‘신’의 위계적 관계를 전복시키려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나’를 증명하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할 당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 사소한 질문일지라도 이는 잘못된 관계를 허무는 전진기지가 된다. 부조리한 관계를 유지할 이유에 대해 자신이 대답하지 못할 때, 비로소 ‘나’는 그 관계를 허물 수 있게 될 것이다. 허나 ‘나’가 존중받는 삶은 개별적 존재의 노력으로 성취되기는 어렵다. 그러니 부조리한 관계를 폭로함으로써 이를 공론화하여 인식을 재고하도록 이끄는 수밖에 없다. 타인이 없는 곳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폭력을 폭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그 경계를 넘어서기는 쉽지가 않다. 자신을 “침착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3.

어쩌면 그것은 일상을 지키는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문제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서정에 침잠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일상을 재정립하는 것은 폭력적 세계가 강제하는 규범을 체화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주체를 소외시키고 배제시켜 타자화하려는 일체의 강제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동균 시인의 시를 보자.

 

사진출처 - 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사진출처 - 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이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음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도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라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던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옮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옮기는 사람이 없는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 김동균, 「우유를 따르는 사람」(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우유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창가에도 있고 TV나 책에서도 ‘당신’은 존재한다. 그곳에서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고 있다. 우유를 따르는 일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참으로 “성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시인은 “우유를 따르는”이라는 구절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당신’의 행위를 확장시킨다. 심사평에서 말하듯 시인은 “가상과 가정의 세계를 덧붙여 무늬를 짜” “삶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흔”든다. “우유를 따르는” 삶은 일상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정태화된 일상이지만, 그러한 일상의 반복은 항상성을 지닌 채 주체를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세계로부터 강제된 것일지라도 반복을 수행함으로써 주체는 다층적인 층위에 존재하게 된다. 그곳에서 단일한 일을 한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우유를 따르는 행위가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대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수행성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모색하고자 하는 의지에 가깝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가상과 가정’의 세계일지언정 무엇으로부터도 간섭 받지 않음으로써 일상을 수행하는 반복은 이를 통해 주체를 재정립하려는 의지에 대한 절대적이고 단호한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주체는 다층적 층위에서 사유될 수 있다. 범박한 곳에서부터 숭고한 곳까지. 실내에서 비롯된 ‘당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나아가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친다. “부드러운 빛이 쏟아”진다. 제한된 존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외부로 뻗어나가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 반드시 좋거나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주체의 불안정함을 은폐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우유를 따르는 일을 시인의 시 쓰기에 빗대어 읽어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춘문예라는 인정 절차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시를 씀으로써 시적 주체로서의 자기 증명을 수행하고자 하는 고단함이 읽힌다고 하면 과장일까. 범속과 숭고의 경계는 쓰는 존재의 일상을 위태롭게 붙잡는 일에서부터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어떤 지점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 경계는 없으면서 있는, 감각의 저편에서 끊임없이 의식되기만 하는 불가지의 공간일 뿐인지도 모른다.

 

4.

우리는 불가지의 공간을 향한 시인의 시 쓰는 행위가 그에게 주어진 규범을 반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승인되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체는 언제나 결여된 상태에 있다. 젠더폭력을 경험하는 시적 주체나 일상을 반복하는 시적 주체나 그들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는 본질이 없는 현상만으로 주체의 결여를 메우려 하는 무의미한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같은 처지에 있는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주체로 승인 받는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모든 것은 덤불 속에 감춰져 있”다. 이원석 시인은 경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결여된 존재로서의 주체의 불완전함을 묘파해 낸다.

 

사진출처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 블로그
사진출처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 블로그

모든 것은 덤불 속에 감춰져 있지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둡고 어렵고 어리고

나뭇가지에 헝클어진 머리칼에는 마른 잎들이 견디기 힘든

날들이 따라붙었지 매달리고 매만지고 메말라

찬 공기는 조금씩 뒤섞였어

침상에서 내려 딛은 발은 문 앞까지 낡은 마루가 삐걱이는

소리를 누르고 길고 고른 숨소리들

 

사이로 천천히 밀어내는 호숫가의 배

젖은 흙 다섯 발가락들 사이로 닿는 촉각 촉각 누르는

건반과 긴바늘 입술 위의 손가락

 

우거진 불이 덤불 속에 갇혀

머리를 숙이고 있지 포기하지 못한 자랑들이 엉켜 있는

낮은 덤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지 다물지 못하는 입으로

숨을 뱉으며 뒷걸음질 끝에 꿇은 무릎과 마른 잎 위의 몸뚱이

 

내가 들어 올리고 싶은 뿔은 덤불 속에 잠겨 있어

달리는 덤불을 보여 줄게

춤추는 작은 숲을

바닥을 움켜쥔 모든 뿌리와 함께

 

흰옷은 흙투성이

물은 차고 어두워 소스라치는 살갗

걸어들어오는 고요와 잠긴 청각이 듣는 물소리

물속을 만지면 물이 몸을 바꾸고 뒤집는 모양은

얼굴과 얼굴이 흐르고 잠기는 기억

길게 줄어드는 음이 끊기지 않는

몸에 선을 긋고 지나가지 손도 발도 없이

물의 틈을 찾아 결대로 몸을 틀며 가라앉는 숨

 

접촉경계혼란

 

피아노의 가장 낮은 건반을 무한히 두드리는

바닥

놓지 마 놓지 마

춤을 추는 팔과 파란

 

뒤집힌 호수 바닥 위에 검은 숲

 

그림자 속 덤불과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젓는 우거진 뿔과 큰 눈망울

진저리치며 흩날리는 입과 잎과 입김

 

호수 위엔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검은 물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숲엔 부러진 뿔과 나뭇가지

몸뚱이 위로 끝없이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

- 이원석,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적 주체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덤불 속에 감춰져 있”는 것들을 찾아 “어둡고 어렵고 어”린 길을 간다. 그 길에서 “매달리고 매만지고 메”마른 나뭇잎의 날들과 조우한다. 그런데 이 시 속의 시간은 조금 뒤틀려 있다. ‘나’가 길을 떠난 것이 먼저일까, “침상에서 내려 딛은 발”이 “문 앞”까지 간 것이 먼저일까. 시간의 선후를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어쩌면 ‘나’가 여전히 침상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심사평에서 제시된 것처럼 시인은 “현실과 꿈과 무의식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어떤 새로운 모험”을 시도한다. 이 시는 그 모험의 일차적 결과물이자 모험의 출발에 해당한다. 이제 막 “길고 고른 숨소리들// 사이로 천천히 밀어내는 호숫가의 배”에 올라선 것이기 때문이다. 꿈의 세계로 진입한 “내가 들어 올리고 싶은 뿔은 덤불 속에 잠겨 있”다. 덤불이 있는 숲은 시적 주체로 하여금 감각의 긴장을 경험하게 한다. 그것은 “몸을 바꾸고 뒤집”고 기억을 잠기게 한다. 이는 자신의 감각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의도된 전략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접촉경계혼란”을 겪는다.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는 세계에 대한 접촉에 실패하여 총체적 세계 인식이 불가능한 주체의 불안정한 모험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시라는 장르는 대부분 혼란스러운 상황에 의해 구축되는 환상적 세계를 경유하여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확정짓지 못해 강요된 공간을 향유해야만 하는 주체가 자신을 내파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의 시적 투사로 볼 수 있다. “뒤집힌 호수 바닥 위에 검은 숲”과 그 안에서 마주한 “검은 물”, “부러진 뿔과 나뭇가지”, “몸뚱이 위로 끝없이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는 주체의 불안이 투사된 것이다. “내가 들어 올리고 싶은 뿔”은 부러졌으며 “덤불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방법은 요원하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 억압된 것과 마주하여 부정된 나를 상상의 층위에서 현실의 층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계에 대한 주체의 불안은 세계와 자아의 경계를 무화시킨다. 이를 해소하고자 세계의 요구에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제된 것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시를 쓰는 행위는 시인의 삶을 손쉽게 만든다. 그러나 어떠한 시인도 그러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원석 시인의 시 속 앙장브망(enjambement)은 시적 주체의 감각이 뚜렷한 경계에 의해 구획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불안한 주체, 그 불안정한 감각이 어쩌면 주체로 하여금 “호숫가의 배”를 밀어내어 무화된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탈주야말로 주체가 수행해야 하는 자기증명의 방식이며 시인이 가져야 할 정치적 입장이 아닐까.

 

5.

진부한 표현이지만, 신춘문예 당선은 ‘문청’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닌 그 너머로 나아가는 출발지이다. 경계는 이쪽과 저쪽의 단절이 아니라 이음이다. 아니, 그것은 무엇도 아니다. 그저 없는데 있다고 상상된 자리일 뿐이다. 그곳에서부터 다시 수행되는 도약이야말로 현실적 실천의 층위에서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태일 것이다. 주어진 공간에서 자신만의 장소를 만드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제도, 그 강제된 경계를 돌파하여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모색할 수 있는 건 그 경계 위에 선 존재일 것이다. 앞에서 읽어 본 시인들뿐만 아니라 이 빛바랜 축제를 함께 겪어낸 다른 시인들 모두가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사족 같지만 여전히 부족한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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