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식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불균질적 여성영화, <과부춤>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식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불균질적 여성영화, <과부춤>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02.05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도시 빈민은 중요한 주인공이었다. 1980년에 개봉한 <바람불어 좋은 날>은 그 상징이 되는 영화다. <별들의 고향>(1974)을 통해 젊은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장호 감독은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함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중심에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상경한 젊은이들, 즉 도시 빈민이 있었다. 이후 한국영화는 도시 민민의 삶을 중심으로 한국사회 어두운 면과 계급 문제를 더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다루었다. 쪽방촌 사람들, 일용직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 창녀촌 여성과 남창부터 떠돌이 무직자까지, 영화에서 재현되는 도시 빈민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하층 계급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어둠의 자식들>(1981), <낮은 대로 임하소서>(1982), <바보선언>(1983) 등에서 도시 빈민을 직간접적으로 다루었던 이장호 감독은 1984년 <과부춤>을 선보인다. <과부춤>은 그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부장 남성의 부재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여배우의 성적 이미지를 주된 소재로 사용했던 198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난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여배우의 성적 이미지를 주된 소재로 사용했던 198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난다.

옴니버스 식으로 전개되는 전체 이야기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각각은 말숙 이야기, 동식 엄마 이야기, 과부들 이야기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말숙 이야기의 주인공인 말숙(이보희)은 두 남자에게 버림받고(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들로부터 착취를 당하고) 아기를 낳아 키우고 있는 여성이다. 싱글맘으로서 아기를 키우면서 살아가는데 한계를 느낀 말숙은 아기를 위해서라도 아무 남자하고든 결혼하겠다는 결심으로 결혼상담소를 찾았다가, 상담소 소장의 제안으로 결혼 사기에 가담하고 감옥에 가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식 엄마(박원숙)는 말숙의 올케다. 청소부 일을 하는 말숙 오빠와의 사이에서 고등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그녀는, 말숙이 언젠가 일본에서 큰 돈을 벌어 올 것이라 믿으며 산동네의 작은 집에서 말숙의 아이까지 돌본다. 하지만 말숙의 오빠가 사고로 죽으면서 동식 엄마는 갑자기 과부가 되고 빌딩 청소부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동식이네 옆방에는 시골에서 올라 온 과부가 사는데 방황하는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이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출소한 말숙은 동식 엄마와 동네 사람의 소개로 홀아비와 재혼을 하지만 교회의 광신도가 되어 재산을 바치고 결국 남편과도 다시 헤어진다. 다시 혼자가 된 말숙은 교회의 목사가 사기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있는 동네 무당을 발견한다. 말숙은 산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무당을 집으로 데려오고 동식 엄마와 옆방 과부의 도움으로 무당은 무사히 아이를 낳는다.

옴니버스 구조를 가지면서 <과부춤>의 이야기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갈등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캐릭터의 이분법이 확실한 영화들이 인물 간의 갈등을 통해 영화의 주제에 다가가는 것과 달리, <과부춤>은 인물의 경험과 감정, 산동네의 일상적인 삶에 집중하거나 빈민의 삶을 도시 부르주아의 삶과 대조시키는 몽타주를 이용한다. 영화 전체를 잇는 캐릭터인 말숙은 두 명의 일본 남성에게 속임을 당한다. 첫 남자는 결혼을 할 것처럼 했지만 유부남이었고, 위장 결혼을 해서라도 일본으로 가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던 남자는 사기꾼이었다. 일상인 듯 쉽게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결혼 사기단의 다른 멤버들과 달리, 거짓 만남 자리에 나간 말숙은 손톱자국이 남도록 두 손을 꼭 쥐거나 손에 쥔 포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한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득에 결혼 사기에 가담했지만 말숙이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기와 살아갈 방도를 찾아 백방으로 애쓰는 책임감 있고 착한 사람이긴 하지만 쉽게 믿고 쉽게 속는 그녀의 어수룩함은 자본주의 도시의 삶에 적합하지 않다. 영화에서 재현되거나 설명되지 않은 더 많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말숙 본인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 지 모른다. 그래서 결혼상담소라는 믿을 만한 곳을 찾은 것이고 소장에게 의지하여 다시 한 번 도시에서 생존해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에서 내쳐진 채 빈민의 삶에 갇혀 버린 말숙에게는 난감함과 무력함이 깃들어있는데, 이는 말숙을 연기한 배우 이보희의 창백하고 텅 빈 듯한 표정의 클로즈업에서 잘 전달된다.

 

말숙과 달리 동식 엄마는, 비록 산동네에 살지만, 도시에서의 생존 방식을 어느 정도 터득한 사람이다. 모든 가족이 한 방에서 지내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방 한 칸을 비워 세입자를 들인다. 그나마 세놓을 방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인데, 그것은 청소부 일을 하며 월급을 받는 남편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을 다니는 딸, 룸펜 아들과 함께 사는 시골에서 상경한 과부가 제때 세를 낼 수 있을 지는 확실치 않다. 아직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거리를 청소하고 길 한 모퉁이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청소부, 잠 깨는 약을 먹으면서까지 야근을 하는 여공, 그 어떤 프라이버시도 허락하지 않는 생활공간 등, 영화가 보여주는 도시 빈민의 삶은 세놓을 방 한 칸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더 강조하는 것은 하층 계급 인물들의 일상을 재현하는 중간 중간 삽입되는 도시의 또 다른 이면, 술집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대표되는 소비와 향락의 부르주아적 삶이다.

출산에 임박한 무당이 그려지는 영화의 엔딩에서는 부르주아에게 철저하게 소외받는 빈민이라는 계급 의식이 더욱 노골적으로 시각화된다. 고통스러워하며 도움을 청하는 무당을 후경에 두고 무당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급 승용차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전경에 배치하거나, 반대로 전경에 쓰러지는 무당과 후경에 부잣집으로 뛰어가는 사람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계급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 철저하게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과부춤>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은 1970년대 말 4년의 공백기를 보냈다. 이후 이장호 감독의 영화들은 확연히 달라졌다. 공백기 동안 이장호 감독은 소위 ‘의식화’되었다. 그 결과 감독의 관심사는 젊은이들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바뀌었다. <과부춤>은 그와 같은 계열의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가 소외된 삶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도시 빈민 계급의 현실을 다루는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라는 관점에서 <과부춤>은 매우 균질적인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빈민 계급에 대한 영화인가 여성에 대한 영화인가? 이 질문 자체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의 다양한 층위를 무시하고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작품을 평가하려는 의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부’라는 특정한 여성 집단에 주목하고 있는 영화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영화가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는 무엇인지, 미처 언급하지 않은 문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서로 충돌하며 파열을 만들어 내는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되짚으면서, 1980년대라는 시대나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 <과부춤>은 여성에 대한 영화인가? 이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분명히 여성이 처한 현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결혼 사기로 경찰서에 잡혀간 결혼상담소 소장은 여자들을 등쳐먹는 남자들과 돈 많은 여자들에게 빌붙으려는 남자들을 비난한다. 남편과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무당의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여자를 말리는 산동네 여자들은 그게 무당만의 잘못이냐며 남자들이 문제라고 한다. 이처럼 영화는 남성들의 도덕적 문제와 무책임함 등을 대사로 다루면서 여성의 입장을 일부 대변해 준다. 동식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후 공부를 잘 하던 딸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동식 엄마는 딸 보다 더 어린,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에게 가장이니까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경제를 책임지던 가부장이 사라진 가정에서 학업을 포기하고 경제활동에 뛰어 든 어린 딸의 이야기는 동식네 옆방의 과부네 서도 반복된다. 딸은 공장, 어머니는 시장 등에서 허드렛 일을 하지만 룸펜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리에 전념할 것만이 요구된다. 영화 속 이러한 요소는 여성이 처한 차별적 상황이 담겨 있다.

영화 곳곳에 여성을 향한 차별적 대우와 여성으로서 살아가기의 어려움, 그리고 여성을 대변하는 목소리 등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부’라는 특정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에는 중요한 결핍이 있다. 과부는 가부장에게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말숙이 나이 많은 사람도 상관없다며 살아가기 위한 방도로 결혼을 선택한 것은 가부장 중심의 사회에서 가부장에 속하지 못한 여성이 생존하는 것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영화 속 과부의 삶이 힘든 까닭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빈민 계급에 속해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이 여성을 소외시키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현실에 관심을 두는 영화로서 <과부춤>은 여성 주인공들이 도덕적이지 못한 남성들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가족을 위해 희생해왔다는 것은 의식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주의에 의한 이중적인 소외와 억압의 결과라는 것을 계급의 문제만큼 명백하게 인식하는데 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결국 <과부춤>은 계급과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혹은 관심)의 불균형 속에서 불균질적 여성영화가 된 셈이다.

 

 

글·성진수

영화학을 전공하고 영화에 대한 글과 논문을 쓰고 있으며,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