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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회 고발과 자아 찾기의 지난한 몸짓 - <다크 워터스>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회 고발과 자아 찾기의 지난한 몸짓 - <다크 워터스>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02.2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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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 영화의 인물들은 대부분 시대와의 불화에 직면해 있다. 그 갈등과 불화의 내용은 인종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억압, 금기 등이다. 인물들은 사회적 억압과 차별 등으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간다. 이때 헤인즈 감독이 인물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스펙트럼이 넓다.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과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처럼 실험적인 형식의 전기 영화가 있는가 하면,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과 <캐롤>(Carol)처럼 섬세하고 정제된 작품들이 있다. 어느 경우이든, 인물들은 억압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벗어나기 위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부림친다.

<다크 워터스>(Dark Waters)도 헤인즈 감독의 강고한 주제의식과 연결돼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인 미국 듀폰사의 독성 폐기물질(PFOA, 일명 C8) 유출이라는 실제 사건을 다룬다. 그런데 영화의 무게중심은 듀폰의 행태 고발보다 듀폰사와 맞서 싸우는 변호사 롭 빌럿의 행적에 있다. 즉 롭 빌럿이 변호사로서 듀폰과 싸우는 이유와 방식,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영화의 서사는 부도덕한 행위 고발과 진실 추구라는 대립구도로 전개된다. 그러나 기업비리 고발이라는 외투 깃을 살짝 들추면, 인물의 자아 정체성 찾기라는 헤인즈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날카롭게 빛난다.

이러한 특징은, 헤인즈 감독과 <스포트라이트>(Spotlight) 제작진이 의기투합한 결과이다. 헤인즈는 가수 데이비드 보위나 밥 딜런의 전기영화를 만든 경험이 있다. 실화를 다루는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게다가 <다크 워터스>는 롭 빌럿의 20년간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실존 인물의 삶과 현재진행형 사건을 다루는 전기 영화인 셈이다. 그리고 롭 빌럿이 듀폰의 음모와 부도덕을 파헤치는 과정은 <스포트라이트>의 기자들이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사건을 집요하게 추궁하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친다.

 

실화(실존인물)를 다루는 영화의 서사전개 방식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실화(실존인물)를 최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기자들이 사건을 취재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사실성, 객관성을 획득한다. 실화(실존인물)의 모티브만을 차용한 뒤, 감독이 이를 재해석해서 형상화할 수도 있다. <벨벳 골드마인>과 <아임 낫 데어>가 여기에 해당한다. 헤인즈 감독은 <아임 낫 데어>에서 흑인 어린이, 아르튀르 랭보, 여성, 웨스턴 카우보이 등을 등장시켜 밥 딜런의 다양한 면모를 주관적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형식이든 실험영화이든, 헤인즈 영화의 갈등 구조와 주제의식은 일정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억압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인물이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혹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차별 및 억압이라는 외적 요소와 그러한 환경에서 자아 정체성을 지키려는 인물의 내적 갈등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파 프롬 헤븐>에서 케이시가 극심한 인종차별 환경 속에서 흔들림 없이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고, <캐롤>에서 캐롤 에어드와 테레즈가 성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그러하다. 두 영화가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성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은, 이러한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헤인즈 영화에서 인물들은 결국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이를 꿋꿋이 지켜낸다. <다크 워터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다크 워터스>는 대형 로펌에서 대기업의 변호를 담당하는 파트너 변호사가 듀폰의 독성물질 유출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지방(웨스트버지니아)에서 태어나 그저 그런 로스쿨을 나온 롭 빌럿은 대형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이며, 임신 휴직 중인 아내의 직업도 변호사이다. 계급 사다리를 성공적으로 오른 상류층 가정이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인 성공 대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의 선택은 농부 태넌트가 할머니의 소개로 롭 빌럿을 찾아오면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헤인즈 감독은 롭 빌럿의 행적을 통해 듀폰의 부도덕한 행위를 고발한다. 듀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화학 전문가, 공무원도 포함된다.

 

이 지점에서 헤인즈 감독과 <스포트라이트> 제작진의 조합이 가져온 특징이 드러난다. 롭 빌럿은 젖소의 떼죽음, 기형아 출생, 이빨이 검게 변한 어린이, 마을에 퍼지기 시작한 중증 질병들의 원인 제공자인 듀폰의 책임을 끈질기게 파헤쳐나간다. <스포트라이트>의 탐사보도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듀폰의 방해와 로펌 내부의 반대, 4차례의 감봉 등 롭 빌럿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사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전 세계 미디어가 보도한 실화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싸움의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다. 헤인즈 감독은 그래서 인물의 내면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그런데 <다크 워터스>의 주인공은 왜 농부가 아니라 변호사일까? 목장주인 태넌트는 독성 물질의 최대 피해자이다. 그는 각종 자료를 수집해 비디오테이프에 담을 만큼 치밀하고, 지역의 모든 변호사를 찾아다닐 정도로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그는 독성물질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풍부하다. 따라서 농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영화의 갈등구도는 더욱 선명해지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도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헤인즈 감독은 사회 고발보다 인물의 내면에 더 관심이 있다. 그의 영화들이 사회적 억압과 차별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부인 태넌트는 평면적인 인물이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 영화의 서사는 평면적, 단선적인 틀 안에 갇힐 우려가 있다. 그는 진정한 자아 정체성 찾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계를 지닌 인물이다. 반면 롭 빌럿은 흙수저 출신 대형 로펌 변호사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다크 워터스>는 헤인즈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영토 안에 있는 작품인 것이다.

롭 빌럿은 할머니(고향)를 만난 뒤 듀폰 사건을 맡기로 결심한다. 그가 할머니의 집을 찾아갈 때는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태넌트의 농장은 롭 빌럿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고향에서 할머니를 만난 후 롭 빌럿은 아내를 설득하고, 듀폰과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중요한 잠재 고객인 듀폰사와 대립하는 과정은 진정한 자아 찾기의 험난한 여정이다. <다크 워터스>에서는 대형 로펌의 경영 전략과 시스템, 거대 기업, 동료 변호사들이 억압과 갈등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종차별이나 성소수자를 향한 억압적 시선이 대기업과 로펌으로 바뀐 셈이다.

<다크 워터스>의 서사는 사회 부조리 고발, 법정 드라마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인물의 내면과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하던 헤인즈 특유의 영화미학은 이전 작품보다 다소 약화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캐롤>은 인물들이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한걸음 한걸음씩 보여준다면, <다크 워터스>는 롭 빌럿의 변화와 열정적인 행적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걸음걸이로 드러낸다. 즉 <다크 워터스>는 헤인즈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직설적인 서사 전개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다만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는 언제나 틈이 있게 마련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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