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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불평등이 살아남는 방식
[이은지의 문화톡톡] 불평등이 살아남는 방식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3.0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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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노동자 출신이자 문화연구의 선구자인 리처드 호가트는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천착하여 1957년에 『교양의 효용』(오월의봄 2016)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영국사회에 노동자계급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민중문화가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상업 매체를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된 대중문화만이 남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른바 혁명의 주체로 호명되었던 노동자계급이 소비자본주의의 원동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로 대체된 오늘날 이러한 지적은 새삼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노동자계급이 없어지면 노동자 문화 또한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없어져서 노동자 문화가 없어진 것인지, 노동자 문화가 없어져서 노동자계급이 없어진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호가트의 서술은 명백히 후자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 노동자계급 특유의 관대함과 활력이 넘치던 역동적인 민중문화가 대량생산체제에 순응적인 하향평준화된 대중문화로 대체되는 과정은 민중이 대중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상통한다. 이제 대중문화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정형화된 코드로 한정되어 재현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야말로 계급성이 철저히 지워진 소비대중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라고 할 만하다.

비계급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대중문화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면서 계급성을 개인 내지 집단의 정체성으로 드러낼 가능성은 체계적으로 말살되었다. 심지어 그러한 노력은 세련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가령 통속드라마에서 재벌의 세계는 꾸준히 등장하는데 반해 노동자의 삶은 매력적인 소재로 환영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옥탑방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거나, 치킨집에서 닭을 튀기며 재기를 노리는 근면성실한 캐릭터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빈곤’을 대하는 시선이다. 전지구적으로 불평등이 극심한 오늘날 빈곤은 인구의 절대다수에게 해당되지만, 정작 대중매체에서는 빈곤을 지극히 수혜적으로만 접근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 몇 년 전 일본에서 대두된 ‘빈곤 때리기’는 빈곤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피가 낳은 폐해라고 할 만하다. 일본의 한 언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빈곤’은 언뜻 봐도 가난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이어야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충분히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질타로 이어진다. 가난하면서 만 원짜리 점심을 사 먹느냐, 스마트폰을 갖고 있느냐 하며 비난을 받는 것이다.

 

사진출처 : 국민일보
사진출처 : 국민일보

계급에서 신분으로

『아이들의 계급투쟁』(사계절 2019)의 저자 브래디 미카코는 일본에서 영국으로 이주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무료로 맡아주는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토니 블레어 정권 당시 영국 사회가 외국인 보육사를 고용하는 보육원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으로 다양한 인종이 함께 하는 보육 환경을 정책적으로 장려했으며, 자신도 그 덕분에 보육사로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브래디 미카코는 노동당의 복지 정책이 아이러니하게도 불평등에 대한 영국 사회의 인식을 악화시키는데도 일조했다고 설명한다. 토니 블레어 집권 당시 저소득층에게 생활수당을 무분별하게 지급한 결과 기본적인 생존능력을 기르기보다는 수당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언더 클래스’, 즉 기존의 노동자 계급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보수당 집권으로 수당 지원이 대폭 삭감되면서 이들은 극빈층의 삶에서 더욱더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2014년 영국의 한 채널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언더 클래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들을 향한 영국 사회의 분노를 조장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일하지 않고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연명하면서 큰 액정 TV를 갖고 있거나 맥주를 사먹는다며 돌을 던졌다.

 

사진출처 : www.express.co.uk
사진출처 : www.express.co.uk

빈곤은 사람들의 인식에서뿐 아니라 실제로 가난한 이들의 신체에도 각인되어 그들을 계속해서 빈곤의 굴레에 가둬놓는다. 2013년 영국 교육계의 보고에 따르면 빈곤층 아동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자연과 더불어 놀 기회가 다른 지역 아동에 비해 9분의 1에 불과하고, 비만율은 2~3배 높으며, 성장과 발달에 있어서 큰 격차를 보인다. 저자 또한 무상 보육원의 가난한 아이들보다 민간 어린이집의 저소득층 아이들이 종이접기 따위를 할 때 훨씬 손이 야물다는 것을 증언하며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정책 실패와 긴축 경제가 낳은 폐해는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로 전치되고 부각될 뿐이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빈곤 때리기와 빈곤 포르노다. 빈곤은 개인의 신체적 특성이나 도덕적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빈곤이 마치 그들에게 태생적으로 부여된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빈곤은 왜곡된 물질적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할 계급적 조건이 아니라, 가난하게 태어나서 가난하게 자라는 수밖에 없는 신분적 특성으로 변모하였다.

 

신분에서 자연으로

불평등을 계급적으로 타파할 가능성이 하층부에서 말살되고 있다면, 상층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셰이머스 라만 칸의 『특권』(후마니타스 2019)은 이에 대한 유의미한 관찰을 제시한다. 이민자 집안 출신인 저자는 자신이 다녔던 명문 사립 고등학교인 세인트폴 기숙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엘리트층의 재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부유층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특권이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엄청나게 투자한다.

 

사진출처 : sps.edu
사진출처 : sps.edu

‘귀족’으로 대변되는 과거 유럽의 구엘리트층이 배타적인 상류층 문화를 통해 다른 집단과 자신들을 ‘구별짓기’했다면, 오늘날 미국의 신엘리트층은 거의 모든 문화를 잡식성으로 소비하며 계급적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린다. 그들은 오페라도 듣고 갱스터 랩도 듣는다. 이처럼 모든 문화를 경계 없는 평평한 지대인 양 자유롭게 드나들며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그들을 다른 계급과 구별시켜주는 강력한 특권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푼돈을 모아 값비싼 와인을 한 병 사는 식으로는 결코 습득할 수 없는 신체적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나아가 이를 축적한 이들과의 반복적인 사회적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으로서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과목의 수업이 제공되는 이 기숙학교는 재능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 이곳에 들어올 수 있고 또 유의미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막대한 부를 계급재생산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이러한 특권은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선택과 능력주의의 외양을 가장한다. 일례로 저자는 실제로 학비를 대는 부모가 아니라 입학생이 입학 명부에 직접 서명하도록 하는 관행을 든다. 이런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학생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있게 된 것이 부모의 부나 가문의 명성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허구적) 감각을 체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족 중에 세인트폴 출신이 있어서 학교에 대한 정보를 줄줄이 꿰는 새내기들은 선배들에게 면박을 받는다. 노력을 통해 스스로 성취하지 않은 것을 과시하는 행동은 학생들 사이에서 배척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경험을 통해 이들은 위계적인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한편으로 그곳을 편안하게 느끼는 특별한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기숙학교가 그러한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곳이라는 사실, 나아가 이곳이 제공하는 기회를 극소수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체계적으로 삭제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취의 차이이다. 빈곤층의 신체에 가난이 낙인처럼 들러붙는다면, 상류층의 신체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각자가 노력하는 만큼 성공을 보장하는 무한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들판인 것처럼 반응하도록 주조된다. 불평등과 계급격차를 바탕으로 조성된 인위적인 환경이 그들에게는 곧 원래부터 주어진 환경인 자연과 같이 받아들여진다.

 

자연을 가장한 계급 매트릭스 허물기

이처럼 빈곤층이든 상류층이든 자신을 둘러싼 계급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체득하게 된 신체적‧정서적 특성들은 고스란히 개인의 됨됨이에 따른 것으로 전유된다. 이는 계급성에 대한 상상력이 마비된 대중문화의 전지구적인 파급력에 의한 것이자, 계급 간의 마주침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급의 지리적 게토화에 힘입은 것이다. 빈곤층은 주거비가 낮고 생활수준이 열악한 지역으로 내몰리고 다른 계급의 환경과는 단절된 상태로 성장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개인의 잘못이 아닌 계급적인 문제로 자각할 수 있는 역량을 박탈당한다.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기숙학교와 같은 인위적인 환경에 고립되어 성장하면서, 그들의 예외적인 계급성을 그들 개개인의 노력과 성취로 환원시키고, 그러한 계급성을 가능하게 하는 특권으로서의 주변 환경을 자연화시킨다.

위와 같이 불평등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그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상황들은 결국 인위적인 재조정을 통해 해소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서 노동당이 전폭적인 보육 정책을 시행하던 시절과 더불어 보수당이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한 시절에도 보육원에서 일했던 브래디 미카코의 경험은 그러한 인위적인 조정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다. 복지 기금이 풍부하던 시절 아이들은 계급도 인종도 초월하여 어우러지는 가운데 함께 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반면 긴축 재정 시절에 접어들면서 보육원은 이민자들의 자녀를 맡아주는 탁아소로 전락하고, 돌봐줄 아이들이 줄어든 보육원은 빈곤층에 음식을 배급하는 푸드뱅크로 바뀌고 만다. 빈곤층은 수당이 삭감되면서 아이를 양육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사회복지사로 대표되는 시스템에 아이를 빼앗기고, 중산층은 자신들과 비슷한 생활수준의 아이들만 다니는 민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활발히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계급성을 정체화할 수 있는 환경,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계급적 문제로 사유할 수 있는 환경, 나아가 계급 간 이동을 유연하게 만들어 계급 간 격차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우리가 시급히 조성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이는 영원히 가난하게, 부유한 이는 영원히 부유하게 만드는, 즉 불평등의 수혜를 입는 이들에게만 유리한 가짜 낙원은 전방위적으로 폭로되고 또 허물어져야 한다.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2014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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