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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으로 마주한 인간 존재론
버섯으로 마주한 인간 존재론
  • 김수정
  • 승인 2020.03.02 2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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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만나러 부모님댁으로 가는 길은 세상 만사로부터의 자유다. 마음 편치 않은 일을 맞닥뜨리는 날일지라도 개와 보내는 시간은 온갖 번잡한 감정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날도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부터 나의 개와 함께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서니 보리수 나무 아래 놓인 바위 위에 가지런히 누운 버섯들이 싱싱함을 뿜으며 눈길을 잡아끈다. 살아숨쉬고 있는듯 탱탱하고 불순한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의 입자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듯 청정한 모습으로. 오늘 저녁 식탁에 샐러드로 올려진 버섯을 떠올린 순간, 엄마께서 이르시기를 ㅇㅇ아주머니댁에서 온 것이란다. 갑자기 아무 죄 없는 버섯이 달리 보인다. 그 속에 나를 해하려는 어떤 악한 성분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버섯의 부드러운 유혹으로부터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ㅇㅇ아주머니는 부모님댁에서 200m 거리, 지척에 사시는 동네주민인데 대략 일년 전 그분과 나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분은 나에게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피인물이 되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그 사건은 내면의 감정을 촉발시켰고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자라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치부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왜 부모님댁으로 가는 길은 이 곳을 경유하는 경로 밖에 없는지, 다른 행로로 길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아예 그 집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다니는 중이다. 엄마는 세상사 살다 보면 인간은 크고 작은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니 이제는 없었던 일로 하고 마음 편하게 대하는 것은 어떠한가 권유하신다. 내키지 않는 마음이 들던 차에 목 빼고 나를 기다리던 개 늠름이와 마침 눈이 마주친 나는 집 앞의 숲으로 냉큼 달아났다.

Homma Takashi 作 

 

자주 지나다니던 익숙한 산책길을 지나는 중에 나무 밑둥에 자리하고 있는 것에 눈길이 간다. 버섯 삼형제. 좀전에 집 마당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운을 전하는 버섯을 앞에 두고 가던 길을 멈춘 채 들여다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없었던 듯 한데 대체 어떻게 만들어져 저런 외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내부 작용으로 성큼 자라나 어느새 고유한 형체를 드러내는 버섯의 신비를 느끼는 그 순간, 버섯은 인간적인 어떤 것들을 연상시킨다.

내면에 뿌리내린 감정과 생각들, 그것들이 특정한 모양새로 자라나 타인과의 관계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어떤 기운들.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돋아나 자라나서는 온갖 희한한 색깔과 모양으로 그 존재의 발생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만드는 버섯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조금 전에 마당에서 마주했던 내 마음 속의 미움 혹은 원한이 불현듯 떠올랐다.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섯에 대한 나의 개인적 입장은, 지금껏 좋아하는 식재료로서는 순위를 다퉈왔으며 외양에 대한 미적 취향의 측면에서 봐도 선호하는 생물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버섯에서 하필 미움과 원한이라니. 어떤 야생의 숲 기운이 뿌리로부터 들어와 저 버섯의 정신과 나의 정신을 관통하여 좌지우지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괴이한 생각과 함께 과거에 들었던 어느 버섯광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계 사람들에게 야생버섯 중독 사례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와도 연결되는, 버섯에 대한 문화사적 관념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국을 위시한 앵글로색슨의 문화권에서는 버섯이 피해야 할 해악의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하는데 이는 영어권 문학에서 버섯이 죽음과 부패의 이미지로 그려지곤 하는 데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그 예로 아서 코난 도일은 ‘괴물 같이 생긴’, ‘땅으로부터 죽음이 솟아난 것 같은 모양’ 등으로 버섯의 형체를 묘사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도 버섯을 혐오하고 피하도록 교육을 시킨다고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버섯 두려움증(fungusphobia)을 유발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유럽대륙에서부터 러시아를 거쳐 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버섯에 친화적인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러시아 작가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는 벌칙으로 버섯을 따오라는 지시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버섯에 친화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버섯을 두려워하는 문화권에서는 버섯을 멀리하는 까닭에 버섯에 대한 연구가 아주 부진한 대신 독버섯으로 인한 사고는 극히 드문 편인 반면, 버섯을 좋아라고 찾아다니는 문화권에서는 그에 대한 실험과 각종 요리법 개발 등 활발한 버섯 연구가 이어지고 그만큼 야생 독버섯으로 인한 중독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게 된다.

 

버섯을 바라보는 상반된 관점은 각각 다른 문화적 태도를 낳고 그것은 상이한 결말의 차이로 이어진다. 버섯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인간이 자신의 감정이나 관념, 그리고 그것의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적 본질을 대하는 태도에 적용해본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이 인간의 삶에 유익한 것일까? 삶이 진행 중인 인간으로서는 답을 낼 수 없는 단편적인 질문이다. 치명적인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되거나 혹은 위험에 휘말려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몸소 체험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불편함을 유발하는 어떤 것을 나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덮어두고 살아가는 편안함을 유지하거나. 그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결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 선택의 당사자이며, 개중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든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갈림길의 결론이 다다르는 차이의 관건은 내가 몸 속에 받아들인 그 버섯이 독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이다.

애석하게도 감식안이 있는 버섯전문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간은 버섯을 집어삼키기 전에는 그 여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버섯을 들여다보며 내 속에 자리잡은 미움의 존재를 떠올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살아있는 내내 버섯처럼 자라나는 감정들과 그 결과들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떠안은 인간이 안쓰러워지는 지점이다.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 개인들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되어온 집단사회의 이념들이나 고상한 형이상학적 가치와 명제들이 있다. 그러나 개인들의 삶에는 일상의 차원에서 비할 바 없이 자잘한 생각과 감정들이 존재하는데 살다보면 주로 이런 것들이 인생을 호령하여 개인들의 역사를 직조해간다.

때로는 인생이 지나는 길목 어느 구간에서 인간을 예측불가한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독버섯을 만난 듯 가볍지 않은 대상이 된다. 우리가 역사의 기록으로 접하는 크나큰 역사적 회오리바람 중에 개인들의 자잘한 감정에서 연유하게 된 사건들이 얼마나 될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한갓 자신의 마음 속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거나 온전히 다루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유영하다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고 떠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그 속을 알 수 없는 야생 버섯처럼 여기저기서 자라나고 있는 인간의 마음들은 결국 다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연의 근원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던지다 답없이 먼저 떠나버린 시인 네루다의 말들이 귀 속에 왱왱거린다. 숲길을 걷다 잠시 버섯 앞에 함께 멈춰서 있는 개의 귀에 대고 비장한 감정을 실어 나직하게 읊어준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도 못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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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nabiyaa@empas.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