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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코로나19와 불안
[이병국의 문화톡톡] 코로나19와 불안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0.03.16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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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코로나19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게 늘어선 줄은 일주일에 두 장밖에 살 수 없는 마스크가 나를 보호해주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일 테고, 신천지라는 이름에 경악하며 그들이 머물다 지나간 곳을 찾아 밝히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폐쇄성과 사이비성에 기반을 둔 채 정부의 방역망을 교란시켜 누군가의 댓글처럼 테러리스트적인 면모를 보이는 데서 비롯된 마음일 수도 있다. 물론 신천지와 관련 없는 확진자의 동선을 보며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추켜세우는 것도 그렇다. 1987년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한 미 증시나 18년 만에 서킷 브레이커 걸린 우리나라 증시의 폭락은 공포와 불안이 장기화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는 이른바 대창궐, 팬데믹(Pandemic)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코로나19 병원체_사진출처:다음백과
코로나19 병원체_사진출처:다음백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던가. 질병 감염에 관한 영화와 좀비 드라마를 성지 순례하듯 찾아보는 경향도 여기에 있겠다. 다행히 괴질에 의한 질병이 아니기에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처럼 치료약을 개발할 것이라는 경험적 믿음은 있다. 비록 마스크가 품절되었다는 말에 약사를 낫으로 위협한 이가 여전히 존재할 테지만 말이다.

 

불안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경험하는 심리적 반응으로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 등과 더불어 혼용하여 쓰는 용어이다. 불안(不安)은 말 그대로 ‘편안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뚜렷한 원인 없이 느끼는 감정으로 분명하고도 실제적인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생기는 공포와 구별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공포가 질병처럼 구체적인 어떤 것이나 위험, 고통, 적 등의 일정한 대상과 관계되어 그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불안은 객관적으로 볼 때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며 자신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내면의 주관적인 감정충돌의 산물이기에 극복이 불가능하다. 불안은 그 강도를 줄일 수 있을 뿐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는 공포의 대상이지 불안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 눈에 쉽게 띄는 가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위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양상은 공포보다는 불안에 가깝다. 왜 그런 것일까.

사진출처 : 네이버블로그 pickpick123
사진출처 : 네이버블로그 pickpick123

불안은 소외·욕망·무관심·타자·생태 등과 더불어 가장 현대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1) 프로이트는 초기 연구에서 불안을 성행위의 중단으로 인해 리비도(libido)가 방출되지 못하여 생긴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이란 글을 통해 이를 수정하며 불안을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정의한다. 불안은 위험상태의 등장을 예고함으로써 위험상황을 효과적으로 피하거나 방어할 수 있도록 자아가 보내는 신호라는 것이다.2)

 

그는 여러 가지 불안의 양태들을 병리학적 측면에서 기술하면서 불안을 성적 만족의 결핍과 자아 만족의 결핍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불안은 ‘본질적 결핍’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을 인간 존재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여 삶의 한 부분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불안의 소재지로 보았다. 주체가 경험한 적 있었던 위험 상황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상기되면 자아는 이러한 위험 상황에 대비하도록 주체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는데, 이것이 바로 불안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불안 상태가 흥분의 증가와 특별한 경로를 따르는 해소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포함하는 어떤 경험의 재현이라면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생겨나는 것이 증상이다. 증상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다면 사실상 위험이 구체화된다. 반대로 증상의 형성은 위험 상황을 종식시킨다.

프로이트_사진출처 : 다음백과
프로이트_사진출처 : 다음백과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증상이 신경증인데, 신경증적 불안은 현실적 불안과는 달리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불안을 의미한다. 불안은 위험에 직면해서 자기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경험된 이러한 무력한 상황을 외상성 상황이라고 부른다. 실제의 위험은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오지만, 신경증적 위험은 본능적 욕구로부터 온다. 자아는 이러한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불안을 불러오고 불안 반응의 도움을 받아 위험을 방어하게 되는 것이다.3) 하지만 위험에 대한 방어는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을 따져 그들을 비난하는 혐오로 전이되기도 한다. 나와는 다른 타자로 분리하여 자신의 무력을 상쇄하고자 그들을 억압하려 드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은 억압 메커니즘의 원인이 된다. 억압에서 불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억압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거세불안을 불안의 원형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형태의 불안을 거세불안으로 환원하는 단순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물학적 기관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사랑의 상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라는 좀 더 실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4) 어찌 보면, 코로나19는 단지 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데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라 그로 인해 존재가 맞닥뜨리게 되는 고립의 상황, 자신의 무력함을 감당해야 하는 데에서 비롯된 불안을 불러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캉은 인간의 언어활동과 무의식의 상관성에 관심을 보여 왔는데 이를 크게 상상계, 상징계, 실재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상상계는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는 주관적인 착각과 오인의 영역이고, 상징계는 언어에 의해 매개 되는 법과 규범의 질서이며, 실재는 상징화되지 않고 남아 상징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잉여 또는 상징적 질서의 작동을 방해하는 논리적 모순이다.

 

불안과 관련하여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은 주체 탄생의 과정 즉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전이 과정과 상징계와 실재의 경계에서 주체가 느끼는 욕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사랑의 상실의 불안’을 ‘타자의 욕망 혹은 향유에 대한 불안’으로 재해석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불안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충동의 요구’(Triebanspruch)이다. 라캉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확대해서 불안의 대상은 타자의 욕망(désir) 혹은 향유(享有, jouissance)라고 말한다.

라캉_사진출처 : 위키백과
라캉_사진출처 : 위키백과

라캉에 따르면 불안의 본원적 모습은 사랑의 대상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주체가 가늠할 수 없는 타자의 욕망, 그리고 주체를 위협하는 전능한 타자의 향유 앞에서 느끼는 정서(Affekt)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의 불안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욕망 개념이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이를 벗어나고 싶은 다른 욕망을 발생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욕망은 환유적 그물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상징적 차원에 위치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인간은 ‘물질’로서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욕망하는 존재인 타자를 욕망한다. 불안은 이러한 욕망하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생겨난다. 즉, 주체가 욕망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욕망과 향유를 알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기 때문에 불안이 생겨난다는 것이다.5) 따라서 라캉에게 욕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불안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이란 ‘결여의 가능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상징계 속에 거주하는 인간은 절대적 향유라는 낙원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불안은 보편적인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재하는 근원적 정서가 된다. 인간에게 ‘이상적인’ 안정성, 현존의 안정성이란 결여 없는 만족이 아니라, 부재·욕망·자유와 더불어 주어지는 ‘불안스러운’ 안정성이다. 이때 주체는 신경증으로 도피함으로써 결여를 메우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경증 환자가 불안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신경증이 심화되면 ‘최악의’ 불안, ‘결여의 결여’의 불안, 정신병적 불안이 생길 수 있다.

 

라캉은 불안을 통해 향유의 주체에서 욕망의 주체로 탄생하는 과정을 나눗셈의 비유로 설명한다(A/S). 우선 주체는 ‘신비적인 타자’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이의 완벽한 실현은 불가능하고 반드시 나머지가 존재한다. 이 나머지를 라캉은 ‘대상 ɑ’라고 부른다. 대상 ɑ는 만족의 결여·빈곳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 빈곳을 채우는 ‘구실’이고 ‘미끼’(leurre)이다. 전능한 타자의 향유대상이 됨으로써 주체는 행복의 낙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는 극단적 불안을 체험한다. 불안을 통해 주체는 완벽한 향유를 포기하고 결여를 받아들이며 분열된 주체로 이행한다. 불안은 전능한 타자의 향유로부터 주체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한다. 불안은 완벽한 향유, 보편적 향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즉, 주체가 타자와 대면할 때 분열되지 않은 타자를 통해 완벽한 향유를 얻고자 하나 완벽한 만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깨닫고 그 결여만 확인하는 셈이다. 이때 주체는 불안을 체험하고 불안을 통해 주체는 완벽한 향유를 포기하고 결여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분석학적 차원의 불안을 프로이트가 자아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는 정서적 반응의 총칭으로 보았다면, 라캉은 이를 심화시켜 상징적 차원에서 주체가 타자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불일치를 경험함으로써 생성되는 감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은 어쩌면 신천지 집단에 대한 신도들의 맹종을 설명하는 지점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은 그에 대한 글이 아니므로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불안의 주체로서 결여된 우리는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보다 분명히 분열된 주체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및 민족주의적 양상에 대한 뚜렷한 균열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 유행이 된 코로나19에 반응하는 각국 정부의 입장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을 봉쇄하거나 이동을 제한하는 한편, 다른 국가 및 지역의 사람을 분리하려는 충동 등이 그것이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거시적 차원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 지금 내 옆의 존재 혹은 이동 수단에 대한 불안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불안은 존재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것이겠다. 이를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불안의 의미는 인간 삶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구조를 상실하게 되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고려하자. 자신의 존재가 올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방향 없는 노여움이 팽배하고 신체적 긴장 및 사회적 공황이나 자아 불안이 생겨나며 자아 상실감으로 괴로워하다 자기 동일성에 대한 신념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작금의 상황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안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적극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존재론적 요구라는 내면의 소리가 현실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뛰어넘을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참다운 자기를 발견하고 내면의 자아와 소통함으로써 가능하다. 결국, 불안은 자신의 생애를 더 만족시킬 입장에서 새로운 경쟁의 획득이나 더 높은 단계의 심리적인 발달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코로나19의 상황을 개인적인 문제로 제한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때의 존재는 보편적 존재, 혹은 공동체나 유적 존재의 문제로 확장시켜 봐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_사진출처 : 다음백과
키에르케고르_사진출처 : 다음백과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을 자유의 가능성 혹은 억눌린 자유로 정의하면서 그 불안을 통해 인간이 타자와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6) 불안은 인간이 체험하는 가장 모순적인 정서이다. 불안 속에서만 인간주체는 ‘불안의 너머’를 지향할 수 있으며, 불안 너머에 존재하는 순수한 타자가 명명될 때만 불안은 자유와 욕망을 지향하는 숭고한 정서로 다가올 수 있다. 결국, 불안은 자유의 인식근거이며 자유는 불안의 존재근거7)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안은 존재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것이면서 창조적인 원동력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역사적으로 극복해왔던 문제들처럼 코로나19도 분명 극복할 질병임이 틀림없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불안이 혐오와 배제, 차별의 논리로 전락하지 않길 바라며, 분열을 야기하는 일련의 이기적 행동들은 하지 않길 바란다. 너무 교과서적인 결론이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1) 우찬제,「불안의 상상력과 정치적 무의식」,『한국문학이론과 비평』27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5, 119쪽.

2)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2003, 256쪽.

3) 같은 글, 256~301쪽 및 프로이트,「불안」,『정신분석강의』, 임홍빈 외 옮김, 열린책들, 2003 참조.

4) 홍준기,「라깡과 프로이트 ·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정신분석 Ⅰ」,『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197쪽.

5) 같은 글, 198~9쪽 참조.

6) 쇠렌 키에르케고르,『불안의 개념』, 임규정 역, 한길사, 1999, 190쪽 참조.

7) 홍준기, 앞의 글, 224쪽.

 

 

글: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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