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진보’를 부풀리며 ‘진보’ 자처하기
‘진보’를 부풀리며 ‘진보’ 자처하기
  • 김진석/인하대 교수·철학
  • 승인 2011.03.11 20:04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

조국과 오연호가 같이 낸 책 <진보집권플랜>은 겉과 속이 있다. ‘진보’가 2012년이나 2017년에 꼭 집권해야 한다는 주장이 겉에 드러나 있다면, 속에 살짝 숨겨진 메시지는? 오연호는 보수 쪽엔 차기 주자가 많은데 “이쪽엔 차기 주자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책을 낸 이유라고 후기에서 밝힌다. “정치권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그 사람’을 찾아나섰다. 기준은 하나였다. 진보이되 매력이 있어야 한다.” 진보이되 대중적 매력을 겸한다? 그러나 차기 주자를 발굴하는 기준은 사실 하나가 아니다. 무엇보다 권력 의지가 있어야 한다. 오연호도 조국이 정치인의 권력 의지보다 ‘더 큰 의미의’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진보와 대중적 매력, 그리고 권력 의지가 한 묶음으로 잘 묶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진보와 대중적 매력은 잘 만나면 이로울 터이지만, 진보가 대중적 매력으로 쏠리거나 흡수될 때 거부감을 일으키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정치인의 그것보다 ‘더 큰 권력 의지’라는 것도 장단점이 있다. 정치인의 권력 의지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기도 하고 요구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의 그것, 혹은 정치를 저울질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다소 혼란스럽다. 이들 문제도 중요하지만, 좁은 지면에서는 일단 옆으로 밀어놓자. 다음 물음에 초점을 맞추자.

진보가 집권해야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좋은 정치가나 지식인은 당연히 진보를 내세워야 하는 것일까? 진보는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은 허술한 이념적 도구인데도, 모든 언론이 이 구별을 재생산하는 게 아닐까? 보수 언론이든 진보 언론이든 똑같다.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양한데, 왜 극우보수가 아니면 모두 진보라고 자칭하고 타칭하고 통칭하는 걸까? 민주당이 무상급식과 무상의료를 내걸었다고 진보 정당인가? 중도에서 조금 좌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온통 ‘진정한 진보’와 ‘담대한 진보’ 타령이다. 코미디 아닌가?

물론 조국은 마냥 진보라고 자칭하고 통칭하는 건 아니다. 한편으론 개혁(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구별하면서 이 둘이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둘을 그냥 진보로 뭉뚱그려 통칭한다. 그리고 진보를 자처한다. 이 모호함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조국은 침묵하거나 변덕스러운 대중을 이기적이라고 비난만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할 때는 깃발만 들면 사람들이 지지해주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다시 일반적이고도 당위적인 방식으로 진보적 가치에 호소한다. 진보의 깃발만 드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다시 단순하게 그 깃발을 드는 것이다. 조국은 386세대가 정치적으론 좌파이면서도 생활에서는 우파로 존재하는 모순을 잘 안다. 정치적 제도가 일정 궤도에 이르지 못할 때, 개인은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조국은 이들이 생활에서도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 이념의 관점에서는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강남좌파’가 정말 ‘생활좌파’가 될 수 있을까? 이런 행위는 진보라는 이념 뒤에 숨어 지적 명예와 정치권력을 얻으려는 행위일 수 있다. 자칭·통칭 진보의 정치 플레이다.

김규항을 비롯한 ‘정통’ 진보·좌파는 이 모호성을 못마땅해한다. 자유주의자 주제에 조국은 왜 진보를 내세우느냐고 불만을 터뜨린다. 그런 관점은 진보의 울타리를 너무 좁게, 혹은 허무하게 그리는 것이다. 나는 진보를 자칭하고 통칭하면서 진보를 부풀리는 전략에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진보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자칭 ‘진성 좌파적’ 관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한쪽은 진보를 너무 모호하게 부풀리고, 다른 한쪽은 진보를 너무 좁힌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와 진보가 서로 갈라져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적극 연대하고 협력하면 좋다. 다만 둘 사이의 정치적 차이를 가리거나 지우면서 ‘오직 진보’의 이름으로 연합하는 일은 좋지 않다.

둘의 차이를 가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진보와 개혁 사이의 갈등이 역사적 무게와 그림자를 가지기 때문이다. 불행한 죽음을 통해 노무현은 진보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절부터 죽음 이전까지 진보가 그를 끊임없이 비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부활에는 겸연쩍은 점이 있다. 그만큼 ‘우린 모두 진보’라는 진보 부풀리기와, ‘너는 진보가 아니야’라는 나누기는 뿌리가 깊다. 그 차이를 지우는 일이 마치 그 둘의 연대를 촉진하는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물론 야권의 모든 정당이 합치면 그들 모두를 간단하게 진보라고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적 정당 분포의 특수성보다는 현재 진보가 처한 모호한 상태에서 기인한다. 노조가입률은 10% 정도이며, 진보 정당 득표율을 합해도 그 정도다. 그들만 진보일까? 대중정치의 차원에서 그들만을 진보로 여기고 나머지 반한나라당 목소리를 모두 내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누구일까?

조국을 비롯한 사람들이 속하는 ‘강남좌파’도 있고, 그들과는 차이가 있지만 ‘강북좌파’도 있다. 실제 생활은 거의 보수와 비슷하게 하면서 정치적 의식은 진보적인 사람들. 본인이나 자식의 교육 문제에서는 보수처럼 학력과 학벌을 중시하면서 의식은 조금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들. 혹은 한나라당만 아니면 어느 정당이라도 찍는 사람들. 강남좌파와 강북좌파는 생활비가 비싸기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서울에서 소비하고 산다. 높은 사교육비를 들여 고학력과 멋진 학벌을 확보하고, 부모의 경제력에 이기적으로 의존하면서 취업전쟁에 나선다.

이들을 모두 진보라고 통칭하는 일은 진보 부풀리기, 혹은 진보 인플레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상당수는 보수와 진보로만 나뉜 여론조사에서 어영부영 진보로 계산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의 삶과 행위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으로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을 포함하는 정치의 힘이나 방향이, 서민적 삶을 유지하는 고졸자들에 많이 근거하는 유럽 진보와 같을 수 없다. 사실 강남좌파 다수는 ‘리버럴’(Liberal)에 가깝다.

그렇다고 강남좌파나 강북좌파, 혹은 고학력 진보를 모두 빼버리는 것은 정치 영역을 너무 좁히는 일이다. 그 사이, 곧 자유주의와 좌파가 겹치는 지점이 ‘개혁과 진보’가 현재 추구해야 할 대중정치적 영토일 것이다. 대중정치와 삶의 윤리 사이에는 균열이 있다. 균열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며 그냥 무시할 것도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로, 개혁과 진보의 연대나 통합은 유감스럽게도 한동안은 유럽 방식으로, 곧 기존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 진행하기 힘들 듯하다. 자유주의가 은근히 혹은 뻔뻔하게 강하기 때문이다. 대중정치 내부에서도 개혁(자유주의)과 진보 사이에는 균열이 있다. 그 차이는 사이를 가르기도 하지만, 연대를 방해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자유주의는 진보와 갈라지기도 하지만, 충분히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 가치다.

연대와 협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자유주의자가 맹목적으로 진보를 자처하지도 않고, 진보가 자유주의를 독단적으로 내치지 않는 데서, 곧 진보를 부풀리지도 않고 좁히지도 않는 데서 온다. 둘이 서로의 차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연대와 협력을 낳고 키울 때, 떨어졌던 정치와 윤리는 다시 만난다.

글•김진석 
<포월과 소내의 미학>(문학과지성사·2006),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2009), <더러운 철학>(개마고원·2010) 등을 썼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