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6월호 구매하기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평온해 보이지 않지만 평온한 영화 <세레니티>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평온해 보이지 않지만 평온한 영화 <세레니티>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0.03.24 19: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세레니티(serenity)>는 한 마디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에 속한다. 호오가 엇갈릴 확률이 높다. 영화가 끝날 때 되어서야 눈치를 채게 되겠지만, <세레니티>의 첫 장면이 강렬한 복선이다. 이중의 세계로 구성된다는 측면에서는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된다. <매트릭스>와 차이점은, <매트릭스>가 거대하고 판이한 두 세계를 제시하지만 연결된 무대처럼 인접성을 드러낸 반면 <세레니티>는 작은 세계와 그 작은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라는, 긴밀한 맥락을 지닌 두 개의 소()세계를 보여주며 지리적으로 떨어진 영토처럼 이접성(離接性)을 보인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는 세계들이 수평으로 연결되지만 <세레니티>에서는 세계들이 수직으로 구축된다. <세레니티>에서는 유기적 연결에서 끝나지 않고 말하자면 아랫세계윗세계의 하중까지 견뎌내야 하기에 더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이접하지만 통일된 두 개의 세계

더구나 영화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이중의 세계라는 구조를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선 아랫세계자체가 완결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사건이 전개되어 가는 동안 아랫세계의 곳곳에 기이한 빈틈을 배치하되 그것도 보이지 않게 배치하여,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관객이 이물감을 느끼기 시작하도록 구성해야 한다. 종국엔 윗세계를 압도적으로 도래케 하면서 이접한 두 세계의 통일성을 획기적으로 구현하여야 한다. 제작진에겐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먼저 아랫세계부터 살펴보자. ‘어느섬의 낚싯배 선장 ''은 낚시꾼을 태우며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섬마을 사람이다. 딜에게는 이상한 집착이 있어서 낚시꾼을 태우는 생업을 영위하다가도 큰 참치만 보면 잡으려고 덤벼든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늙기 전 모습 같다. 전설의 거대참치를 낚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그에게 나머지는 다 부차적이다. 그가 잡고자 하는 참치에게는 스스로 붙여놓은 이름이 있다. ‘정의’(justice).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애인도 있고 나름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딜에게 어느 날 전처 캐런'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자신과 이혼하고 돈 많은 남자와 살고 있는 전처 캐런. 딜을 배신하고 딜을 떠난 캐런이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을 죽여주면 그 대가로 1천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전처의 현 남편이자 자기 아들의 의붓아버지인 그 남자를 죽이고 1천만달러를 받아가라는 위험한 거래에는 그러나 범죄의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남자가 아내, 즉 딜의 전처이자 의붓아들의 어머니에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후 벌어지는 사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태를 답습한다. 영화는 딜로 하여금 일생의 고기, 아들 사이에서 택일하도록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다. 주변 사람들은 물고기라는 인생의 선한 목표를 일깨우며 딜이 살인이라는 도덕적 좌초에 이르지 않도록 애써 권면한다. 할리우드 영화 문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제 캐런이든 어디서든 배신을 예상하게 되고 계획의 차질, 마침내 거대한 반전의 도래를 기대할 것이다.

그런 예상과 기대는 깨진다. 반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세계를 전복하는 수준의 전면적인 반전이어서 어쩌면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반전의 단서를 서서히 그리고 충분히 뿌리면서 일어나는 반전이어서 반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전복될 수 있다.

정의는 실현되지만 동시에 정의는 상실된다. A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상황은, 뉴턴적인 물리법칙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체계가 작동하는 현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두 개의 정의가 교차하는 모습은 이 영화만의 특별한 구성력이다. ()뉴턴적이고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현실을 구현하는 흔한 영화방법론은 판타지거나,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다. 하지만 <세레니티>에서는 현실과 현실이 대응케 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현실 대 현실, 그리고 정의 대 정의.

반전을 초대하는 방식이 엄숙하거나 과도하게 진지하지 않지만, ‘아랫세계윗세계의 대립과 소통을 통해, 마치 재림예수의 도래처럼 대단원을 제시하기에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찰과 존재론을 영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는 관객이 있을 법하다. 그럼에도 <세레니티>는 당연히 계시가 아닌 작품이기 때문에 아랫세계윗세계사이의 이접(離接)한 통일성이 극적인 해소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가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잣대이어야 할 것이기에 영화를 한 번 본 상태에서는 개인적인 판단을 유보하고자 한다. 모호한 표현은 대미의 반전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순간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될 것을 우려한 노력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

영화 제목 세레니티에서 나는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를 떠올렸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회자되는 이 기도문은 삶에 관한 상당한 통찰을 담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이 기도문은 기동한다. 겉보기와 달리 기동하는 영역은 아랫세계가 아니라 윗세계이다. 기도문 중에서 널리 인용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God, give me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which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간략하게 해석하면,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serenity)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 바꾸어야만 하는 것을 바꾸고자 하는 용기, 그리고 두 가지(은총에 해당하는 것과 용기에 해당하는 것)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기도문을 읽고 영화를 보면 은총용기지혜가 영화 속에서 ICT기술의 도움아래 현실로서 실현된다고 판단할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출연진과 감독

<인터스텔라>의 매튜 맥커너히와 앤 해서웨이가 <세레니티>에서 6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췄다. 86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의 할리우드 대표 배우 매튜 맥커너히와 제85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앤 해서웨이가 주연을 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행성을 찾기 위해 우주로 떠난 과학자이자 파트너로 분했다. <세레니티>에서는 이상과 현실에서 혼동을 겪는 남자 과 위험한 거래를 제안하는 여자 캐런' 역을 각각 맡았다.

여기에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슈퍼맨을 키운 어머니로 분한 다이안 레인, <캡틴 마블>, <아쿠아 맨> 등에서 활약한 디몬 하운수, <터미네이터 제네시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제이슨 클락이 열연한다.

연출은 스티븐 나이트 감독. <더 셰프>(2015), <얼라이드>(2017), <거미줄에 걸린 소녀>(2018) 등 다양한 장르의 각본을 통해 스토리텔러로서 평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5일 개봉.

 

글:안치용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