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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155년 금녀의 벽을 넘은 여성 기수 이야기 <라라걸>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155년 금녀의 벽을 넘은 여성 기수 이야기 <라라걸>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0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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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힘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방금 우리가 세상에 이겼네요(They think women aren't strong enough, but we just beat the world).”

2015멜버른 컵우승자인 미셸 페인이 한 말이다. ‘멜버른 컵은 세계최고의 경마축제로 1861년 첫 대회가 열린 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해 매년 열렸으며 미셸은 155년만의 첫 여성 우승자이다.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금녀의 벽의 하나를 무너뜨린 장면이었다. 미셸의 우승에는 인간극장을 방불케 하는 개인사가 따라붙어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로 불렸다. <라라걸>은 미셸의 실제 이야기를 레이첼 그리피스 감독이 영화화했다.

원제는 RIDE LIKE A GIRL’이다. 앞 글자를 따서 라라걸이란 한국어 제목을 만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발음으론 랄라걸이 맞을 텐데, 어차피 의미에 중점을 작명이라서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실화의 극화

2015멜버른 컵에서 155년 만에 처음으로 미셸 페인이 우승하자 호주 뿐 아니라 전 세계에게 그의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나라를 멈추게 만드는 경기(The Race Stop Nations)”라고 하는 호주 최대의 축제 멜버른 컵에서 펼쳐진 레이스는 단 2분이었지만 그 2분의 우승자가 155년의 벽을 넘은 주인공인데다 이후 그의 감동적인 도전기가 전해지면서 사실 미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더욱 뜻 깊었다. <라라걸>은 여성 감독, 여성 각본, 여성 주연의 이른 바 트리플 F등급영화이다. 155년만의 성취에 어울리는 영화 제작의 거버넌스인 셈이다. 여성이 주연이란 얘기는 대체로 여성 인물을 조명한다는 뜻이고, <라라걸>에서는 정확하게 여성성에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된 곳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거나 넘어섰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장애는 목표 그 자체에서 비롯한다기보다는 그의 여성성에서 비롯한다. 미셸의 사례에서도 그랬다. 여성성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이러한 난관과 차별이 영화 곳곳에서 과장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그려진다. 과장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차별이 일상인 사회는 크게 보아 달라지지 아직 않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과정이 하나의 스토리이다. 감독 레이첼 그리피스는 미셸이 우승한 2015멜버른 컵경기를 바비큐 파티를 하며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그리피스는 경기에 출전한 선수 중에 여성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미셸은 멜버른 컵사상 5번째 여성 출전자였다. 그리피스가 우승자가 여성임을 알게 된 것은 경기 직후 이어진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미셸의 우승 소감이 이 글의 맨 앞에 적은 그 내용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겼다. 레이첼은 어쩌면 미셸이 말한 우리에 자신이 포함된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그리피스는 곧바로 미셸에 관한 자료를 찾아본다. 미셸은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생후 6개월 만에 엄마를 잃었다. 10남매 중 8명의 기수를 배출한 페인 집안에서 성장한 미셸은 말을 타는 것 외의 삶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스승이었고, 집이 연습장이었다. 미셸에게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바로 위 오빠 스티비가 있어서 멜버른 컵우승까지 함께 한다.

2015멜버른 컵우승까지는 여성차별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극한의 노력이 있었다. 2004년 낙마 사고를 당하며 심각한 전신마비를 겪은 미셸은, 같은 직업에 종사한 언니의 경기 중 사고사까지 목격하고도 끝내 말에 다시 올랐다. ‘멜버른 컵우승에는 또 하나의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는데, 경주마로선 비교적 많은 나이인 6살에 숱한 부상을 겪고 우승 확률은 겨우 1%로 예상되던 프린스 오브 펜젠스를 타고 미셸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모든 어려움과 편견, 차별을 뛰어넘은 감동의 드라마가 미셸에게 집약돼 있었던 셈이다.

<라라걸>은 이런저런 여건이 합쳐지면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로 방향을 잡는다. 레이첼 그리피스가 미셸 페인의 멜버른 컵 우승을 목격하고 영화화를 결심한 지 한 달 뒤에 호주 영화 제작 산업을 지원하는 정부 산하 기관인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Screen Australia)’는 영화계의 핵심 영역에서 발견되는 성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젠더 매터스(Gender Matters)’를 발표했다. ‘젠더 매터스는 영화계의 여성 인재 저활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젠터 매터스 KPI”를 설정하여 제작 과정의 지표로 제시하였다. 영화계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때마침 탄생한 미셸의 우승 스토리는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가 원하던 완벽한 프로젝트 소재였다.

<라라걸>의 프로듀서 리처드 케디는 무엇보다 여성 감독이 이 영화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연출하는 것이 가장 알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라걸>은 감독, 각본, 배우뿐만 아니라 캐스팅, 편집,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 디자인, 헤어 메이크업 등 주요 제작파트의 리더를 모두 여성이 맡았다. 카메라 팀도 과반수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명실상부한 여성주의 영화를 구현했다.

 

“꿈을 향해 달리다가 넘어져 본 이들의 이야기”

미셸은 멜버른 컵우승 이후 2016년에 사람들에게 가장 영감을 불러일으킨 운동선수로 선정되어 호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이 수여하는 돈 어워드(The Don Award)”, 2017년에는 경마 업계에서 지속적으로 높은 성취를 획득한 여성을 기념하는 론진 레이디스 어워드(The Longines Ladies Awards)”를 수상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나서 우리가 세상을 이겼다.”는 미셸의 멜버른 컵우승 소감에서 우리에 주목했다.

우리는 어쩌면 우승한 기수가 관행적으로 사용한 단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미셸의 삶의 투쟁에서 저절로 생긴 올바른 연대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는 당연히 그와 함께 전력질주한 말 프린스 오브 펜젠스가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서로 격려하며 함께 우승을 일군 장애인인 막내 오빠 스티브 또한 빠질 수 없다. 그리고 과도한 상상인지 모르지만 자신과 동일한 차별과 편견을 겪은, 겪고 있는 여성이 포함되지 않았을까.

보통 어떤 집단이나 계급, 혹은 동일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루었을 때 그것은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대표로서 성취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미셸 또한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마셸에게서 나는 이 세계의 소수자들의 올바른 연대의식을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형태로 목격하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삶을 통해서였지만 이 영화가 없었다면 없었을 경험일지도 모른다.

미셸은 현재 오빠 스티비와 함께 운영하는 목장에서 훈련사로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스티비는 미셸의 곁을 지킨 마필관리사이자 유일무이한 절친 겸 막내오빠이다. 미셸의 우승마 프린스 오브 펜젠스를 관리한 이 역시 스티비였다. 현실의 스티비는 영화 속의 스티비와 동일인물이다. 영화를 보며 느끼게 되지만 스티비를 현실인물로 투입한 제작진의 결정은 이 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15일 개봉.

 

글: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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