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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소녀 문학의 해피엔딩은 결혼?
[이주라의 문화톡톡] 소녀 문학의 해피엔딩은 결혼?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13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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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의 탄생과 영화의 리메이크, 그 시대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은 미국의 영화로, 영국의 드라마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으로, 근대 영상 매체의 시작과 더불어, 늘 리메이크되었던 작품이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의 리메이크 작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원작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양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2019년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 또한 소녀 그리고 여성의 성장에 대한 현재적 관심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소설 『작은 아씨들』은 소설의 1부 초판이 출간되었던 1868년을 전후하여 미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갔던 루이자 메이 올컷의 성장기에 대한 자전적인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작품을 읽어 보면 명확하게 드러나듯 작가 올컷은 작품 속 조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루이자 메이 올컷 또한 네 딸 중 둘째였고, 작가의 자매인 애나, 엘리자베스, 메이는 작품 속 메그, 베스, 에이미로 형상화되었다. 이렇게 실제 작가의 삶과 경험이 거의 그대로 반영된 이 작품은, 그래서인지 전 세계 모든 소녀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조의 경우는 루이자 메이 올컷 이후 탄생할 여성 작가와 감독 그리고 예술가들의 완벽한 동일시 대상이었다. 『빨강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앤이 염색에 실패하고 머리를 자르게 되자, 소설 속에는 가족을 위해 머리를 잘라 파는 주인공도 있었다며 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역시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아픈 아버지를 간호하러 떠나는 어머니의 차비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자른 그 장면을 의미한다.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또한 자서전에서 자신을 『작은 아씨들』의 조와 동일시하며 글쓰기를 하였다고 말한다.

전 세계의 모든 소녀들이 읽은 책, 그리고 그 소녀들을 직업적인 예술가로 이끌었던 책이 『작은 아씨들』임을 생각하면, 여성 감독에 의해 이 작품이 리메이크 된 것이 1994년이라는 점은 상당히 놀랍다. 그만큼 여성의 성장 서사를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로 전달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의 조성은 어려웠던 것일까. 아무튼 1994년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의 작품 이후, 다시 2019년에 그레타 거윅의 시선으로, 영화 <작은 아씨들>이 재탄생되었다.

단순하게만 그 의미를 짚어보자면, 두 작품은 여성 감독에 의한 리메이크 작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작품 모두 페미니즘 운동의 전환과 확산의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우연치 않은 공유 지점도 가지고 있다. 1990년대는 페미니즘 운동이 다각화되며 확산되는 시기였고, 현재는 일상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이 두 시기에 두 명의 여성 감독들은 자신들이 공감하고 이입했던 소녀들의 성장 서사의 고전을 시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냈던 것이다.

 

질리언 암스트롱, 작은 아씨들, 1994.
질리언 암스트롱, 작은 아씨들, 1994.

2. 로맨스와 투쟁

소설 『작은 아씨들』은 1868년에 1부가 1869년에 2부가 출간되어 완성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는 개정판이 나온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소설의 내용은 개정판일 가능성이 높다. 개정판에는 평범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품 있고 세련된, 이상적 어머니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로리도 작고 가무잡잡한 소년에서 잘생기고 키가 큰 멋진 소년으로 변화하였다. 사실 개정판이 이런 변화를 추구한 이면에는 무엇보다 출판사의 강한 요구가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개정판 뿐만 아니라, 『작은 아씨들』이 2부라는 속편을 찍어내는 순간부터, 이 소설은 독자의 욕망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출판사의 요구를 담아낼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는 당연히 소녀들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을 요구했다. 작가는 1부를 마칠 때, 메그를 결혼시킴으로써 출판사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2부를 요청받을 때, 올컷은 출판사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서도, 주인공들이 누구와 결혼하는지를 묻는 그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는 결혼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보였던 캐릭터인 조마저도 결혼을 시켜야 함을 의미했다. 작가는 고민 끝에 로리가 아닌 독일인 교수인 프리드리히와 조를 결혼시킨다.

19세기 말에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출판사와 독자의 요구 앞에서 고민했던 내용은 바로 2019년 그레타 거윅의 영화 <작은 아씨들>에 그대로 반영된다. 2019년 영화와 1994년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1994년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의 <작은 아씨들>은 소설 『작은 아씨들』의 세계를 그대로 따라간다. 소설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다. 하지만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소설의 세계를 따라가기보다는 소설의 창작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고민에 더욱 집중한다.

그래서 1994년 영화는 어린 시절 우리가 기억하는 4자매의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삶과 사랑과 결혼이라는 성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작품 속 4자매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통해 개성을 보여주지만, 대체적으로 4자매는 하나의 인격체처럼 그려진다. 아름다운 메그가 파티에 가서 허영을 부려본다든가, 조와 에이미가 심하게 싸운다든가, 이런 장면들은 모두 그려지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언제나 4자매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다. 영화의 배경은 4자매의 집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자매는 자신의 사랑을 별 탈 없이 찾아 결혼한다. 메그와 에이미의 결혼은 원작에서부터 이미 당연하게 그려져 있으므로 별 무리가 없다. 그런데 조의 결혼은 사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던 캐릭터 상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1994년 영화는 이 부분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조가 뉴욕 하숙집에서 만난 프리드리히는 조의 글에 관심을 가지고 조언을 해주며 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기에서 핵심은, 프리드리히는 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조에게 당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며 조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하숙집 아이들과 친근하게 노는 모습을 통해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 육아를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남자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결혼보다 일을 하고 싶은 조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에 반해 2019년 영화에서는 4자매를 하나의 인격체로 다루기보다 각각의 개별체로 다룬다. 그러면서 영화는 소녀의 성장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장 이후 여성들의 현재적 고민을 담아낸다. 아름다운 메그는 가난한 남편을 사랑하지만 물질적 궁핍으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이 힘들다. 현실적인 예술가인 에이미는 자신의 재능이 천재적이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대안인 부자와의 성공적인 결혼을 고민한다. 그리고 조는 글을 써서 돈을 벌어먹고 사는 일의 지난함과 고달픔에 시달린다. 이들은 각각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개별 주체로 형상화된다.

그 중에서도 조는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작은 아씨들』을 출간하면서 실제 겪었던 일을 경험한다. 뉴욕의 한 신문사로 들어가 자신의 글을 익명으로 파는 조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작가로서 조의 삶에 주목한다. 19세기 말 여성 작가의 삶은 자신의 이름조차 내세울 수 없었으며,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경우는 출판사의 요구에 더욱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에게 프리드리히의 충고는 또 다른 공격 혹은 상처로 받아들여진다. 조와 프리드리히는 뉴욕에서 그들만의 로맨스를 만들지 못한다. 오페라 공연 후 춤을 추며 호감을 느끼지만, 곧 조는 프리드리히의 작품 평가에 자존심이 상한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호감이 발전할 여지는 없었다. 조에게 프리드리히는 로맨스라기보다 자신의 글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동료였다가, 자신의 글을 공격한 사람일 뿐이게 된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조에게는 출판사 편집자와 프리드리히 모두 싸워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때까지 조에게 로맨스는 없다. 조의 삶은 일터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가로서의 투쟁뿐이다.

 

그레타 거윅, 작은 아씨들, 2019.
그레타 거윅, 작은 아씨들, 2019.

3. 결혼은 소설에서조차 경제적 거래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조와 프리드리히의 사랑 확인 장면을 희한하게 편집한다. 프리드리히가 조의 고향으로 찾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고 떠난 후, 메그와 에이미는 프리드리히가 조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조에게 프리드리히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조가 출판사 사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조가 프리드리히를 쫓아가는 장면을 교묘하게 교차 편집한다.

이때 사장은 조에게 책을 출간하려면 여주인공을 결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공이 결혼하지 않는 소설은 팔리지 않는다며. 조는 저항한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결혼을 거부하는 캐릭터였다고. 그랬던 여주인공이 결혼하면 캐릭터의 일관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그러나 사장의 요구는 집요하다. 결국 조는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 “결혼은 소설에서조차 경제적 거래군요.” 조는 결혼이라는 경제적 거래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조의 소설 속 여주인공은 결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프리드리히와 조의 키스 장면을 담아낸다.

그렇다면 이때 조와 프리드리히의 키스는, 영화 속 주인공인 조와 프리드리히의 키스일까, 아니면 조의 소설 속 여주인공과 프리드리히로 가정되는 소설 속 남주인공과의 키스일까. 영화는 이런 모호한 지점을 남긴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조의 가족이 운영하는 학교에 프리드리히가 존재함으로써, 그 둘의 행복한 결합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조와 출판사 사장의 ‘결혼 거래’는 루이자 메이 올콧이 출판사와 논쟁했던 그 지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루이자 메이 올콧은 실제 삶에서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독신 여성으로 끝까지 남았다는 그 사실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조는 과연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을 맞은 것일까. 나의 개인적인 기억일 뿐일 수도 있으나, 로맨스에 열광했던 어린 시절 나의 독서 취향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나는 『작은 아씨들』의 조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인 1994년의 영화도 열심히 봤음에도 말이다. 루이자 메이 올콧이 주장한 바대로, 조는 결혼하지 않는 조가 더욱 조답다.

그레타 거윅의 2019년 영화는 이처럼 여성의 일과 결혼을 둘러싼 현실적 고민, 즉 로이자 메이 올콧의 현실적인 고민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당대의 출판사가 작가에게 요구한 것처럼 로맨스 서사와 타협시키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19세기 말의 작가의 고민이 21세기를 한참 지나선 오늘날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일과 결혼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어서일까. 왜 아직도 영화나 소설 그리고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양자택일만을 강요받는 것일까. 로맨스 소설 속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이 아직까지도 경제적 거래로 만들어지는 환상일 뿐이라는 현실이 씁쓸하다.

 

<참고자료>

일레인 쇼월터, 「서문-『작은 아씨들』과 미국 현대 여성문학」, 『작은 아씨들』, 유수아 역, 펭귄클래식, 2011.

 

글: 이주라(문화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한국 근대 대중문학 및 문화 연구.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적 흐름과 감성적 특징에 관심. 명랑을 키워드로 긍정과 낙관의 태도가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과 역사성을 탐구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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