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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처맞아도’ 되는 놈들을 향한 정의 - <공수도>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처맞아도’ 되는 놈들을 향한 정의 - <공수도>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20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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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다. 사실은 그럴 일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혹은 자신을 위해 타인을 괴롭히는 이들이 벌 받는 것은 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이 일은 그리 쉽게 성취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들 믿게 되었다. 오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이 결과로 인해 나쁜 놈을 처벌하려면 나쁜 놈은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해야 했고, 그를 처벌하는 이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이 사이 분노를 위한 각종 설정들은 지칠 만큼 자극적으로 변했고 계층 간의 뚜렷한 거리를 만들어내면서, 무엇보다 촌스러워졌다. 깔끔하게 끝날 일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 찌질한 꼬라지를 굳이 목격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까 <공수도>가 어디서 본듯한 설정으로도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은 나쁜 놈이 벌 받아 마땅하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환호일 것이다. 빈 손, 즉 맨손 무술인 ‘空手道’가 응징의 방법인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정의’ 역시 같은 궤에 놓인 셈이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라 나쁜 놈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며, 이는 무능이 아닐 정도의 힘으로도 가능해야 한다는 이 영화의 단순한 선언은 우리가 여태까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복잡하게 지지고 볶아 댔는지, 그래서 얼마나 찜찜했는지를 한 번에 보여주었다.

 

<공수도>는 굳이 특별한 설정들을 여기저기 배치하지 않은 채 나쁜 놈과 나쁜 놈한테 당하는 착한 놈으로 빠르게 역할을 갈라 낸다. 행동과 목표만으로 진혁(김태운)과 강식(손태욱)은 분명 나쁜 놈들이며 그들에게 대항하는 종구(오승훈)와 채영(다은)은 착한 놈들이다. 그리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새나(유채온)와 해성(손우현)에게는 극한의 나쁜 짓을 할만한 이들이 아니라는 힌트가 주어진다. 착한 놈들에게 엄마와 아빠는 좋은 말을 해주고 그들을 전적으로 믿어줄 사람들이며, 나쁜 놈들에게 굳이 이들을 옹호할 부모를 배치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공수도>의 세상은 완벽하게 완성된다. 평화로워야 할 곳에서 굳이 할 필요 없는 짓들을 하는 이들을 제거 할 간단한 도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이 설정이 <공수도>를 흥미롭고 통쾌한 영화로 탈바꿈시킨 것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이 단순함을 꿋꿋이 고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구는 답안지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괴롭힘을 당할 때 자신을 구해준 채영의 모습을 보고 공수도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가 강해지기 위해 보여주는 어설픈 수련의 모습들은 사실 이전, 그 옛날 홍콩 무협 영화에서부터 최근의 한국 영화에서 <말죽거리 잔혹사>(2004)나 <싸움의 기술>(2006) 그리고 <잉투기>(2013) 등까지 오랫동안 등장했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절권도의 연마가 나쁜 놈보다 거대한 시대에 대한 거부의 행위로, <싸움의 기술>(2006)에서의 알 수 없는 스킬들이 정확히 몸에 대한 수련으로 보기 힘든 것으로, <잉투기>(2013)의 투(鬪)가 자신과의 싸움으로 조금씩 방향을 달리했던 것과 다르게 <공수도>의 수련은 말 그대로 손날을 강하게 키우고 힘을 길러 저 나쁜 놈을 응징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수럼된다. 그들의 수련이 담백하게 그려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정의를 말끔히 정리한 후 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화 <공수도>가 재미있게 활용하는 것은 명랑하고 쾌활한 음악들이다. <공수도>에서 매우 잦게 배치된 음악들, 특히 겨룰 때 등장하는 음악들은 그 순간을 무겁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도 명확하게 ‘응징’의 느낌을 주는 데에 일조한다. 이 발랄한 음악들은 폭력을 가볍게 만든다기보다 나쁜 놈들에 대한 응징이 이렇게 가볍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활기차게 만든다. 이 가벼움이 반가운 것은 굳이 눈에 힘주고 또 다른 힘에 기대지 않아도 옳지 않은 것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강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 착하지만 약한 이, 강하면서 착해지고 싶은 이들이 만들어 낸 교집합은 그래서 풋풋하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채영의 역할일 것이다. 강한 남성을 디폴트로 두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강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선택된 채영은 <공수도>를 흥미롭게 하는 데에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사실 무협 영화의 초기 여성 활극 배우들이 매우 큰 활약을 했지만 이는 그리 중요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정패패, 리칭, 모영, 묘가수 등으로 대표된 여성 무협 영화 배우들은 비슷한 시기 장철 감독이 왕우를 통해 보여준 남성 액션의 잔혹함과 비장미가 성공을 거두면서 점차 사라졌고, 이후 이소룡-성룡-주윤발-이연걸 등으로 이어지는 액션의 계보 속에서 그 역할을 잃었다. 담백하게 누군가를 응징하려는 목표 하나로, 몸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무술로 향하는 영화에 여성을 세운 것은 <킬빌>(2004) 정도였고, 이후 액션 혹은 느와르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해도 그 방향은 엉뚱한 곳을 가리키기 일쑤였다.

 

<공수도>의 의도를 생각했을 때 이러한 계보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의미화하는 것에는 분명 무리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공수도>가 채영을 ‘공수도’의 고수로 놓는 것에 어떠한 설명도 이유도 필요치 않은 당연한 상황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 무술은 연마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아빠가 공수도 도장의 관장이라 해도 왜 딸에게 이런 무술을 가르쳤는지 등에 대해 <공수도>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황이 허락하면 누구든 배울 수 있고, 강할 수 있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공수도>의 세상에서 마지막 복수의 주체로 아직 어설픈 종구와 해성보다 강한 채영을 두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는 <공수도>의 통쾌한 설정이 그들이 고등학생이며 학생들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이렇게 간단하고도 단순한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낼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학교에서 하루하루 부딪히고 있는 일상을, 그리고 그들의 관계 속 고민들을 고등학생들의 일이기에 가벼운 것이라 치부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말은 너희가 아직 어리기에 세상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릴 때 이렇게 당연히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어른이 되면 무엇 때문에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른의 세상이 과연 맞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수도>의 세상을 응원하고 싶은 것, 바로 이 때문이다.

 

<공수도>(2019)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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