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장윤미의 문화톡톡] 부모의 연애 무게는 너무 무겁다
[장윤미의 문화톡톡] 부모의 연애 무게는 너무 무겁다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0.05.06 13: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해 전 어머니는 실버 강좌에서 만난 남자분과 몇 개월 교제를 하시다 헤어지셨다. 혼자 되신 이후로 꽤 외로워하셨는데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시면 좋겠다는 말을 전한 지 얼마 안 터라 내심 안타까웠다. 이별의 이유는 상대 자식분들의 노파심이었다. 서로 외롭지 않으시게 연애나 ‘오래’ 하시라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살림을 합치는 것도, 혼인 신고하는 것도 이래저래 서로 부담이 되는 일 아니겠냐며 자식들이 연애의 참견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닌 게 아니라 남자분은 이별을 통보했는데 아무래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안 되겠다는 이유였다. 자신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경제적, 심적으로 자식들에게 기대는 처지인데 행여나 원치 않는 ‘어머니’를 들임으로써 자식들이 짊어지어야 무게를 생각하니 아버지로서의 도리가 아니더라는 말과 함께. 두 분의 연애는 ‘가족’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렇게 종료되었다.

연애라는 게 나이에 관계없이 어려운 일인 건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황혼 연애가 쉽지 많은 않은 이유는 그 관계가 개인과 개인의 합으로 끝나지 않고 ‘가족의 재구성’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 사람을 어머니 혹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또 하나 나중에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법적‧경제적 의무까지 생각하다 보면 부모의 사랑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가 섞이기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거부할 경우 사회적 시선(이건 거의 보이지 않는 감시에 가깝다)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자식이 부모의 연애에 참견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황혼 연애 또는 황혼 동거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적 문제와 부양 문제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 부양은 대개 자녀 또는 혈연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부모의 재혼으로 인해 가족이 재구성됨으로써 부양해야 할 대상이 늘어난다면 부양자인 자식 입장에서 경제적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부양자가 재정 능력이 좋은 경우라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법적 배우자란 이유만으로 재산 권리를 주장했을 때 순순히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재산으로 인한 가족간 법적 싸움의 사례만 보아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황혼 연애가 경제, 부양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가족이 이런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적어도 현실을 이유로 노년의 사랑을 포기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만약 부양 문제를 가족이 아닌 국가가 보장해준다면 황혼 연애는 가족이 아닌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를 수 있지 않을까?

 

가족의 무게감

황두영의 <외롭지 않을 권리>에서는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우선 이 법의 주체가 되는 ‘생활동반자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혈연이나 혼인으로 이뤄진 민법상 가족이 아닌 두 성인이 합의하에 함께 살며 서로 돌보자고 약속한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이 ‘생활동반자법’인데 생활동반자 관계에 있는 이들이 국가에 등록을 하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복지 혜택 등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1]

 

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
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

저자는 생활동반자법이 법제화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90년대 이후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는 가족의 해체와 1인 가구 증가라는 사회 구조의 변화를 꼽는다. 가족의 해체라고 말하면 마치 위기나 붕괴를 떠올려야 할 것 같지만 그런 의미의 해체가 아니라 구조의 재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한국의 경제 구조 판은 바뀌었다. 가부장의 월급으로 운영되었던 기존의 가족 경제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대신 가족 모두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어 인력 시장에 투입됐다. 가장이 부여했던 재정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일자리를 위해 본가를 떠나 집을 구하고 직장을 구했다. 주거와 급여의 안정을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일상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되고 그러면서 가족간의 연대 의식은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그런데 사회 구조의 변화로 인해 가족의 크기는 줄어든 반면 가족 구성원의 안전/보호와 관련된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 책임의 무게가 비례하여 줄어들지 않았다. 질병, 가난, 돌봄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결의 주체는 여전히 가족이 1순위다. 특히 부모의 부양 문제 경우 가족이 책임지는 것이 윤리라는 생각이 아직은 강한 까닭에 노인 돌봄이나 부양과 관련된 사회보장 시스템이나 법적 제도는 개선의 속도가 다른 것에 비해 매우 더디다.

그러다 보니 부양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감과 무게감은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경제적 조건이 윤택한 사람일 경우 좀 덜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양자 입장에서 피부양자 신변의 변화와 같은 물리적인 환경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늘어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부양자와의 동거가 불가피한 경우 부양자는 자신의 생계비를 나누어 쓰는 것은 물론이며, 돌봄까지 담당해야 하기에 자신의 사생활 역시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반대로 피부양자라고 해서 편하게만 부양을 받는다고 할 수도 없다. 혹시나 배우자나 자식이 자신의 부양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물론일 테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전까지 수행해왔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는 데서 느끼는 무력감이나 무능함은 부양자가 우울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가족이란 이유로 너무나 많은 짐을 떠안게 되는 이 구조는 누구 한 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비극 아닌 비극이다. 둘 사이에 연결된 책임의 고리를 하나만 덜어내도 온전한 개인으로서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를 누릴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준비가 덜 되어 있는 듯하다. 국가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돌봄과 부양과 관련된 구조적인 문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국가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맞춰 ‘개인’이 행복할 권리를 위해 가족이란 이름으로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를 덜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고 노령 인구가 출생 인구보다 늘어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양과 무게의 책임과 의무를 가족에게 요구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다. 피부양자 입장에서도 국가가 법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돌봄 시스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부양을 받는 ‘을’의 입장을 이유로 개인의 권리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감정으로, 고독을 당연한 운명으로, 노년의 사랑은 주책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자격지심일 뿐이다.

황두영은 한국에서는 가족이 되는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말한다. 가족임을 인정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물리적 기반(이것은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하게 갖춰져야 한다. 최소한 방 두 개 화장실 하나가 딸린 집은 있어야 하고, 불편함 없을 만큼의 살림살이도 구비되어야만 한다)은 기본이다. 여기에 감정적 비용도 생각하면 만만치 않다. 가족이 재구성되고 한 사람이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역할(남편/아내/자식/보호자 등등)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미 유지되어 있는 가족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갈 경우 그 갈등은 훨씬 크고 깊다. 황혼 연애나 동거가 어려운 이유다. 사적인 사랑은 공적인 가족 시스템을 만나면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친다. 원치 않는 부모가 생기기도 하고, 자식이 생기도 한다. 여기에 재산 문제라도 생기게 되면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거나 범죄를 사주하는 막장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을 마주하지 말란 법도 없다. 중년의 연애나 결혼이 치러야 하는 감정적 비용은 청년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 결국 이 꼴 저 꼴 보느니 차라리 가족이 없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단지 개인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개인의 불행은 때로 사회의 안전망을 흔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고독사를 들 수 있다. 혼자 살던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사망한 후 방치됐다가 발견된 죽음을 가리켜 우리는 고독사라고 한다. 고독사 자체도 비참하지만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죽은 사람이라는 낙인은 또 한 번 그 죽음을 비극적으로 만든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혼자 살기로 한 개인의 선택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음'이라는 아이러니한 수식어를 따라오게 만들었다.

이러한 비극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황두영은 이제는 "책임과 의무가 덜어진 가족의 자리에 같이 사는 즐거움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동반되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늙음과 가난은 더 이상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어젠다라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건 현실의 수많은 문제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족의 부담이 낮아지면 개인이 행복해진다

‘돌봄’이란 말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회의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화두다. 특히 ‘돌봄’의 주체와 대상이 개인과 가족에서 국가와 시민 전체로 이동‧확대되면서 돌봄의 문제는 공론화, 체계화, 시스템화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붕괴 현상은 다가올 우울한 미래가 아니라 당면한 문제다. 앞으로 가족의 의미는 더 옅어질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사정이나 이유에 관계없이 1인 가구는 늘어나고 있으며 아주 예외적인 상황, 이를테면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면 파격적인 현금 혜택이나 사회적 우대가 주어진다는 (공상에 가까운) 명분이 존재하지 않은 이상 앞으로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신혼부부나 다자녀 가족들에 대해서 주택청약 우선순위제도나 세금 감면 혜택 등 여러 혜택들이 존재하고 다양하게 개선되고는 있지만 이 제도의 실효성을 의심하듯이 혼인율과 출생률은 매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리 좋은 집을 갖고 싶은 게 소원이라 하더라도, 혜택을 원하는 사람이라도 원치 않는 결혼을 하거나 기꺼이 부양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자기 필요에 의해 공동체를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혈연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족의 재건은 이제는 요원하다. 이러한 변화에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바로 돌봄과 관련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법적 제도 마련이다. 더 이상 돌봄 문제는 가족에게 기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가족 시스템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음에도 국가 이를 외면하거나 방치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개인이 능력에 따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선언해버리면 극적인 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행복할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가족의 돌봄만 집중하다 서로 불행해지는 사태가 올 것이 뻔하다. <이상한 정상 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가족의 공, 사 비율에서 공을 늘리기 위해 공공이 개입하는 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각자의 개인이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가족에게 부과된 의미와 기능을 축소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시선의 전환이 필요한 동시에 제도 역시 마련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법적, 제도적 시스템이 있다면 의식 전환과 관련된 소비 시간을 단축하는데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황두영 역시 서로를 돌보며 살겠다는 마음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방치하는 것, 정상 가족을 복원하여 돌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최대한 조직해내는 것이 고독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족이 아니어도 남편, 아내가 아니어도, 자식이 아니어도,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서로를 돌보겠다는 마음을 국가가 인정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이고 보상과 혜택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해줄 수 있는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노인 인구의 증가가 가시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노년의 돌봄을 오로지 가족의 힘으로 해결하기에 너무 벅차다. 따라서 이 힘이 사그라들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는 가족의 짐을 덜어주는 동시에 노년층은 물론 잠재적 부양자의 일상과 행복의 보장을 위한 사회적 안정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부모의 연애를 현실적인 문제를 이유로 조용히 마무리되길 요구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자식의 처지며, 반대로 자식의 면을 깍지 않고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는 무의식적 검열에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참고문헌:

[1]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 시사인북, 2020년, 6쪽.

[2]]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동아시아, 2018년, 237쪽.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