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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광해>와 <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숲의 왕’의 운명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광해>와 <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숲의 왕’의 운명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05.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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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어의(御衣)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왕의 은수저가 검게 변한다. 독살 음모? 아니, 역모? 그 이후 상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왕은 대신들을 서슬 퍼렇게 몰아친다. 살점 타는 냄새와 단발마의 비명 소리가 의금부 담장을 넘고, 신하들은 편전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사시나무처럼 떤다. 그리고…, 그리하여…. 몇 명의 신하가 주검이 되고, 귀양을 가고, 임금과 신하들은 적당히 화해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의 익숙한 스토리 일부분이다. 그러한 점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 2012)는 결이 약간 다르다. 도입부와 결말은 기존 시대극과 흡사한데, 전개 과정에는 색다른 상상력이 내재돼 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핵심 소재로 삼았던 ‘가짜 왕’ 혹은 ‘숲의 왕’ 모티브가 변주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나온다. “광해군 8년, 역모의 소문이 흉흉하니 임금께서 은밀히 이르다. ‘닮은 자를 구하라. 해가 저물면 편전에 머무르게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도승지 허균(류승룡)은 어명을 받들어 광대 하선(이병헌)을 데려오고, 광대 짓을 하면서 흉내 내기에 일가견이 있던 하선은 ‘밤의 임금’이 되고, 나중에는 낮에도 ‘가짜 왕’이 된다. 그리고 진짜 광해(이병헌)는 양귀비의 독으로 인해 진짜로 몸이 쇠약해져서, 정신이 혼미해져서, 길상사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가짜 왕’ 하선이 진짜 왕처럼 행세한 과정과 복잡미묘한 행동들을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하선은 가짜 왕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이 바라는 왕의 전형을 보여주고, 그리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진짜 왕과 차별화된다. 즉 하선이 행하는 ‘가짜 왕’은 백성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임금, 하나를 받기 위해 하나를 주는’ 정치가 아니라 나라만을 위하는 정책을 펴는 임금이다. 괴팍한 진짜 광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가짜 왕’ 하선은 ‘진짜 왕’ 광해의 결정에 의해 임시 왕위에 오른다. 즉 하선이 광해와 싸우거나 역모에 의해서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선이 임금 노릇을 하는 사이, 광해는 길상사 외진 방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하선은 생명의 시간, 광해는 죽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제임스 프레이저가 묘사한 네미 숲의 사제직 결정 방식이 떠오른다. 네미의 성스러운 숲에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주위를 무시무시한 사람 그림자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배회하고 있다. 그 사람은 당장이라도 적에게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듯이 칼을 빼들고 주위를 살피고 있다. 그는 바로 사제이다. 그런데 이 사제는 전임 사제를 죽이고 사제가 된 살인자였다. 지금 그가 경계하고 있는 상대는 조만간에 그를 죽이고 그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될 사람이다. 즉 사제가 되고 싶으면 현재의 사제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 성소의 관례이다. 전임자를 죽이고 사제가 된 사람도 언젠가는 자기보다 강하거나 교활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사제는 이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동안 왕의 칭호를 얻게 된다(1). 이러한 관습은 제정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광해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숲의 왕’은 역모에 성공한 자인 셈이다.

네미 숲의 사제(왕)는 ‘인간 신’의 개념이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인들에게 인간은 언제나 자연과 소통할 수 있었으며, ‘인간 신’은 신이나 초자연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데 원시인들은 신과 마력이 있는 주술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주술사는 처음에는 마술사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신과 왕의 1인2역을 맡았다. 마술사→주술사→신과 왕으로 신분이 변화한 것이다. 네미의 ‘숲의 왕’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숲의 왕’은 수목(식물) 숭배와 관련돼 있다. 수목(식물) 숭배는 근대 유럽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만큼 보편적이며 역사적인 뿌리가 깊다. 유럽, 아프리카, 근동을 포함한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는 수목의 생명력과 관련된 의식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수목이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을 차원에서 다양한 의식을 치른 것이다. 원시인의 자연 의식은 아도니스,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 신화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생명력을 되찾는 식물의 일생이 재생과 부활의 신화로 남은 셈이다. 원시인들은 쇠약해진 왕을 죽이고 젊고 힘센 왕을 새로 추대함으로써 부족의 생명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원시시대에는 실제로 왕의 생명을 빼앗았고, 이러한 행위가 나중에는 마을의 의식으로 변화했다. 이 의식이 발전한 결과, 네미의 ‘숲의 왕’은 자신보다 힘이 센 왕이 등장하면 죽어야 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인물과 서사도 네미 숲의 왕, 수목(식물) 숭배 신화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즉 길상사에 은둔한 진짜 광해는 쇠약해진 왕, 하선은 젊고 힘센 새로운 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광해는 양귀비 독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다가 복귀한다. 이 행적은 식물이 겨울에 잎을 떨구고, 봄이 되면 잎을 다시 틔우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숲의 왕’ 이야기와 다른 점은 사제(왕)의 죽음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전임자를 죽여야만 사제(왕)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영화에서 광해의 변화는 육체적, 정신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이뤄진다. 육체적으로는 반죽음 상태에 있다가 부활하고, 정신적으로는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는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한다. 따라서 이 영화가 하선의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행적 사이사이에 ‘병든 왕’ 광해의 초췌한 모습을 비추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 될 수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와 식물(수목) 신화, ‘숲의 왕’ 이야기를 연결 짓다 보면,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 2005)과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 2020)이 떠오른다. 두 영화는 박정희 암살이라는 현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프레이저의 주장을 따르자면, 박정희는 현재의 사제(왕), 김재규는 사제(왕)가 되고자 한 인물로 치환할 수 있다. 신화에서는 현재의 왕과 미래의 왕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고, 마침내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에게 죽음의 시간은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제의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광해의 부활은 허균의 죽음을 불러온다. 광해가 유폐돼 있던 동안 실질적인 왕 노릇을 했던 허균은 광해가 복귀한 지 1년 후에 비극을 맞이한다. 허균은 진짜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하선을 이용해 왕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진짜 왕으로서는 허균의 그러한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력을 회복한 사제(왕)가 도전자를 물리친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과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신화적인 상상력이 그대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남산의 부장들>의 결말 장면에 잘 나타나 있듯이, 김재규는 거사 직후 청와대 대신 육군본부로 차량을 돌림으로써 왕이 될 기회를 상실했다. jtbc가 입수한 10ㆍ26 사건 1ㆍ2심 군사재판 녹취 테이프에 의하면, 김재규는 재판에서 "솔직히 차지철은 덤으로 보낸 거지"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10ㆍ26에서의 총격은 차지철과의 갈등에서 나온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박 전 대통령을 겨냥했다는 것이다(『중앙일보』, 「"솔직히 차지철은 덤으로 보낸 거지" 김재규 10·26 육성 2탄」, 2020, 05, 24). 다시 프레이저를 인용하자면, 김재규는 현재의 왕을 죽임으로써 ‘숲의 왕’이 될 기회를 얻었으나 결국 사제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허균은 진짜 왕의 부활을 이끌어냈지만 가짜 왕을 보필했다는 이유로, 가짜 왕을 진짜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반면 하선은 허균과 공모해 진짜로 왕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될 욕심을 버림으로써 원래의 자리로 웃으면서 돌아갔다. 이처럼 시대적 배경과 인물, 주제 등이 서로 다른 세 편의 팩션을 식물(수목)의 순환과 ‘숲의 왕’ 모티브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나름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다.

 

(1)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 이경덕 옮김, 까치, 1995, 32쪽. 기타 식물(수목) 숭배, ‘숲의 왕’ 등과 관련된 내용은 이 책을 인용한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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