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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음식 한 접시 : <더 플랫폼>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음식 한 접시 : <더 플랫폼>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05.25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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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가더 가츠테루-우루샤의 데뷔작 <더 플랫폼>(2019)은 수많은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만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 고렝이 눈을 떴을 때, 활기 넘치던 거대한 주방은 사라지고 노인 트라마가시가 나타난다. 고렝은 한 층에 두 사람씩 배치된, 수직의 감옥 공간에 수감된 상태다. 맨 위의 0레벨에서 맨 아래 레벨까지를 관통하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구멍(이 영화의 원제 'El Hoyo'의 뜻은 ‘구멍’이다)에서 거대한 밥상이 내려오는 순간, 고렝은 자신이 일종의 지옥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리사들이 정성껏 만들었던 진수성찬은 고렝이 있는 48레벨까지 내려오는 동안, 위층의 수감자들을 차례로 거치면서 거의 쓰레기 상태가 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위층에 있을수록 더 좋은 상태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수감자들 앞에 밥상이 머무는 시간은 2분 정도뿐이며, 나중에 먹으려고 음식을 취하면 즉시 응징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한 달마다 알 수 없는 규칙에 따라 계속 다른 레벨에 배치된다. 따라서 그들은 더 아래층에 배치되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층에 머무는 동안의 이점에 혈안이 된다. 아래층의 수감자들을 위한 배려나 여유가 생길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그들은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처넣거나 밥상이 자신에게 멀어질 때는 먹지 못하게 된 음식에 침을 뱉기도 한다.

그 공간의 구조와 규칙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생각하게 될 때, 봉준호의 <설국열차>(2013)가 떠오른다. 승객들을 계급에 따라 기차의 앞과 뒤에 배치한 <설국열차>보다 <더 플랫폼>의 설정은 어떤 면에서 더 잔인하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 빈민들은 열악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힘을 합해 투쟁을 모색할 수도 있지만, <더 플랫폼>의 수감자들은 두 사람 씩 층별로 고립되어 있어서 연대를 도모하기 어렵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 같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레벨에서 친구 같았던 상대가 음식이 고갈된 레벨에서는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게 될 수도 있다. 한 달마다 레벨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더 나은 레벨에 갈 수 있다는 기대와 몇 달 동안 살아남으면 그곳을 나갈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된다.

 

그 공간의 관리자는 “꼭대기에 있는 자들, 밑바닥에 있는 자들, 그리고 추락하는 자들”의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171레벨에 배치되었을 때 트라마가시는 고렝을 잡아먹으려고 함으로써, 관리자의 말을 고렝에게 깨닫게 해준다. 그런데 그 공간이 지옥이 된 이유는 관리자 때문일까? 아니면 그 곳의 수감자들 때문일까? 고렝이 33레벨에서 마주한 두 번째 룸메이트 이모구리는 만일 수감자들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만 먹는다면 밑바닥 층의 수감자들까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싶어 한다(『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데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 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닐 것이다. 25년 동안 관리자를 위해 일했던 이모구리는 수감자들을 위해 그 공간에 자원했다고 하는데, 다소 나이브하게 애완견을 데려 올 정도로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애완견이 미하루에게 무참하게 사지절단 되는 순간, 이모구리는 비로서 그 공간의 폭력적인 본질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그녀가 믿었던 방식으로 변화는 불가능하다. 이모구리는 202레벨에 배치되었을 때 뛰어내리지 않고 목을 매어 자살함으로써, 고렝이 한 달 동안 생존할 수 있게 만든다.

이모구리와 함께 세 부류에 속하지 않은 또 다른 인간은 미하루이다. 미하루는 아이를 찾기 위해 밥상을 타고 기꺼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인물이다. 고렝은 두 여자를 통해 음식을 골고루 나눈다는 발상과 밥상을 타고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발상을 얻게 된다. 감옥에 『동키호테』를 가져간 고렝은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며 몽상가이다. 따라서 그는 6레벨이라는 거의 최상의 층에 배치된 행운을 포기하고, 마지막 층까지 음식을 나누면 시스템을 부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룸메이트 바라핫을 설득해 아래로 내려간다.

두 사람은 333레벨에서 바닥에 누워있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밥상에서 내리게 된다. 바라핫은 ‘화려한 접시에 담긴 디저트 파나코타’를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 그것을 고스란히 0레벨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관리자에게 메시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밥상은 아래로 내려가고 바라핫이 파나코타를 갖고 있는데도 아무런 응징이 없다.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굶주렸을 그 소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파나코타를 건넨다. 타인을 위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이다.

 

이 영화는 기발한 설정, 음식 쓰레기 밥상 그리고 살인과 인육을 먹는 끔찍한 장면 등으로 매우 효과적으로 충격을 선사한다. 그런데 소녀가 파나코타를 먹는 장면에서는 정서적인 울림이 별로 없다. 1시간 20분 넘게 살벌한 장면을 계속 보면서 정서적으로 매우 피폐해진 관객에게 소녀가 음식을 먹는 순간 위로의 느낌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감독의 연출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어쩌면 현대 영화가 인간의 어두운 면과 세상의 부조리를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점점 능해지는 반면, 신파에 빠지지 않은 채 정서적으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는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더 플랫폼>에서 관리자는 은발에 미색 양복을 입은 백인이다. 고렝은 백인이고 바라핫은 흑인이다. 미하루와 소녀는 동양인이다. 고렝이 소녀를 밥상에 태워 레벨0으로 올려 보내는 설정은 <설국열차>와 <칠드런 오브 맨>(2006)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설국열차>에서는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이 탑승한 열차가 폭파되면서 어른들의 희생을 통해 한국인 소녀와 흑인 소년이 살아남는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원인도 모른 채 인류 전체가 불임이 된 상태에서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과 그녀의 아기를 구해내고 숨을 거둔다. 이러한 설정에서, 백인을 중심으로 구축된 자본주의 시스템의 파산과 반성, 유럽이 처한 난민문제 등을 생각해보게 된다.

‘코로나19’ 치료제가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그 때 우리가 직면하게 될 현실이 <더 플랫폼>의 설정을 구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고렝이 죽어가면서 읽는 『동키호테』의 한 구절에 따르면, “관대하지 않은 부자는 인색한 거지가 된다. 부의 주인은 그것을 소유가 아니라 씀으로써 행복을 만들고 잘 쓰는 방법으로 행복을 만든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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