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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정치학, 신정아의 <4001>
고백의 정치학, 신정아의 <4001>
  • 이택광
  • 승인 2011.04.08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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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책은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 이런 까닭에 최근 논란의 중심에 놓인 신정아의 책 <4001>에 대한 ‘평가’는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4001>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작 책 자체에 주목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신정아라는 ‘유명인’이 쓴 책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책도 엄연히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이 책은 정당한 서평을 요청하는 완결된 세계를 이룬다고 하겠다. 일단 <4001>은 지금 언론에서 다루는 것처럼 단순하게 선정성을 간판으로 내걸고 나온 책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고백’을 중요한 전략으로 취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폭로가 아닌 자신 드러내기

미셸 푸코의 말이 옳다면, 고백은 결코 잘못된 것을 폭로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 아니다. 고백의 정치학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백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학’이다. 신정아의 책은 정확하게 이런 푸코의 생각을 증명한다. 
신정아는 한 인터뷰에서 결코 특정인의 비리나 잘못을 폭로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을 고백으로 보는 한 타당하다. 고백은 보통 ‘자아’라고 불리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자아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몸을 그 자아로 만드는 수단이 고백이다. 고백을 통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던 몸의 작동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거듭 태어난다. 신정아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사실이다.
신정아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치유였다”고 쓴다. 그가 하고 많은 일 중에서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여기에서 신정아가 말하는 치유야말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책을 쓰는 일은 ‘말’과 다른 차원에 있는 고백의 행위였다. ‘예전의 신정아’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다른 자아를 필요로 했다. 그 다른 자아의 구성은 고백을 통해 가능했다.
물론 이 고백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 나도 그랬다”는 진술은 궁극적으로 신정아가 고백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자아가 ‘누구나’처럼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평범한 자기 자신의 회복이야말로 신정아가 지금 현재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삶의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은 언론을 통해 그려진 과거의 모습을 바로잡기 위한 ‘해명’이었다. 이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주도면밀하다.
예를 들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새우깡’과 ‘짱구’가 먹고 싶다고 말한 것에 대한 신정아 본인의 해명이 눈길을 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과자를 사오라고 해서 먹은 것을 두고 그는 책에서 “스타일을 구긴 셈”이라고 말한다. “그 유명한 신정아가 병원에 와서 새우깡부터 먹은 것을 보고 완전히 실망한 눈치”를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 느낌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 신정아는 그 절박한 순간에 과자나 먹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심정을 고백하는 셈인데,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과오를 반성하는 한편 동시에 자신의 행위를 여과 없이 보도한 언론 행태를 비판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행위가 멍한 느낌에서 저지른 실수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이를 대서특필한 언론의 보도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다. 이런 ‘맞대응’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실제로 실명이나 이니셜로 구체적 인사들을 거론해서, 자기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왜 그 사람들인가 묻는다면, 아마 그들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양심 회복’, 김용철·장자연과 공유 지점

<4001>은 철저하게 계획에 맞춰 기획된 책임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이 기획은 자기 고백을 목적으로 하기에,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의 비리를 폭로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는 담고 있지 않다. 이 고백의 목적은 ‘양심 회복’을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기획이야말로 신정아의 <4001>이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나 ‘장자연의 편지’와 공유하는 핵심 지점이다.
이 고백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귀결하는 것은 자유주의 정치이다. 자유주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신성불가침한 개인의 영역이고, 고백은 이 영역의 절대성을 구성하는 행위다. 지극히 비정치적인 것처럼 보이는 고백의 행위가 정치적 분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4001>이 몰고온 파장은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소박한 차원을 넘어간다. 그러나 이 책에서 신정아는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매도한 이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순수하지 못한지 증언할 뿐이다.
파워 엘리트 집단이 부도덕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통해 은밀한 쾌락을 자기들끼리만 나눠가질 것이라는 가설은, 한국 사회에서 욕망의 변증법을 작동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 정치가 언제나 선정성과 결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사회적 부분집합의 이해관계를 적절하게 재현하지 못하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감안한다면,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선정성은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다.

정치화하지 못한 정치인 이야기

신정아의 고백은 한국 사회에서 선정주의로 퇴거돼버린 자유주의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선정주의는 신성불가침한 개인 범주를 해체해서 투명한 세계로 편입시키는 황색 저널리즘 논리다. 선정성이 강할수록 투명성도 강해진다. 어떤 신비한 것도 남아 있을 수 없다. 신정아는 자신을 속속들이 까발려버린 선정성에 맞서서  자아를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책에서 신정아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나는 결백하다’는 말이다. 이 결백의 근거는 사실을 실제보다 더 크게 부풀려 선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의 부도덕성을 증명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 논문 대필로 학위를 받고 권력 실세와 부적절한 관계이긴 했지만,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주장은 이런 논리에 의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적 분리를 통해 신정아가 재정립하려는 자신의 모습은 ‘예술과 한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순수한 여인’이다.
신정아의 책이 파워 엘리트 집단에 대한 ‘내부 고발’이자 선정주의에 물든 언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어떤 정치적 의제를 제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정치인을 다루지만, 정작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편안한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정치가 제공하는 불쾌한 분란을 한국 사회는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 사회가 신정아의 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정치인들은 나쁜 놈’이라는 믿음뿐이다.

글 · 이택광
문화평론가. 저서로 <이현세론: 영웅 신화와 소외성의 조우>(1997),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2007),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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