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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시민운동가·3선 시장... 박원순, 대권 앞에서 생 마감
변호사·시민운동가·3선 시장... 박원순, 대권 앞에서 생 마감
  • 장민영 기자
  • 승인 2020.07.10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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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새벽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신고 7시간 만에 서울 종로구 삼청동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진=박원순
10일 새벽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신고 7시간 만에 서울 종로구 삼청동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진=뉴스1

숨진 채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은 3차례나 연달아 시장에 당선되면서 여권의 대선 주자로 떠올랐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일명 ‘박원순계’로 불리는 인사 10여 명이 국회로 입성하면서 당에서도 대권 주자로서 힘을 받았지만 박 시장은 최근까지도 대선 출마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왔다.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13세 때 작은 할아버지의 양손으로 입양되는 등 순탄치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울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박 시장은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고(故)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제적을 당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국제법을 수학한 박 시장은 한국에 돌아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사형 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이후로는 상당 기간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사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특히 박 시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을 맡으며 직장 내 성희롱 풍토의 시선을 바꾸기도 했다.

박 시장은 또 1995년부터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으로 활약했다. 2000년에는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부정부패 혐의로 얼룩진 정치인 낙선운동을 전개했고 대상자 86명을 발표, 정치권을 뒤흔들기도 했다.

이 외에도 국민생활최저선운동, 사법개혁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소액주주운동, 예산감시 정보공개운동 등 여러 사회참여운동을 이끌며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을 발전시켰다.

박 시장은 ‘소셜 디자이너’로도 활약하며 2006년부터 희망제작소의 상임이사로도 일했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일종의 싱크탱크로 우리나라 최초로 거버넌스(민관협치)를 현실화시켰다는 평가다.

그는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의 후보로 나왔다. 이후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양보로 단일화에 성공한 뒤 야권의 단일후보로 나와 시장직에 당선됐다.

이후 반값등록금과,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청년수당, 도시재생, 사회적경제기업 협동조합, 원전하나줄이기, 노동이사제, 토건에서 복지 패러다임으로 전환 등 수많은 정책을 단행했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중도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 최초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전히 여권 차기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굳혀왔지만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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