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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산 속의 세 여자>,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나?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산 속의 세 여자>,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나?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07.14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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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정애리)은 늦은 밤에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에 달려가 남편 명재(하명중)의 죽음을 확인한다.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명재를 잃은 미영이 망연자실한 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장례식장에 의문의 여자 두 명이 찾아온다. 두 여자와 명재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영화 <우산 속의 세 여자>(이두용, 1980)는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남편에게 숨겨 둔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내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은데, 이처럼 익숙한 설정으로 시작한 영화는 최소한의 대사와 상징적인 쇼트들로 빠르게 오프닝을 마친 후 관객의 궁금증에 답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미영은 명재의 일기장에서 알파벳 머리글자로 기록된 단서를 발견하고 두 여자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한다. 자가용을 타고 장례식장을 찾았던 여인은 민신애(김미숙)라는 이름의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이고, 빨간 점퍼를 입은 채 명재의 영정 앞으로 뛰어와 오열했던 여인은 시내의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오수미(이문희)이다. 명재가 생전에 자신 몰래 그들을 만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영이 선택한 것은 여자들을 향한 복수다. 명재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편집해서 죽은 명재가 전화를 한 것처럼 신애와 수미에게 전화를 걸고, 신애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신애를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미영이 신애와 수미를 몰래 미행하고 복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불안하게 조여 가는 과정은 독특한 스타일로 재현된다. 기울어진 앵글, 극단적인 앙각, 몽타주 등 긴장을 한껏 높이기 위한 기법들이 총동원되는데, 특히 음악의 사용이 이채롭다. 범죄영화니 액션영화에서 쓰일 법한 리듬이나 악기 구성의 영화 음악은 미영의 복수와 세 여자 간의 긴장 관계에 독특한 정서를 불어넣는다.

명재의 목소리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신경 쇠약 증세까지 갖게 된 수미는 그 전화가 미영의 짓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미영에게 만날 것을 요구한다. 미영은 수미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신애를 끌어들여 수미와 신애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만든다. 명재가 한 여자만 만났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여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자 하는 미영의 계략이었다. 수미와 신애가 마주 앉아 명재가 둘을 모두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빠른 비트와 하모니카 연주가 곁들여진 컨트리 음악이 이어지는데, 이 음악은 두 여자의 상황이나 심정보다는 두 인물이 마주하고 있다는 외적인 대립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음악을 비롯하여 스릴러나 범죄영화에 어울릴 법한 영화적 기법들이 영화 전체에 걸쳐 썩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기본적인 완성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영화 서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세 여자 간의 긴장을 참신하게 보여주려는 의지가 서로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전개된다. 그 하나가 미영이 신애와 수미에게 하는 복수라면 다른 하나는 미영, 신애, 수미의 회상에 기댄 그들과 명재 사이의 사연들이다. 갑작스런 사고로 명재를 잃은 미영은 명재와의 만남부터 둘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꿈속에서 혹은 상념 속에서 종종 되돌아본다. 미영의 회상이 하는 역할은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인물의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미영의 회상은 관객들에게 명재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영화적 수단이기도 하다. 미영의 회상 속 명재는 극도로 수줍음이 많고 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낸 인물이다. 그는 미영을 만나고 부유한 대가족인 미영의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졌음에도 그들과 편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처럼 명재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은 비단 미영의 회상만이 아니다. 영화의 절반은 미영, 수미, 신애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영화는 수미와 신애의 회상을 통해서 어린 시절의 명재, 결혼 후에도 방황하는 명재 등을 보여준다. 영화는 세 여자의 회상으로 명재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회상들은 미영, 수미, 신애 등 여성 캐릭터의 과거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명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회상이 신애와 수미 단독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산 속의 세 여자>는 세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보다 세 여자를 통해 이미 죽은 한 남자의 삶을 재구성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여자 사이의 긴장을 참신한 방식으로 그려내고자 사용된 그 기법들이 영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지 못하고 스타일적 과잉으로 남고 만다.

얼핏 생각하면 반대의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이 영화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세 여자의 시기와 긴장, 그리고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플래시백이 멜로드라마적 과잉을 생산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우산 속의 세 여자>를 그런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런 관점으로는 관객이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는 엔딩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두 여인을 향한 복수 의지로 냉정하게 자신의 계획을 추진해 나가던 미영은, 수미가 명재의 아이를 키우고 있고 교통사고를 당한 날이 그 아이의 백일이자 명재가 그 아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이라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성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영화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두 여인에게 복수하려 한 자신의 옹졸한 시기심을 반성하고 명재의 아픔을 감싸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미영의 회개 기도로 막을 내린다. 남편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수하던 미영이 다다른 결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그 결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답은 상당히 명백해 보인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불행하게 살아왔고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편하게 즐기지 못했던 불쌍한 한 남자에 대한 연민과 애도를 목적지로 한 여정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슬픔과 복수의 정념을 동력으로 서사를 이끌었던 미영은 그 여정의 안내자이자 회개의 눈물로 명재의 편안한 안식을 기원하는 제사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우산 속의 세 여자>의 포스터는 배경에 명재를 연기한 배우 하명중의 흑백사진과 밝은 표정을 한 세 여주인공의 일러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세 여자의 유쾌한 이야기라는 정보를 물씬 풍기는 이 포스터 이미지만을 보고 영화를 상상했던 사람이라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영화의 전개에 당혹감을 느낄 만큼, 포스터의 이미지와 실제 영화 내용 간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모든 포스터가 영화 내용과 일치하는 것도 일치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산 속의 세 여자> 포스터와 실제 영화 사이의 간극에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딜레마가 그 간극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화 비평가 로빈 우드는 1970년대 미국 호러영화에 대한 글에서, 많은 영화가 불균질적인 텍스트이고 장르 전체가 해소할 수 없는 딜레마를 향해 특징있게 움직인다면, “그 불균질성과 딜레마 자체가 궁지에 다다른 문명을 대변한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서사처럼 보이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여성의 목소리에 온전히 기대지 못한 채 남성의 이야기로 끝맺거나 여성을 그저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는 미심쩍은 영화들. 로빈 우드의 논지를 따른다면 이 영화들은 1980년대 한국사회(혹은 한국남성사회)가 어떤 궁지에 다다랐다는 방증일 것이다.

 

 

글·성진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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