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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멸의 염세주의자 -영화 <올드 가드>2020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멸의 염세주의자 -영화 <올드 가드>2020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07.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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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프린스바우스우드 감독의 <올드가드>(the old guard, 2020)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영화는 인간에게서 ‘죽음’을 제거한다면 그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거창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영화에서는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 ‘기억’이 자리한다고 답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이 수 천 년에 이르는 인류사로 확대되면 바로 ‘역사’의 서사가 구축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올드가드>는 ‘역사의 서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부여하기에 적절한 작품은 아니다. 이미 선언된 ‘죽음’과 ‘기억’이 이끄는 역사의 문제를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와 같은 것으로 풀어가는 방식이 의외로 순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이 사라진 존재들의 생체정보를 거대 제약기업 소유주의 탐욕적 대상으로 설정하고,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의 유구한 인생과 그 ‘기억’의 문제를 한 낱 합성한 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몇 장의 사진과 이들을 서로 연결한 끈으로 역사화 하려는 시도는 맥이 풀리는 클리셰를 또 다시 경험하게 한다.

 

클리셰를 극복할 매혹적인 캐릭터도 찾아보기 어렵다.(물론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는 뛰어나다.) 수 백 년에서 수 천 년을 살아온 존재들이 가진 것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과 판단은 총알이 몸에서 자동 적출되고, 찢겨진 피부가 아무는 특수효과만으로 갈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질문만은 뚜렷이 남는다. 왜 ‘불멸’인가? 물론 <올드가드>의 등장인물이 완벽한 불멸자들은 아니다. 설정 상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언젠가는 마지막이 도래한다. 하지만 이렇게도 반박할 수 있다. 수 천 년 간 연마된 출중한 무술 실력 탓에 목숨이 하나라도 영화 속에서는 어차피 죽지 않을 것 아닌가. 그것은 이미 영화 속 ‘나일’(키키 레인)과 불멸자 동료들이 ‘앤디’(샤를리즈 테론)를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총알을 막아주는 장면에서도 예감할 수 있다. 이는 원래 죽지 않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암묵적 불멸’의 수정 버전일 뿐이며, 이를 통해 보건대 ‘앤디’의 제한적 수명은 인간의 욕망구조를 가동시키는 '결핍'이 되어 또 다른 불멸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올드가드>는 ‘기억’을 죄책감과 외로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으로 설정한 후 거기에 ‘죽음의 금기’라는 영속성을 덧입힌다.

이런 ‘죽음의 금기’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보면, 말기 암세포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항체와 같은 '불멸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지만 예컨대 거대 제약회사가 상징하는 자본화의 지배적 가치들 앞에는 무기력한 모습(생포되거나, 배신을 하는 모습 등)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는 첫 째, 불멸의 존재는 기억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존재임에도 그들은 영원한 타자인 동시에 영원한 외부자가 되려고만 하고, 둘 째, 그들은 매혹적인 실존주의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자본에 종속된 배신자가 등장하고 증오의 주체가 등장함으로써 세속적인 캐릭터로 수렴되어가고 있으며 셋 째, ‘불멸’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왜 하필 나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불멸임에도 모든 인생의 끝에 자리한 그런 '이상한 허무’를 ‘본질’로 받아들인 탓에 너무나도 쉽게 세속주의자로 변질 되어갔다는 것이다. 그 세속은 결국 죄책감과 허무의 기억이라는 덫에 걸려 '염세'로 기운다. '불멸의 염세주의자'. 영화<올드가드>가 그려내는 '불멸'에 대한 아쉬움과 샤를리즈 테론의 열연이 빛을 바랜 지점은 바로 이것, 세속이 염세로 무기력하게 기울고 만 그 서사 속에서 발견된다.

- 부언: 앞서 나는 ‘불멸’과 ‘기억’이 공존하는 ‘불멸자’를 말했다. 이 불멸자는 다르게 해석해 볼 여지도 있다. 그것은 ‘죽어서는 안 되는 자’(불멸의 또 다른 버전)와 ‘잊혀 지지 않는 자’(기억의 또 다른 버전)이다. 그런데 거리가 있는 두 문장의 분명한 차이가 어쩐 일인지 잘 읽히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또 한 명의 ‘불멸자’를 잃었다는 모순적 좌절 때문인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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