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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K-좀비’라는 환상과 오해, 그 거품의 허망함 - <반도>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K-좀비’라는 환상과 오해, 그 거품의 허망함 - <반도>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7.20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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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인간의 이야기를 위해 존재한다. 실존하든 그렇지 않든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놓이며, 전염을 유발하고, 죽음에 도달하는 생성과 전파, 제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특징들로 구성된다. 좀비는 치명적인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은 이를 살려내는 과정으로 인간의 부적절한 욕망을 설명할 수 있는, 물리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존재 되어 인간의 나약한 정신과 육체를 조롱할 수 있는, 인간이 나와 다른 존재를 없애는 것으로 인간의 합리성과 잔인성이 얼마나 밀접하게 교집합을 이루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최상의 판을 내어준다. 물론 좀비 출현의 원인을 파악하고 결국 해결하는 과정은 인간이 가진 이성의 또 다른 면을 긍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결국 좀비는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대면하게 하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

좀비와 인간의 대결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 위해 구성된 가장 기본적인 틀일 것이다. 물론 이 대결의 구도는 화려한 영화적 희열을 보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좀비가 메인 스트림에서 유행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 웹툰이나 독립영화 등에서 좀비는 위협적이기보다 살아있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전사(前史)를 가지며 가족과 함께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했었고 이는 독특한 세대적 감수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특징이었다(1). 이러한 좀비들의 양상은 분명 흥미롭지만 이는 메인 스트림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좀비의 서사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인간적인 좀비’와 인간의 잔인한 대결은 성립하기 힘들며, 무엇보다 좀비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좀비’는 인간과 괴물 사이의 대결을 통한 스펙터클, 더 정확하게는 피의 카니발과 희열을 연출할 수 없다. 슬래셔 영화에서 살인마들이 전기톱, 도끼, 갈고리 등의 어마어마한 무기를 들고 등장하는 것은 공포를 조성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그것을 통한 희생의 순간을 영화적 희열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다. 좀비에게 내가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부여되었을 때 머리에 겨눈 총구는 영화적 스펙터클을 위한 장치가 아닌 약한 자를 해치는 살인 무기가 되며 결코 즐긴다는 감정 아래 놓일 수 없다. 좀비들의 반란을 그렸던 <랜드 오브 데드>(2005)가 조지 로메로가 연출했음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 것, 독특한 좀비의 서사가 메인 스트림으로 정착하지 못한 것(여기에는 다소 늦게 ‘인간적인 좀비’를 중심으로 가족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기묘한 가족>의 흥행 실패도 포함된다)을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좀비 영화가 소구하는 것은 좀비와 인간과의 극한의 대결이 중심에 놓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한국에서 증명해낸 것은 <부산행>(2016)이었다. <부산행>은 장르 영화, 그것도 괴물이 등장하는 공포물에 가까운 재난영화로 천만 관객을 이끌어 냈고, 해외에 수출되면서 ‘K-좀비’라는 수식어를 달기에 이르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롭게 등장한 이 ‘K-좀비’라는 용어이다. <부산행>이후 ‘K-좀비’는 빠른 좀비라거나 많은 수의 좀비들이 등장하는 것, 그리고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좀비들로 규정되는 듯하지만 사실 이러한 특징으로 ‘K-좀비’를 설명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좀비와 인간과의 대결이 좀비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절대값이라 할 때, 좀비의 힘이 강할수록, 그 수가 많을수록, 또 빠를수록 그러니까 공격력이 상승할수록 인간과의 대결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28주 후>(2007)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거칠게 달려드는 좀비나 <월드워Z>(2013)에서의 철옹성 같이 쌓아놓은 이스라엘의 장벽을 떼로 달려들어 넘고야 마는 좀비들의 모습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인간과의 대결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괴물의 진화는 당연한 것이라 할 때 좀비의 속도나 양의 관점에서 ‘K-좀비’를 규정하는 것은 ‘K’의 특징을 짚어냈다고 보기 힘들다.

이는 최근 ‘K-좀비’라는 요란한 수식어 속에서 운용되는 <킹덤 1,2>에서도 다르지 않다. <킹덤>은 좀비가 나타났을 때 도무지 국가라는 장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일반적인 좀비 서사와 달리 권력의 중심에 좀비에 탄생을 둔다. 즉 권력에 대한 욕망이 무엇까지를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좀비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때의 좀비는 선과 악, 성군과 폭군,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눌 수 있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킹덤1>이 좀비의 발생과 욕망의 발원이라는 서사에 주목하며 좀비와 마주하는 것에서 마무리 되었다면 <킹덤2>는 다양한 공간 안에서 좀비와의 대결을 본격적으로 배치한다. 나름의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빠르게 달려드는, 그리고 감염된 이를 끓여 먹은 이들로부터 전염된 좀비들로 거대한 은유의 개체들이다. 좀비는 늘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는 망령,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잔인함, 9.11 테러 직후에는 테러범으로 대체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권력을 뒤흔들려는 이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킹덤>의 좀비들 역시 ‘K-좀비’만의 특징을 짚어내기 힘들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실 ‘K-좀비’는 허명에 가깝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익숙하지 않은 괴물을 역수출 시킨 상업적인 성공에 대한 찬사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좀비 서사의 측면에서 분명한 성취를 지닌다. <부산행>은 쉽게 내릴 수 없는, 밀폐된 기차라는 공간에서 괴물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간단한 서사 속에서 극한을 성취했다. 숨을 곳이 많았던 쇼핑몰이나 개별 공간의 점유가 가능한 버려진 아파트 등과 다르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탈출을 기대했던 정차역이 또 다른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공간은 좀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들의 공포를 전달하는 데에 매우 적확하게 작용했다. <킹덤>은 외부에서 보기에 익숙치 않은 시대와 공간이라는 설정, 그리고 복식을 통해 좀비 이야기의 새로운 배경을 선사한다. 이 시가 중요한 것은 ‘갓’의 아름다움이 아닌, 첨단의 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다량의 전염체와 맞서 싸워야 하는 공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들은 ‘K-좀비’라는 이름으로 좀비를 변형시킨 것이 아닌 좀비 서사의 가장 기본적인 대결 구도를 극한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설정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것이다. 결국 ‘K-좀비’에 대한 오해는 좀비 서사의 기본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보여준 가장 안 좋은 예가 <반도>이다.

 

<반도>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나간 이후를 그린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루 만에 무너져 버린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즐기고, 무엇에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반도>가 집중해야 할 것이며, 좀비는 이를 위협하는 대상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즉 이 작품 내에서 인간과 좀비와의 대결이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로 내려 앉는 것이다. 이는 <반도>가 좀비 서사 내에서 대결의 긴장을 극대화하는 변주와는 상관없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는 것에 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에서 남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말초적 흥미에 빠져드는 것 정도이다. <반도>는 이를 매우 피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631부대의 존재나 좀비 숨바꼭질 씬 등은 그저 사람들이 힘들다 보니 저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가능하게 할 뿐, 이곳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서 대위(구교환)의 갑작스런 광기나 황중사(김민재)의 잔혹함, 혹은 둘 사이의 긴장의 이유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반도>의 대사들은 상황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는 어색한 말들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품이 인간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반도>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지에 대해 어떠한 방향도 잡지 못했다는 단적인 예다.

물론 이에 대해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좀비 바이러스 이후 반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원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도>는 액션 블록버스터를 앞세우고 있으며, 영화의 많은 부분에는 현란한 카 체이싱의 속도가 자리 잡는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비 영화에서 중요한 볼거리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좀비를 통해 긴장이 구성될 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반도>는 이를 구성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카 체이싱은 좀비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치며 달릴 뿐이고 좀비와의 대결은 단순하게 그려진다.

 

여기에 갑작스런 가족 서사는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특징을 끝없이 지연시키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도감으로 영화 전체를 어색하게 한다. <반도>가 생각하는 ‘인간적’이라는 것, 그리고 ‘휴머니즘’의 귀결은 익숙하면서도 지지부진한, 그리고 <부산행>에서의 실소를 오히려 강화한 퇴행을 의미하는 듯하다. 가족이 있으면 지옥이 아니라거나 가족과 함께 했으니 지금 이곳도 좋은 곳이었다는 말들은 그들이 겪어온 일들을 미루어볼 때, 그리고 그들이 가진 죄책감을 생각할 때, 인간들이 좀비를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를 볼 때,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한 말들이다. 아마도 ‘K-좀비’의 ‘K’를 크게 오해한 듯한 이 설정은 <반도>가 좀비 서사 ‘이후’를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아닌 스케일의 확장에 그친 것뿐이라는 혐의를 떨치기 어렵다.

‘K-좀비’라는 용어가 한국에서 형성한 좀비‘만’의 특징이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식으로 변주되는 괴물은 쉽게 찾기 어려울뿐더러 앞서 말했듯 혹시 괴물이 변화한다면 이는 장르의 변화까지를 초래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되지 않지만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단어는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대한 강박은 장르적 전락을 가져왔다. <반도>는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예로, 괴물을 통해 인간을 보여주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괴물 서사의 원형을 지켜내지 못했다. 관객들은 좀비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하면서 거대한 스케일에 무조건적인 환호를 보내지도 않는다. 그만큼 좀비의 세계는 (가족을 빼고도) 다양하게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1) 필자는 이미 2013년 이러한 특징들을 ‘한국형 좀비’로 묶어 논문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반도>(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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